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글은 감옥보다 힘이 세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피아노 소리 속에서 자란 아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1890~1960)는 모스크바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Leonid Pasternak, 1862~1945)는 위대한 작가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의 소설에 삽화를 그려 넣던 화가였고, 어머니 로자 카우프만은 이름난 피아노 연주자였다. 집안에는 늘 음악가와 화가들이 드나들었고, 작곡가 알렉산데르 스크랴빈(Alexander Scriabin, 1872~1915)은 어린 파스테르나크에게 직접 화성학(Harmonics)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때는 작곡가를, 한때는 철학자를 꿈꾸던 이 다재다능한 청년은 결국 붓도 건반도 아닌 펜을 쥐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시로 등단한 것은 1913년 무렵이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낸 러시아는 혁명의 소용돌이 한복판이었다. 1917년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 체제 아래 그는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지만, 동시에 숨죽이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절친했던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Marina Tsvetaeva, 1892~1941)는 오랜 망명생활 끝에 조국에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다른 벗 오시프 만델시탐(Osip Mandelstam, 1891~1938)은 독재자 요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을 풍자하는 시 한 편을 썼다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 1889~1966)의 아들 역시 같은 이유로 수용소를 드나들어야 했다. 그 살벌한 시절, 스탈린이 만델시탐의 처분을 두고 파스테르나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파스테르나크가 우물쭈물하며 명확한 답을 피하자 전화는 끊겼고, 그 뒤로도 그는 목숨을 부지했다. 스탈린의 자비가 아니라 계산이 낳은 결과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시인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체제의 얼굴마담으로 세워두는 편이 선전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뿐이다.
1959년의 파스테르나크(위키피디아)
닥터 지바고, 국경을 넘은 원고
파스테르나크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은 소설 「닥터 지바고」였다. 혁명과 내전이라는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개인의 삶과 사랑을 역사의 거대한 흐름 위에 그려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문학지 「노비 미르」는 이 원고의 게재를 거부했다. 혁명을 찬양하지 않고, 체제의 폭력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는 이유였다.
원고는 은밀히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출판업자 잔지아코모 펠트리넬리(Giangiacomo Feltrinelli, 1926~1972)의 손에 들어갔고, 1957년 조국이 아닌 밀라노에서 먼저 세상에 나왔다. 소련 안에서는 금서였지만 서방세계는 열광했다. 이듬해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축하가 아니라 재앙의 시작이었다. 소비에트 당국은 그를 조국을 팔아넘긴 반역자로 몰아세웠고, 작가동맹은 그를 제명했으며, 신문에는 그를 규탄하는 성난 논평이 줄을 이었다. 정작 그 논평을 쓴 이들 중 상당수는 소설을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국외 추방설까지 나돌자 결국 그는 노벨상을 거절해야 했다. 스톡홀름행 대신 조국에 남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를 지지하던 연인 올가 이빈스카야(Olga Ivinskaya, 1912~1995)는 그 대가를 대신 치렀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것이다.
시인은 끝내 자유를 만끽하지 못한 채 1960년, 모스크바 근교 작은 별장에서 눈을 감았다. 당국은 부고조차 신문에 제대로 싣지 않았지만,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금지된 시를 목소리 높여 낭송했다. 5년 뒤 영국 감독 데이비드 린(David Lean, 1908~1991)이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기도 했지만, 정작 원작자는 그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보리스(왼쪽)와 그의 동생 알렉스; 아버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가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침묵을 강요당한 목소리의 힘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 이야기다. 소련이 무너진 뒤인 1988년에야 「닥터 지바고」는 비로소 러시아 땅에서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파스테르나크의 아들은 이듬해 스톡홀름 시상식장에 올라 아버지를 대신해 메달을 받았다. 상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진실을 빼앗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체제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권력이 문학을, 그것도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 했던 서정시인 한 명을 그토록 겁내던 이유는 간단하다. 총칼로는 사람의 몸을 가둘 수 있어도, 종이에 적힌 이야기는 국경도 검열의 벽도 넘어가기 때문이다.
아내 예브게니야 루리예, 아들 예브게니와 함께한 파스테르나크(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물음
파스테르나크의 생애는 오늘의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불편한 진실을 말한 이를 반국가세력으로 몰아세우던 논리는,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언론과 국회를 힘으로 틀어막으려 했던 시도와 여러 모로 겹쳐 보인다. 독재 권력은 언제나 자신에게 불리한 목소리를 국가안보나 체제수호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억누르려 한다. 그러나 파스테르나크의 시와 소설이 결국 국경을 넘어 살아남았듯, 진실을 기록하려는 노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힘을 얻게 마련이다.
한국사회가 이 시인의 생애에서 새겨야 할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한 사람의 용기 있는 기록이 훗날 역사를 증언하는 자료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계엄의 밤을 기록한 시민들의 사진 한 장, 증언 한 마디가 훗날 법정에서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 둘째, 그 기록을 끝내 지켜낸 힘은 권력이 아니라 끝까지 읽고 알리기를 포기하지 않은 평범한 독자와 시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에서 윤석열의 내란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이들 역시, 당장은 외면당하거나 공격받을지 몰라도 언젠가 역사의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1924년의 작가 릴리야 브리크(왼쪽부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두 여성 건너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등 (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