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광기 [사람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일찍이 세상에 진정한 천재가 나타나면, 모든 바보들이 공모하여 그에게 맞서는 것으로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고 했다. 존 케네디 툴은 이 신랄하고 철학적인 문장에서 제목을 따와 그의 위대한 희극 소설 《바보들의 결탁(A Confederacy of Dunces)》을 세상에 남겼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 J. 라일리는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비대하며, 다루기 힘들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뉴올리언스의 어두컴컴한 골방에 갇혀 중세의 도덕성과 기보에 대한 거창한 이론을 타자기로 두들겨 대면서, 정작 자신의 삶은 오만과 편견, 그리고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로 채워 넣는다.
A Confederacy of Dunces Paperback
그는 세상의 모든 모순과 타락을 비난하지만, 실상은 그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고 무책임하며 자기중심적인 인간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를 위대한 철학자이자 계몽가로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가 발을 디디는 모든 곳은 어김없이 혼란과 난장판으로 변하고 만다. 툴이 그려낸 이 자칭 천재의 비극은 실상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무지와 오만을 지혜 로 오인할 때 도달하는 정교한 희극적 파멸을 상징한다.
필자는 소설의 책장을 덮고 오늘날의 현실 정치판, 정확히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바라본다. 그리고 경악에 찬 눈으로 깨닫게 된다. 존 케네디 툴이 픽션으로 창조해 낸 그 어처구니없는 이그네이셔스가, 단지 종이 위에서 걸어 나온 수준을 넘어 세계 최강국의 권력을 쥔 통치자로 실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21세기 거대한 정치적 무대 위에서 펼쳐진 도널드 트럼프의 비극적 소동극은, 이그네이셔스 라일리가 현실에서 완벽하게 재현된 고통스러운 상징과도 같다. 툴의 세계관이 예견한 바보들의 공모는 단순한 소설 속 장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력층과 이성을 상실한 대중이 결합할 때 현실의 역사에서 어떤 비극으로 구체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이그네이셔스의 가장 큰 특징은 압도적인 자기지향성이다. 그는 자신만의 망상 속 세계에 살며, 자신의 타협할 수 없는 욕구와 기분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는 자아에 갇혀 외부 세계와의 건강한 상호작용을 포기한 전형적인 솔립시즘(Solipsism, 유아론)의 극단이다. 트럼프 역시 마찬가지다. 트럼프에게 세계는 복잡다단한 역사적, 사회적, 철학적 얽힘의 공간이 아니라, 오직 자신을 찬양하는 자와 자신을 비난하는 자로 나뉘는 극단적 이분법의 경기장에 불과하다.
이그네이셔스가 자신의 기분이 조금만 상해도 세상 전체가 자신을 위해 멈추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리듯, 트럼프는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이나 객관적 진실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가짜 뉴스 라 매도하며 국가 시스템 전체의 신뢰를 흔들어 놓는다.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감옥에 갇힌 자가 거대한 시스템의 핸들을 잡았을 때, 사회적 통념과 공적 진실은 한낱 개인의 기분에 따라 손쉽게 유린당한다.
어리석음의 본질은 단순히 지능이 낮거나 지식이 부족한 데 있지 않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경고했듯, 진정한 어리석음은 자신의 무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오만, 스스로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는 성찰 능력의 부재, 그리고 타인의 고통과 사회의 규범을 가볍게 여기는 무책임에서 나온다. 이그네이셔스가 핫도그 수레를 끌고 거리에 나섰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는 장사를 하기는커녕 핫도그를 자신이 다 먹어 치우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회사에 폭동을 일으키게 만든 뒤 유유히 도망쳤다. 거창한 도덕적 수식어로 자신의 기행을 포장했지만, 결과는 파멸과 혼란뿐이었다. 철학적 성찰이 결여된 광기는 행동의 동기와 관계없이 항상 타인의 삶을 파괴한다.
트럼프 대통령 페이스북 갈무리
트럼프가 외교와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 역시 이 핫도그 장수 이그네이셔스의 행태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그는 국제적 협약과 동맹,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외교적 신뢰와 평화의 가치를 아이들의 소꿉놀이판 뒤엎듯 하루아침에 파기했다. 특히 무모하고 충동적으로 이란과의 갈등을 유발해 중동에 전쟁의 포성을 울려 놓고는, 아무런 명분도, 전략적 성과도, 도덕적 명찰도 거두지 못한 채 사태를 엉망진창으로 방치했다. 명확한 종결조차 짓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이란의 눈치를 보며 절절매는 수치스러운 꼴을 전 세계에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가 저지른 무모한 일탈과 무지성적 폭주의 여파로 유가와 물가가 치솟아 온 세계 시민들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정작 불을 지른 당사자는 단 한 줄의 성찰이나 반성조차 없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위대한 협상가이자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고 강변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만든 불길에 전 세계를 밀어 넣고도 뒷수습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거인’이자 무책임한 폭주족에 불과하다.
이그네이셔스와 트럼프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 공통점은 피해의식에 찬 자기정당화 와 악의 평범성 이다. 이그네이셔스는 자신이 실패할 때마다 늘 남 탓을 했다. 어머니의 무능함, 뉴올리언스의 음란함, 현대 사회의 몰상식함 때문에 자신이 뜻을 펼치지 못한다고 믿었다. 트럼프의 정치적 동력 또한 다름 아닌 이 피해의식과 원망의 정치였다. 그는 대중에게 그들이 당신들의 몫을 빼앗아 갔다 고 선동하며, 그 분노의 화살을 이민자, 외국, 언론, 그리고 사법 시스템으로 돌렸다. 자신이 일으킨 분쟁과 정책 실패, 지성을 모독하는 발언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음에도, 정작 그 모든 혼란의 주범인 그는 언제나 부당하게 공격받는 치명적인 피해자 의 가면을 썼다. 이는 비판적 사고를 거부하는 어리석음이 자아내는 구조적 악의 형태다.
민주주의의 비극은 어리석은 인물 한 명이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더 큰 비극은 이 어리석음에 동조하고 열광하는 바보들의 동맹 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서 이그네이셔스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기행에 끌려다니며 그를 추종하거나 이용하려 했던 이들처럼, 트럼프 주변에는 그의 어리석음을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자들과, 그의 유치한 사이다 발언에 매료되어 이성을 마비시킨 대중이 몰려들었다. 2021년 1월 6일 미 의회 의사당 난입 사태는, 어리석은 지도자와 그를 맹신하는 바보들의 동맹이 결합했을 때 헌정 질서가 어떻게 한순간에 희극에서 비극으로 몰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참담한 증거였다. 대중이 이성적 판단을 포기하고 상징적인 카리스마와 유치한 선동에 휩쓸릴 때, 민주주의는 법치와 인권의 기반을 잃고 우민 정치의 늪으로 추락한다.
이그네이셔스 J. 라일리는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내질 위기에 처하자 또 다시 사기꾼 친구의 차를 타고 도망치는 것으로 소설의 끝을 맺는다. 그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고, 아무것도 반성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또 다른 도시로 가서 자신의 거창한 철학을 되뇌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삶을 망쳐놓을 것이다. 트럼프의 정치적 유산 또한 마찬가지다.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혹은 다시 그 권력을 잡으려 요동치는 과정에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성찰한 적이 없다. 반성이 없는 자에게 역사적 교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갈증과 분열의 씨앗만이 남을 뿐이다.
바보들의 동맹이 만들어낸 가장 괴기스러운 산물, 그것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라는 정치적 현상이다. 자신의 욕망과 무지를 상식과 정의로 착각하는 인간, 타인의 권리와 시스템의 존엄성을 짓밟으면서도 자신이 세계를 구원하고 있다고 믿는 인간, 그리하여 온 세상을 자신의 조증 어린 일기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 툴의 소설이 우리에게 준 철학적 경고는 명확하다. 어리석은 자가 권력을 잡고, 그 어리석음이 환호받는 사회는 결국 희극의 탈을 쓴 비극의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바로 자신의 무지함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지혜라고 믿는 사람이며, 우리는 지금 그 어리석음이 몰고 온 참혹한 유산을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이 어리석음의 윤리학적 비극은 결국 타자의 부재 에서 시작된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존재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그네이셔스와 트럼프의 세계에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확장된 자아, 즉 거대한 도덕적 혹은 정치적 환영만이 들어차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타인은 이용해야 할 수단이거나,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배경, 혹은 자신의 실패를 덮어씌울 억울한 희생양에 불과하다. 이란과의 분쟁에서 피 흘린 무고한 민간인들과 군인들, 경제적 파탄 속에서 생계를 위협받은 수많은 세계 시민들의 눈물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다. 타인의 통증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감각,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이 도덕적 악으로 변질되는 결정적 기점이다.
자기성찰이 결여된 권력은 언제나 스스로를 우상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고 경고했으나, 트럼프나 이그네이셔스 같은 인물들은 자신이 싸우는 대상보다 먼저 괴물이 되었음을 깨닫지 못한다. 아니,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의 수호자라 믿기에 자신이 행하는 모든 파괴적 기행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세계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도 이란에게 절절매며 평화를 구걸하는 굴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외교적 전략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이 지지른 불에 자신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의 유치함에 다름 아니다. 오만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이 당혹스러운 촌극은, 성찰하지 않는 자가 잡은 권력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국 존 케네디 툴의 소설과 오늘날의 트럼피즘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무거운 과제는 인간 이성에 대한 재검토다. 한 사회가 유치한 선동과 자기중심적 오만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소크라테스적 성찰과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공감의 이성이 필수적이다. 진정한 지혜는 거창한 구호나 과장된 자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스템과 타인을 존중하는 겸손함에서 발원한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 고 믿는 자들이 권력을 잡을 때,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그들의 호언장담은 언제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열쇠가 되었다. 바보들의 동맹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는 역설적이게도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 인간의 정직한 이성뿐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희극으로 한 번, 그리고 비극으로 또 한 번. 이그네이셔스의 핫도그 수레가 뉴올리언스의 작은 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면, 트럼프의 무모한 외교와 정치적 폭주는 온 지구를 비극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어리석음을 직시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항하지 않는 무지는 결국 어리석음의 지배를 받게 되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대중은 결국 자신이 만든 바보들의 왕 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만과 무지의 잔치가 끝난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금 인간다운 지혜와 성찰이 무엇인지를 깊이 물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들의 광기 어린 춤판을 멈추게 할 힘은 오직 자기 성찰에 뿌리를 둔 깨어있는 시민들의 이성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