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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박정희의 마지막 가을, 왜 온건 타협책은 거부됐나

박정희의 마지막 가을, 왜 온건 타협책은 거부됐나
[뉴스]
‘혁명가 박정희’가 말하지 않는 1979년 지난 10월 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혁명가 박정희’라는 이름의 포럼이 열렸다. 발표자로 나선 이영훈 새역사국민운동 공동대표는 박정희의 18년을 ‘문명 건설’의 과정으로 평가하며, 그를 독재자가 아닌 혁명가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18년 가운데 마지막 가을에 대해 묻고 싶다. 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성노동자 농성의 강제 해산에서 10월 16일 부산대 교정에서 터져 나온 함성까지, 66일이 흘렀다. 그리고 열흘 뒤 박정희는 측근의 총탄에 쓰러졌다. 한 지도자를 평가하려면, 그가 위기 앞에서 무엇을 선택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나는 그해 10월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으로 시위 대열에 있었다. 그리고 지난 47년 동안 한 가지 의문을 놓지 못했다. 정권에게는 정말 다른 길이 없었을까? 다른 길은 있었다. 노동자의 생존 요구를 해결하고, 야당과 대화하고, 거리로 나온 시민의 목소리를 듣는 길이었다. 그러나 정권은 갈림길마다 배제와 강압을 택했다. 왜 그랬을까. 첫 번째 갈림길: YH 사건 1979년 8월, 회사의 일방적 폐업으로 갈 곳을 잃은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야당인 신민당 당사였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일자리와 생계의 보장이었다. 해법은 여럿 있었다. 사업주에게 책임을 묻고, 노동 당국이 중재에 나서고, 야당과 함께 수습 방안을 찾을 수 있었다. 적어도 노동자들을 당사 밖으로 끌어내기 전에 그들의 말을 들을 수는 있었다. 정권은 강제 해산을 택했다. 8월 11일 새벽 대규모 경찰력이 신민당 당사에 투입되었다. 스물한 살 김경숙이 그 새벽에 숨졌다. 노동자들뿐 아니라 야당 의원과 기자들도 경찰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정권은 노동자들이 왜 야당 당사까지 찾아갔는지 묻는 대신 배후를 찾았다. 도시산업선교회 등을 겨냥한 수사가 이어졌다. 생존의 요구는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취급되었다. 임금과 일자리 문제를 정권의 존립 문제로 키운 것은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정권 자신이었다. 두 번째 갈림길: 김영삼 제명 YH 사건 이후 정권의 칼끝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향했다. 9월 8일 법원은 그의 총재 직무를 정지시키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이어 미국의 압력을 촉구한 뉴욕타임스 회견이 문제가 되자, 정권은 그를 국회에서 쫓아내는 수순으로 나아갔다. 여기서도 다른 선택은 가능했다. 회견 내용을 정치적으로 비판하고 논쟁할 수 있었다. 야당 총재의 주장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면 국민 앞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의원직을 박탈해야만 대응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10월 4일 여당은 야당 의원들을 배제한 채 제명을 강행했다. 미국은 주한대사의 본국 소환으로 항의했고,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이 사퇴서를 제출했다. 국회는 갈등을 조정하는 자리를 잃어갔다. 야당 총재를 국회에서 밀어내자 야당 의원들이 집단 사퇴로 맞섰다. 정권이 제도 정치의 출구를 스스로 좁힌 것이다. 사흘 뒤 부산이 움직였다.   광복동의 청년학생들_고 정성길 화백, 2020년 作 세 번째 갈림길: 부마항쟁 10월 16일 부산대에서 시작된 시위는 그날 저녁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도심으로 번졌다. 거리에는 학생들과 함께 공장과 상점에서 일하던 근로청년들이 있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분노와 고단한 생계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정권이 먼저 물었어야 할 것은 분명했다. 왜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가. 왜 시위가 대학 담장을 넘어 도시 전체로 번지는가. 그러나 정권은 다시 배후를 물었다. 정부 안에서도 다른 판단은 나왔다. 10월 17일 밤 임시국무회의에서 김치열 법무부 장관은 부산의 시위를 김영삼 제명의 후유증이자 시민 감정의 폭발로 파악하며 계엄 선포에 반대했다. 군을 동원하기 전에 정치적 원인을 살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와대에서는 이미 계엄을 향한 결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인 17일 밤부터 군 병력이 부산에 투입되고 있었다. 계엄 선포의 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군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10월 18일 0시 부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20일 정오에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이 내려졌다. 시민의 불만에 대한 정권의 답은 군대였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도 처음부터 온건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8일 아침 부산의 계엄관계관 회의에서 강경한 진압 방침을 전달했다. 그러나 현장을 돌아본 뒤에는 사태를 보는 판단이 달라졌다. 학생들만의 시위로 설명할 수 없는 시민들의 광범한 호응을 확인한 것이다. 김재규의 사후 진술에는 부산의 사태를 ‘민란’으로 파악하고 수습을 건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진술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맥락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그렇더라도 정권 내부에서조차 강경 진압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는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강경책을 실행한 전두환과 보안사 강경 노선은 대통령의 말에 머물지 않았다. 이를 실행할 병력과 정보·수사기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있었다. 10월 18일 부산을 찾은 전두환은 초기 진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강력한 수단의 사용과 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차량 시위를 주문했다. 같은 날 박정희도 조직적인 배후를 규명하라고 지시하고 초동 작전을 독려했다. 대통령의 강경 방침은 현장의 군사작전과 수사로 이어졌다. 부산에는 여러 공수특전여단이 투입되었다. 당시 여단장이었던 박희도·최세창·장기오는 두 달 뒤 12·12 군사반란에도 가담했다. 부마항쟁 진압에 동원된 군 지휘관들이 신군부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도 다시 등장한 것이다. 수사에서도 권한의 집중이 이루어졌다. 부산에는 권정달을 단장으로 하는 합동수사단이 설치되었다. 군과 검찰, 경찰, 중앙정보부의 정보·수사 기능을 결합한 기구였다. 시민들이 왜 항쟁에 나섰는지를 밝히기보다, 항쟁을 조종한 조직이 있다는 전제 아래 배후를 찾는 수사가 진행되었다. 남민전, 양서협동조합, 재야인사들이 배후로 지목되었다. 수사관들은 총책과 자금책, 선동책을 설정한 조직도를 만들고 연행자들을 그 안에 끼워 맞추려 했다. 그 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되었다. 나 역시 동래경찰서에서 물고문을 당하다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수사관들은 월남한 내 아버지를 고정간첩으로 몰아 시위의 배후로 만들려 했다. 내가 왜 선언문을 읽고 시위에 나섰는지를 듣기보다, 누가 나를 시켰는지를 자백하라고 했다. 내가 겪은 수사는 정권이 부마항쟁을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시민들이 스스로 유신체제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으니, 그들을 움직인 보이지 않는 지휘자를 만들어야 했다. 그 수사는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으로 중대한 전환을 맞았다. 그러나 정보와 수사 권한을 집중시키는 방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26 직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사람은 전두환이었다. 박정희의 강경책을 실행하던 인물과 조직은 정권의 붕괴 뒤에도 남아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갔다.   계엄군의 시민 연행_고 정성길 화백이 부마항쟁 현장에서 목격한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것임_2020년 作 왜 온건책은 거부되었나 나는 이 과정을 박정희 한 사람의 성격만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한다. 동시에 왜 그 선택을 바로잡을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는지도 보아야 한다. 첫째, 유신체제에서는 대통령의 권위와 체제의 존립이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었다. 노동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야당과 타협하는 일이 통치의 조정이 아니라 권력의 후퇴로 여겨졌다. 작은 양보로 더 큰 위기를 막는 정치가 설 자리는 좁았다. 불만의 원인을 해결하는 대신 불만을 드러낸 사람을 제거하려 했다. YH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냈지만 노동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김영삼을 국회에서 쫓아냈지만 야당 지지자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정권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한 것이 아니라 다음 위기로 넘기고 있었다. 둘째,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판단이 측근들의 권력 경쟁에 휘둘렸다. 현장의 민심을 전하는 보고도 정책의 근거로 검토되기보다 보고자의 충성심을 재는 잣대가 되었다. 강경론은 결단으로, 온건론은 나약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확하게 보고하는 사람보다 대통령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유리해진다. 셋째, 강경책은 곧바로 집행되었지만 온건책은 논의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계엄에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어도 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수습을 건의해도 배후 수사는 계속되었다. 국무회의와 정보기관의 판단이 대통령의 결정을 수정할 수 없다면, 그것들은 통치의 안전장치가 되기 어렵다. 권위주의 정권도 존속하려면 민심을 살피고 정책을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1979년 가을의 유신정권은 잇따른 경고를 적대행위로 받아들였다. 노동자의 농성, 야당의 항의, 시민의 시위가 모두 진압과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마다 정권은 당장의 위기를 눌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압은 불만을 없애지 못했고, 다음 충돌의 규모만 키웠다. 유신체제는 그렇게 스스로를 교정할 능력을 잃어갔다. 10월 26일 궁정동의 총성은 박정희의 통치를 끝냈다. 그러나 강경 진압의 인적·조직적 기반까지 끝내지는 못했다. 부산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와 정보·수사기구의 인물들은 이후 신군부의 권력 장악 과정에 다시 등장했다. 이 연속성은 이듬해 광주를 이해할 때도 살펴야 할 중요한 문제다. 재평가는 마지막 가을을 통과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혁명가’로 부르려는 이들은 마지막 가을의 선택에도 답해야 한다. 생존을 요구한 노동자들에게 왜 경찰을 보냈는가. 야당 총재의 비판에 왜 의원직 박탈로 대응했는가. 거리로 나온 시민들에게 왜 군대를 투입했는가. 다른 길이 있었는데도, 왜 대화와 조정보다 배제와 강압을 거듭 선택했는가. ‘문명 건설’이라는 평가는 그 문명 안에서 시민이 어떤 존재였는지까지 물어야 한다. 시민은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권력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었는가. 국가는 그 목소리를 들었는가. 아니면 고문실에서 배후를 자백하라고 강요했는가. 그 질문 앞에 부산과 마산의 거리에 섰던 청년들이 있다. 고문과 구금의 기억을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 박정희를 자유롭게 평가할 수 있는 자리에도 그들의 항쟁이 놓여 있다.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진정한 평가가 되려면, 18년의 성과와 함께 마지막 가을의 선택을 마주해야 한다. 그때 가능했던 다른 길이 왜 끝내 거부되었는지 물어야 한다.정광민 시민기자 vieth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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