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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52)] 류영모와 함석헌, 전라도 순례기(Ⅱ)

[다석의 한글철학 (52)] 류영모와 함석헌, 전라도 순례기(Ⅱ)
[칼럼]
정말 소식은 내 혼이 이형 혼을 보고 하는 것입니다. 이준묵이는 참이준묵이 아니요, 함석헌은 참함석헌이 아닙니다. 혼만이 참이지. 우리가 각각 제 혼의 소리를 듣게 돼서만 남의 혼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_ 『함석헌 전집(18) 진실을 찾는 벗들에게』(한길사, 1989), 85쪽에서.   그림1) 맨 왼쪽에 이현필이 있고, 맨 오른쪽에 이준묵이 있다. 다석과 신천에게 이현필과 이준묵은 남다른 사람이었다. 순례기에서 만난 인연이었고, 그 인연은 그들의 삶에 큰 자취를 남겼다. 1936년경 어비슨 농업학교를 배경으로 찍은 것이다. 이야기 한 토막 위에 인용한 글은 신천 함석헌이 1962년 8월 20일 뉴욕에서 한국으로 보낸 편지다. 해암 이준묵(1911~2000) 목사가 받았다. 편지가 실린 『함석헌 전집(18)』은 편지글 모음집이다. 해암에게 보낸 편지는 안병무 다음으로 많다. 그만큼 함석헌에게 해암은 아주 두터운 사람이었다. 여기서 ‘두텁다’의 뜻은 누구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요, ‘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할 친구’라는 이야기다. 1970년 10월 19일 해암에게 쓴 편지 대목이다(97쪽). 깊은 밤에 잠도 아니 오고 해서 전전반측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칠십이 돼서 죽을 날이 머지 않은데 아무 데도 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할 친구가 없구나. 내가 잘못돼서 그리 됐다 하겠지. 허지만 내 잘못만일까? 잘못한 사람은 말도 못하고 죽어야 하나? 잘못이 있는 사람일수록 할 말이 있지 않을까? 그 말이 그 한 사람만의 말일까? 전체의 아픈 말 아닐까? 1971년 혹은 72년 5월 9일 해암에게 쓴 편지엔 이런 대목도 있다(98쪽). 내 가슴에서는 지금까지도 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때문에 아마 그러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을 안 것도 많습니다. 씨ᄋᆞᆯ의 전체 속에 나를 발견하게 된 것도 탄탄대로식으로만 나갔다면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씨ᄋᆞᆯ의 소리』는 나의 속죄과정의 하나로 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속내를 꺼낼 만큼 가까웠던 해암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는 1945년부터 1981년 은퇴할 때까지 온통 땅끝 해남에서 목회를 한 목회자다. 게다가 이현필과도 절친했던 사람이다. 해암과 이현필은 강순명이 조직한 ‘독신전도단’에서 1936년에 만났다. 해암은 이미 전도단 활동을 6년째 한 상태였고, 이현필은 이제 막 시작한 순간이었다. 『맨발의 성자』(선경도서, 1978)에 수록된 이현필 약력에 1936(24세)”는 이렇게 쓰여 있다. 전남 광주에서 강순명 목사가 지도하는 ‘독신전도단’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또는 기독교청년회 간사 ‘에비슨’(G.W.Avison)씨가 창설한 농촌 강습소에도 드나들며 잠시 기독교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얼마 후 그만둔다. 이때 얻은 경험은 뒷날 이 선생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라고. 아마도 1936년 그해였을 것이다. 해암과 이현필이 광주 YMCA 농업실습학교(일명 어비슨 농업학교)를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박은 해는. 어비슨 농업학교는 1933년 피폐해진 호남 농촌을 구하고 자립형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되었다. 농촌 계몽운동을 위한 농업학교였다. 선교사 고든 에비슨(Gordon W. Avison, 한국명 어비신)이 세웠다. 그는 ‘에비슨’보다는 ‘어비신’으로 불렸다. 최흥종 목사, 최영균 등과 협력해 백운동(수피아 여학교 앞) 자택과 농장 부지에 2년제로 세웠다. 어비신은 사재는 물론 자녀 교육비까지 전부 털어 넣었다. 어비신이 교장, 정인세가 사감, 그리고 독신전도단을 이끌던 강순명이 강사였다. 그는 최흥종의 사위였고, 1938년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무렵이었다. 강순명은 이준묵, 이현필, 문남칠, 고영로 등 20여 명의 청년들과 농업학교 빈 창고를 숙소로 쓰면서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낮에는 노동하면서 신앙을 단련했다. 전도단을 위해서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 후에도 이현필은 제자 김준호와 함께 농업학교 강당 한쪽을 빌어서 생활하기도 했다. 한겨레 조현 기자는 오랫동안 발로 누벼서 『울림-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시작, 2008)을 펴냈다. 『울림』에는 류영모, 김교신을 비롯해 등 총 24인의 ‘예수’가 수록돼 있다. 그 가운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이세종, 손임순, 이현필, 최흥종, 강순명이다. ‘이세종-이현필’과 한꼴로 묶이는 영성가들이기 때문이다. 이 순례기가 다석과 신천에게 눈길을 주는 까닭으로 그렇게 묶어서 볼 뿐, 사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오롯한 이 땅의 예수였다. 조현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이세종(李世鐘, 1879~1942), 모든 걸 나누고 비운 도암의 성자 손임순(1893~1963), 아홉 자식 가슴에 묻은 구도자 수레기어머니 이현필(李鉉弼, 1913~1964), 걸인과 고아를 섬긴 맨발의 성자 최흥종(崔興宗, 1880~1966), 무등산으로 떠난 나환우의 아버지 강순명(姜順明, 1898~1959), 눈앞의 한 사람이 귀했던 성자 (※ 손임순은 이세종의 제자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개천산 근방의 ‘수락기’ 마을에서 시집을 왔기에 ‘수락기댁’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소리가 나는 대로 ‘수레기댁’이 되면서 ‘수레기어머니’가 되었다. 동광원 사람들에게 그는 ‘신앙의 어머니’다.) 이 책에 등장하진 않으나, 앞서 살핀 해암도 그 못지않은 참 일꾼이다. 해암은 1929년부터 1935년까지 6년 동안 전도단에서 신앙 훈련과 농촌 재건 운동에 헌신했다. 전도단이 해체된 뒤에는 전북 김제군 임상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유학 중에 수레를 끌고 농촌을 누비는 ‘구르마 전도’를 하기도 했다. 고베신학교 교장 사와무라 고로(澤村五郞, 1887~1977) 목사 추천으로 중국 산둥성 덕현 선교사로 파견가서 활동했다. 1939년 5월부터 1942년까지. 파견을 준비하던 1939년에 김수덕과 결혼했다. 둘은 영혼의 동지였다. 1943년 4월에 귀국한 뒤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5년 4월에는 해남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고, 이후 해남 사역에 충실했다. 1947년 근대식 유아 교육 기관인 ‘해남유치원’을 개원했다. 그 뒤로 해남 YMCA를 창설하고 농촌 지도자 양성을 위한 ‘삼애농민복음학원’도 설립했다. 1953년 3월 6일, 이현필의 요청으로 광주 남구 방림동의 전쟁고아 36명을 인도받아 사회복지법인 ‘해남등대원’을 열었다. 그는 삼애농민복음학원 강사로 신천 함석헌, 유달영, 고황경을 초청했다. 특히 신천은 이준묵의 농촌 계몽 사역에 깊이 공감했고, 땅끝 해남까지 내려가서 농민과 청년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었다. 신천 제자 중에 이세진ㆍ조성심 목사 부부가 있다. 6ㆍ25전쟁 중 전남 해남으로 피난하여 옥천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때, 아니 그 전 황해도 창린도에서 목회할 때도 늘 사랑의 편지를 보냈던 제자들이다. 신천이 해암의 초대로 해남읍에서 강연을 맡아 가는 중에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 신천은 문득 조성심이 옥천중앙교회에 있다는 생각이 나서 이들 제자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고 덕담을 나눴다. 뒷날 한국의 그룬트비로 불린 해암 이준묵의 스승은 최흥종, 강순명이고, 길벗으로 지낸 이는 이현필이요, 경외한 이들은 무교회주의를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빈민굴의 성자로 불린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그리고 신천 함석헌이었다. 그렇다면 신천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나는 그들이 1947년 순례길에서 만났다고 확신한다. 이현필이 이어준 인연으로 말이다. 해암은 1992년에 팔순 기념 문집으로 『참의 사람은 말한다』(대한기독교서회)를 남겼다.   그림2) 이준묵 목사와 부인 김수덕 사모다. 사진은 『참의 사람은 말한다』(대한기독교서회, 1992)에 수록되어 있다. 그림3) 왼쪽부터 조성심, 함석헌, 이세진이다. 삼열신학교(사무엘신학교) 학생이던 조성심은 신천이 무척 아꼈다. YMCA 강연 중에 조성심을 가리키며 그대로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사진은 해남에 있는 옥천중앙교회에서 하룻밤 묵어갈 때 남긴 것이다. 교회 현 소재지는 전남 해남군 옥천면 해남로 396-9(영춘리 853-1)이다. 첫 소재지는 영춘리 527-3이었다. 1050년 4월에 개척되었다. 1대 교역자가 이세진이다. 그러니 사진은 1950년대 초반일 터이다.   만남, 이어이어 예 숨 길(예수로 숨쉬는 길) 나는 다석과 신천이 순례길에서 만났을 법한 수많은 사람의 기록을 모았다. 그 사람들과 관련된 작은 흔적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다. 여행이라고 했으나, 영성 순례일 수밖에 없었던 그날들을 이어서 붙였다. 이곳저곳에 한 줄 두 줄로 남은 자취로 순례기를 돋을새김했다. 사실과 사실 사이를 잇지 못하는 빈틈은 관련 자료로 바느질하듯 이어 붙였다. 물론 이어 붙일 때는 충분히 개연성을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했다. 그러므로 근거가 있다. 자료는 다석과 신천의 연대기(年譜), 회고, 전기(傳記), 평전, 일지, 시집, 전집 등이다. 이 부분에 대한 제자들의 기록이 적지 않다. 그 기록 가운데 가장 먼저 당사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 번째는 임락경이 쓴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홍성사, 2014), 엄두섭이 쓴 『맨발의 성자-한국의 聖․후란시스 이현필 傳』(선경도서, 1978), 『호세아를 닮은 성자』(은성, 1981), 이현필 일기가 있다. 다석 제자 김홍호, 박영호, 송기득이 기록한 책들은 훌륭하다. 그 외 서울 YMCA와 광주 YMCA 기록물, 또 최흥종ㆍ이세종ㆍ정인세 기록과 여러 사진으로 순례길을 구성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23살 무렵 이현필이 서울로 올라가 YMCA 야간부 영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바로 그 무렵에 그가 다석 강연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다석은 1928년부터 YMCA 현동완 간사의 요청으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지도하고 있었다. 임락경은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에서 이현필이 23세에 서울 YMCA 야간부 영어 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하면서 김현봉 목사가 시무하는 야현교회에 출석하다가 YMCA 총무 현동완과 원경선 선생을 알게 된다.”라고 밝혔고,1) 이상국은 『저녁의 참사람-다석 류영모 평전』에서 이현필은 서울로 갔다. YMCA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야간부 영어반 공부를 했다. 이 영어반에서 나중에 풀무원을 설립하는 원경선을 만났다. 또 YMCA에서 현동완과 류영모를 만났다. 1936년에서 1938년까지 2년여 간 20대 이현필은 40대의 류영모를 만나 영적인 감화를 받았다.”라고 썼다.2) 1946년 다석은 현동완과 함께 전남 광주로 가서 이현필을 만났다. 이현필에겐 10년 만의 재회였을 터. 다석은 이현필로부터 ‘이세종 영성’을 전해 들었다. 오방 최흥종 목사도 만났다. 그뿐이었을까? 이세종, 강순명, 이준묵, 정인세, 어비신(선교사), 유화례(선교사)…. 그곳에 그가 찾았던, 참되고 거룩한 ‘속알’이 계셨다. 호남은 영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속알 얼빛이었고 씨ᄋᆞᆯ이었다. 그래서 다석은 신천에게 곧장 광주로 가자고 했다. 어두컴컴한 신천의 마음에 그 ‘빛’을 주고 싶었다. 신천에게 월남한 ‘지금(1947년)’ 필요한 것은 바로 얼빛, 다시 새 삶을 일으켜 살아갈 얼의 숨빛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1946년에 이어놓은 얼빛 인연이 있었으므로. 광주 YMCA와 양림동ㆍ방림동은 ‘서울-호남’이 교차한 거점이었고, 화순의 화학산ㆍ천태산 일대는 ‘이세종-이현필’의 비움과 수도가 기억된 곳이었다. 남원의 서리내[본디 이름은 ‘선인래(仙人來)’로 신선이 온다는 산골짜기다]와 갈보리(본디 이름은 ‘갈촌’)는 이현필의 수행이 공동생활로 번져 가던 장소였고, 곡성 원달은 같은 영성 지형 안에 놓인 지점이었다. 다석과 신천은 이 장소들을 걸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어떤 곳은 갔을 테고, 어떤 곳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상국이 23년 연하의 이현필을 만난 일은, 다석의 정신세계를 더욱 깊고 오롯하게 돋운 계기였다.”3)고 했듯이 다석 또한 신천에게도 그 영적인 ‘맛’을 한껏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전주 동광원 본원, 진도와 계명산의 분원, 6·25전쟁 때 피난처가 된 화학산 암굴 등은 1947년 이후라서 동선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아직 ‘동광원’이라는 이름도 얻기 전이다. 두 사람은 ‘동광원’을 낳게 될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을 보았고, 그들을 통해 이어진 이세종의 영성과 이현필의 ‘맨발’을 목도했다. 사실 이들의 만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뒤로도 1971년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으니까 말이다. 1971년 9월, 박영호는 스승 류영모를 따라 계명산 들머리에 있는 벽제 웃골의 속칭 ‘수녀촌(修女村)’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곳은 동광원 분원이다.4) 스승 류영모를 따라 그곳에 갔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한나 할머니의 지도 아래 30여 명의 수녀들이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손으로 돌산을 일구어 높은 데는 밭을 만들고 낮은 데는 논을 만들었다. 밭농사와 논농사를 손수 지어서 자급자족하였으며, 디딜방아를 사용하였다. 계명산에서 나는 산나물 딸기 도토리 머루 다래 버섯도 좋은 먹거리였다. 수녀들은 류영모를 진달래 할아버지라 불렀다. 류영모가 지은 시 ‘진달래’를 이현필이 좋아하여 진달래 강의만 2~3년에 한 번씩 청하여 무려 5번이나 하였다.5) 쉰일곱 류영모와 마흔여섯 함석헌. 이미 ‘제소리’를 가진 그들에게 그곳은 하늘이 ‘바닥’이라는 현실을, 그 낮은 밑자리에 이미 ‘모신 하ᄂᆞᆯ님이 계시다’는 것을, 바로 그것이 얼이요, 알이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두 사람은 식민지와 감옥, 가족의 고통과 분단, 내적 수행과 공적 책임을 통과한 성숙한 사상가였다. 그렇지만 이세종의 ‘비움(空)’ 정신이 이현필의 맨발과 노동으로 이어지고, 최흥종의 사회적 구제와 정인세의 조직적 돌봄이 그 수행을 지역사회와 잇는 모습은 환한 얼빛 그 자체였다. 다석과 신천은 형언할 수 없는 영적 감흥을 맛보았으리라. 순례는 뒷날 류영모에겐 ‘씨ᄋᆞᆯ어뵘(親民)’으로, 함석헌에겐 ‘씨ᄋᆞᆯ사상’로 솟았다. 물론 전라도 순례가 ‘씨알사상’을 일으킨 단 하나의 기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석과 신천이 서로의 사상을 고난받는 이들의 몸으로부터 있는 그대로 접속하고, 또 서로가 나아갈 길을 확인한 ‘체험적 모태’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4) 왼쪽부터 엄두섭 목사, 다석 류영모, 정인세 원장이다. 1971년 광주 동광원 여름 수양회를 마치고 박은 사진다. 엄두섭은 이세종과 이현필의 전기를 남겼다. 특히 이현필과 관련된 거의 모든 기록을 정리했다. 정인세 원장은 이현필의 동역자였고, 귀일원과 동광원 원장을 지냈다. 빈칸을 읽는 방법 순례는 두 사람 생애에서 아주 짧은 문장으로 남아 있다. 월남한 함석헌이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스승 류영모와 광주 등지로 ‘한 달 동안 여행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6) 이 말을 ‘씨ᄋᆞᆯ’로 이으려면 경계할 것이 둘 있다. 하나는 ‘한 달이 짧다’라는 이유로 순례를 단순 방문이나 여행으로 축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확인되지 않은 날짜와 만남을 사실처럼 채워 넣는 것일 테다. 축소하면 삶의 근거를 잃게 된다. 월남한 함석헌이 스승과 ‘한 달을 동행했다’라는 사건의 무게를 놓치게 된다. 그렇다고 없는 사실을 거짓말로 채우면 사상의 밑동이 송두리째 흔들릴 터다. 여기저기 남아 있는 기록으로 사실을 붙들어 밝히되, 당시 그곳 사람들의 관계와 장소를 연결하면서 빈틈을 살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여러 자료를 찾고 찾으니 말 한마디 한마디로 빈틈을 메울 수 있는 이야기가 작지 않았다. 다석은 1971년 광화문 모임(문정길 사무실)에서 1971년 2월 11일 이세종 님의 마나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씀 듣다. 듣건데 거듭거듭 많이도 거듭 나시어서 돌아가시었고나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가 『다석일지』에 남긴 읊이(詩)는 이렇다. 1971 2 11 李世鐘 님 ᄆᆞᄂᆞᆫ님 도ᄅᆞᄀᆞ심. ᄆᆞᆯ숨 듣는데: 거듭 거듭 ᄆᆞᆭ이도 거듭 ᄂᆞ시어서 도라가시엇고ᄂᆞ! 느껴지ᄃᆞ.   그림5) 1971년 3월 29일 다석일지. 위쪽 읊이가 원문이다. 입말로 읽으면, 이세종 님 마난님 도라가심. 말숨 듣는데: 거듭 거듭 많이도 거듭 나시어서 도라가시엇고나! 느껴지다.”로 읽힌다. 다석은 늘 하늘아(ㆍ)를 살려서 썼다. 그가 쓴 한글 읊이에서 하늘아는 돌고 도는 ‘숨’으로 풀이될 수 있다. 또 『다석일지』 1964년 3월 18일에는 이런 글이 남아 있다. 이현필 장례식에 다녀온 이야기다. 엄두섭은 이현필이 숨돌려 하늘로 돌아갈 때를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숨이 끊어지는 중에도 이현필에게 이상한 기쁨의 물결이 밀려왔단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돌아올 때마다 아이고 기뻐! 오 기뻐! 못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라도 나가서 전하고 싶어.”7) 이글이글 타는 태양이 서해에 지듯 그렇게 장엄한 이현필의 임종이 이뤄진 것은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 정각이었다. 이현필은 자신이 돌아갈 그 시간을 미리 예고 했었다.8) 예고한 그 시간에 그는 정확히 하늘로 돌아갔다. 51년 2개월의 일생이었으나, 성 프란체스코보다는 7년 더 산 삶이었다.9) 박영호는 『다석전기』에 다석이 쓴 글을 읽기 쉽게 풀어 썼다.10) 늙으신 능주 한나 주인이 말씀. 이 선생 현필언께서는 16일 중 괴로워하심을 나타내시다가 17일 중 돌아갈 뜻의 말씀과 하느님께 빎으로 빎으로 하시다 고요하며 잠잠한 속으로 아모 기침이나 담 끓는 일도 없다가 새벽에 끝. 직경 3만리 흙구슬(地球)에 높이 고이어 물로 뒤덮은 넓은 위로 쌓아 올린 김굿슬(大氣圈)과 밀김(呼)과 썰김(吸)으로 목숨 쉬 잔치를 그만 마치신가 임자(壬子, 1912)에 나서 갑진(甲辰, 1964)년에 마치다. 인제는 쓰지 않게 되어 두고 가신 몸은 흙 속에 돌려 묻었다. 두덩으로 올라 묻고, 넓은 흙 위에 떼풀만 보니 떼(잔디)는 살겠구나. 그러나 떼도 살고 죽어야 마치지, 이제 제도 예 마치면 제 가면 하는 것이다. 현필 이(李)언의 마치신 토와(土窩)는 고 현창주(玄滄柱)언이 짓고 일고 누시던 방이다. 나도 앞서 자 보던 방인데 이 저녁에도 예서 김(金)ㆍ김(金)ㆍ이(李)ㆍ류(柳)가 한 밤 쉬자고 눕다. 본디 다석이 쓴 손 글씨 원본은 아래와 같다.   그림6) 1964년 3월 18일 다석일지다. 위부터 그대로 읽어 보겠다(일부 맞춤법을 따르고 띄어 쓰기를 했으나, 원문 그대로를 풀었다), 다석이 쓴 손 글씨와 읊이는 이어쓰기 방식의 소리글자이고, 또 ‘뜻글’로 쓴 경우도 많아서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소리 내 읽는 글로 쓰겠다. 파주군 광탄으로, 에서 다시 고양군 통과 서울행 버스를 두 시간 기다려, 11시발 수영고개를 넘어 벽제에서 내려 됫박고개 밑ㆍ계명산 윗골(上谷)로 드니 곡성 김광석 집사도, 능곡 이(李)도, 몇몇 구면면 눈들이 보인다.11) 늙으신 능주 한나12) 주인이 나서시며 말씀: ‘이선생 현필언: 께서는 십육일 중: 괴로워 하심을 나타내시다. 십칠일 중: 도라갈 뜻: 말슴과 한웋님께: 빎으로, 빎으로, 하시다가, 고요하며 잠잠한 속으로, 아모 기침이나 담 끓는 일도 없다가, 새벽 곧 직경 삼만리 흙구슬13)에 높히 고이어-물로 뒤덮은 넓은 위도 매 한가지로-싸올린 김구슬과 밀김ㆍ썰김ㆍ으로14) 목숨 쉬이 잔치를 그만 마치신가’ 임자(1912) 생, 감진(1964) 졸. ‘이제는 쓰지 않게 되어 두고 가신 몸은 흙속에 돌려 묻었다.’ 두덩으로 올라 묻고 넓은 흙 위에 떼 풀만 보니: 떼는 잘 살겠구나! 그러나 떼도 살곤 죽어야 맟이지!15) 이도 제도 예 마치면: 졔 가면? 하는 이: 다 궁금. 이(李)언의 마지막 마치신 토와(土窩)는 고 현창주언16)의 짓고, 일고, 누시던 방이오, 나도 앞서 자보던 방인데, 이 저녁에도 예서 김ㆍ김ㆍ이ㆍ류가 한밤 쉬자고: 눕다.   그림7) 맨발의 성자로 불린 이현필이다. 그는 1913년 1월 28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용하리에서 태어났다. 1964년 3월 18일 경기도 고양시 벽제 동광원 분원 토담집에서 숨을 거뒀다. ‘한밤 쉬자고: 눕다.’라고 한 것은 벽제 계명산 오지에 자리 잡은 수녀 마을 기도실에서 이현필ㆍ류영모ㆍ현동완이 함께 지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석과 이현필의 만남에 오작교 구실을 한 사람은 창주 현동완이었다. 다석과 이현필 사이에는 늘 현동완 있었다. 그래서 다석은 ‘삼합참여현(三合參與玄)’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이렇다. 남강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에 태어났다. 이현필은 1964년 3월 18일에 하늘로 돌아갔다. 100년 차이가 있지만 태어나고 돌아간 것이 ‘64년’에 일어난 것이 같다. 이승훈은 3월에 났고, 이현필은 3월에 죽었다. 다석은 북에 이승훈, 남에 이현필이라 말하기도 했다.17) 『다석일지』 1972년 10월 23일 일지에 그런 이야기를 읊이로 써 놓았다.   그림8) 1972년 10월 23일 다석일지다. 오른족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한문으로 쓴 읊이를 소리 내 읽으면, 전후래서육십사/ 강승삼월이십오목/ 북이남이교류제/ 삼합참여현계명”이다. 풀면 앞뒤 오고 간 육십사요, 내리 오른 삼월에 이십오 나무라네. 북 이승훈 남 이현필을 류영모가 사귀었는데, 셋을 한데 아울러 인도해 밝힌 이는 현동완이네.”라는 뜻이다. 남강 이승훈, 이공 이현필을 공경하여18) 뒤따라 추모하는(敬追募) 뜻으로 쓴 읊이다. ‘廿’은 ‘스물’, 곧 이십(二十)을 말한다. 나무 목(木)은 열 십(十)에 사람 인(人)이 매달린 꼴이다. 그러므로 3월에 두 사람이 십자가(二十:廿)에 매달려 다 이루었다(五)는 뜻이다. 오(五)는 다섯으로 ‘다사리’인데 그것은 ‘다 말하게 하다’, ‘다 살리다’는 뜻이고, 또 하늘땅(二)에 ‘올(§)’로 이었다는 뜻도 있다. 서로 통하는 ‘교류(交流)’를 ‘교류(交柳)’로 써서 다석식 ‘말놀이’로 썼다. ‘계명(啓明)’은 벽제 계명산(雞鳴山)을 빗댄 말이다. 이 또한 말놀이다. 계명산은 본래 고령산(高嶺山 또는 高靈山)이라 불렸다. 이렇듯 다석의 뒷날 일지는 순례의 빈칸을 채우는 중요한 자취요 자국이다. 다석은 이세종을 ‘성자’라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다. 독신 수도 생활을 하는 동광원 사람들을 몹시 우러렀다. 한번은 다석이 이현필을 비롯한 동광원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물었다. 나도 이곳이 좋으니 와서 여러분과 함께해도 좋을까요?” 그러자 이현필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맞을 준비는 언제나 해놓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대환영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현필은 김준호ㆍ정인세ㆍ오북환 등 여러 제자들이 듣는 데서 류영모 선생님은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부처님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9) 1947년 광주와 전남에는 숨빛 삶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세종은 이미 1942년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깨끗하고 맑은 가난과 성서를 따른 삶은 이현필과 제자들에게 그대로 배어 있었다. 참으로 오롯했다. 이현필은 광주ㆍ화순ㆍ남원ㆍ곡성을 오가며 맨발로, 절식으로, 노동으로, 기도로 함께 사는 공동생활을 수행했다. 한 끼를 먹는 것조차 큰 축복이라 여겼다. 최흥종은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거쳐 한센병 환자와 빈민들 곁으로 스스로를 낮추었고, 정인세는 광주 YMCA와 구제 활동의 실무를 잇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20) 다석과 신천은 동광원 이전의 공동체, 교리 이전의 실천을 찾아간 셈이다. 임락경의 기록은 류영모ㆍ이현필ㆍ최흥종을 직접 만나 배운 제자라는 점에서 이 사람들 사이의 정서와 생활 감각까지 느끼게 한다. 엄두섭이 쓴 이현필 전기는 그의 생애와 제자 공동체, 그가 걸어 다닌 길들과 장소를 비교적 촘촘하게 남겼다. 장소가 가진 뜻도 확인할 수 있다. 광주 YMCA 자료는 최흥종과 정인세, 그리고 현동완을 통해 ‘서울-광주’가 이어지는 배경을 보충하고도 남는다.   그림9) 경기도 고양시 계명산 벽제 동광원 분원 토담집. 이현필이 마지막 숨을 거둔 방의 모습이다. 『맨발의 성자-한국의 聖․후란시스 이현필 전』 앞에 실린 이현필의 유거지 ‘화학산 일대’ 흑백사진은 본디 이세종의 유거지였다. 스승과 제자가 만나서 함께 한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흑백사진은 갈보리 옛집, 섬진강 지류의 여울, 남원 서리내와 갈보리, 화순 화학산의 도구박골과 천태산 일대, 곡성 원달 수도처, 무등산 삼밭골 부근 등이다. 다석은 ‘이현필과 이곳에 가 보았다’고 했다. 1946년이었을 터다. 그래서 신천에게도 이곳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유거지는 이세종과 이현필이 만난 곳이요, 그들이 거듭난 곳이요, 영성이 솟구친 곳이었다. 순례 전야의 두 사람 1947년, 다석은 쉰일곱이었다. 그는 오산학교의 교육 경험, 톨스토이와 동서 고전의 독서, 『성서조선』 사건에 따른 구금, 아버지와의 갈등과 자기 절제의 긴 시간을 지나왔다. 1928년부터 서울 YMCA 연경반을 맡아 성서와 유교ㆍ불교ㆍ노장사상을 우리말로 풀어내 강학을 이었다.21) 청중의 많고 적음에 흔들리지 않았고, 구기리와 종로 YMCA를 오가며 몸ㆍ맘ㆍ얼, 좀나와 큰나, 빈탕한데, 씨ᄋᆞᆯ과 같은 우리말로 된 뜻을 익혀 갔다. 해방 직후에는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는 그가 해방 공간의 혼란기에 공적 신뢰를 맡길 만한 인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류영모 사유에는 늘 말과 삶 사이 긴장이 있다. 그는 입으로 가르친 것을 몸으로 감당하려 했고, 먹는 일과 성(性), 소유와 명예를 줄이는 수행으로 자기 언어의 진실성을 시험했다. 류영모의 하루 한 끼는 1941년 2월 17일에 시작되었다.22) 그의 하루 한 끼는 이현필에게도 큰 깨우침이지 않았을까. 이현필도 하루 한 끼를 했다. 이현필은 자기 몸을 문장으로 만든 사람이다. 맨발로 걷고, 적게 먹고, 가진 것을 나누고, 병자와 버림받은 사람의 곁에서 노동한 생활은 류영모가 말로 파고들던 비움과 낮아짐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류영모는 광주를 ‘빛골’ 또는 ‘빛고을’이라 불렀고,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그가 본 빛은 낮은 사람에게 내려가는 이세종, 최흥종, 이현필, 정인세의 삶에서 나왔다. 서울 YMCA 연경반이 사상을 말로 나누는 자리였다면, 광주와 전남의 골짜기에는 말이 노동과 식사와 돌봄으로 되돌아오는 ‘낮은 자리’가 있었다. 이곳에서 류영모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던 다른 몸들의 진리를 보았을 것이다.   그림10) 신천 함석헌과 다석 류영모다. 1947년 신천이 월남한 뒤로 스승과 제자는 꼭 붙어 다녔다. 전라도 일대로 영성 순례를 다녀왔고, 이 순례에서 이어진 깨우침을 키워서 다석은 수도공동체를 지향했고, 신천은 노동공동체를 실행했다. 10여년 넘게 이어진 ‘사상동행’은 한국 현대철학의 높은 봉우리가 되었다. 함석헌은 마흔여섯이었다. 그 역시 스승을 따르는 젊은 제자가 아니었다. 3·1운동을 겪었고, 오산학교에서 류영모를 만났으며, 일본 유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성서 연구에 참여했다. 귀국 뒤에는 오산학교에서 10년 동안 역사 교사로 일하며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했다. 1934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약 2년에 걸쳐 22회를 썼다. 일제 말기에 여러 차례 구금되었고 북쪽 고향에서조차 자유를 얻지 못했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의거 뒤 체포되어 구타와 구금을 겪었는데, 1946년 말에 다시 체포되었다. 나라가 바뀌어도 사람을 억압하는 장치는 되풀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자기 몸으로 알았다. 결국 1947년 2월 26일 가족과 고향을 남겨 둔 채 북을 떠나 3월 17일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생존자이면서 이산자였고 역사가이면서 역사에 찢긴 사람이었다.23) 스승은 길을 먼저 알고 있었고 제자는 이미 자기 눈으로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내면에서 하늘로 솟는 길을 오래 닦았고, 다른 한 사람은 민족의 고난 속에서 뜻을 읽는 역사철학을 세웠다. 전라도의 한 달은 서로 다른 성숙이 같은 사람과 장소를 함께 본 시간이었다.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넘어』에는 「帝釋山 옛 기도터에서」라는 시가 있다(『전집(6)』265쪽). 제석산(帝釋山)은 모교인 오산학교의 운동가에 나온다. 3절을 보면 제석산 쌍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둥지 찾는 우리 건아 모두 식식타…”로 시작된다. 춘원 이광수가 지었다. 당국은 운동가를 불온하다며 새로 지으라 했다. 그래서 다석이 새로 지었다. 1. 저 하늘에 해와 달도 돌아다니며 이 땅 위에 무로가 바람 또한 뛰노니 천지 사이 목숨 불을 타고난 우리 열샌 힘에 번뜩이어 빛을 내이자 후렴 물이나 불이 모두라 우리의 놀거리 뛸터라 다무른 입 한번 열면 우뢰 울리고 내렷던 손 들게 되면 번개치리라 힘을 몹고 맘 다스려 이김 얻도록 2. 뫼란 데는 범만 뛰게 둘것 아니요 바다란덴 고래놈만 놀릴 것이랴 물과 뭍에 우리 운동 자유자재해 열샌 힘을 번뜩이어 빛을 내이자 3. 저 공중이 어찌하여 독수리 거면 이물 밑이 아무려믄 해조의 터랴 공중 날고 물밑 기기 또한 능하니 열샌 힘을 번뜩이어 빛을 내이자 또한 흥미롭게도 제석산은 광주 방림동에도 있는 산이다. 이현필과 인연이 깊다. 이현필의 기도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 등장하는 ‘제석산’은 오산일까? 광주일까? 광주라면 필시 1947년 순례길에서 둘러본 제석산이리라. 帝釋山 옛 기도터에서 지난날 눈물 뿌려 빌었던 바위 밑에 만지던 어린 솔이 낙락장송 다 됐구나 모른 새 들어주심이 이러한가 놀라네 모른 새 들으신 걸 못만 여겨 울었구나 어려한 아버진 줄 알면서도 안 믿었네 이슬에 젖은 줄기를 그 품인 듯 안노라 품인 듯 안고 나니 눈물이 새로와라 돌아보신 은총 속에 저렇듯이 자랐구나 저 가지 가리킨 대로 하늘 보고 나가자 - 미주) 1)임락경,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홍성사, 2014), 209쪽. 2)빈섬 이상국 지음, 박영호 공저 및 감수,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홍성사, 2014), 297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현필’에도 1934년부터 광주 신안동 재매교회 전도사로 2년간 사역하였고, 1936년 상경하여 서울기독교청년회(YMCA) 야간부 영어 학교에서 2년간 수업을 받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빈섬 이상국이 지은 평전, 286쪽. 4)이곳은 계명산 동광원, 또는 벽제 동광원이라 불렸다. 5)박영호가 지은 다석전기, 466쪽. 6)함석헌의 연표는 그가 1947년 2월 26일 평안북도 용천을 떠나 3월 17일 서울에 도착하고, 4월 초 류영모와 광주 등지를 약 한 달 동안 여행했다는 기록이다. 7)엄두섭, 『맨발의 성자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이현필전』(은성, 1992), 435쪽. 8)엄두섭이 쓴 이현필전, 436쪽 참조. 9)박영호가 쓴 다석전기, 473쪽 참조. 10)박영호가 쓴 다석전기, 473쪽 참조. 『다석일지』 원문 순서에 따라 문단 위아래를 바꾸었다. 11)‘구면면 눈들’이란, ‘익히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수녀들’이란 뜻이다. 남자는 ‘언’, 여자는 ‘눈’이라 불렀다. 12)여기서 ‘한나’는 ‘한나 할머니’를 말한다. 13)‘흙구슬’은 지구(地球)를 말한다. 14)‘김구슬’은 대기권, ‘밀김’은 호흡의 ‘호’, ‘썰김’은 호흡의 ‘흡’이다. 15)‘떼’는 잔디를 말한다. 16)‘고 현창주언’은 고(故) 창주 현동완 언님이란 뜻이다. YMCA 총무를 지낸 이다. 17)박영호가 쓴 『다석전기』, 451~452쪽 참조. 451쪽에 인용한 한문 읊이에 오타가 2개 있다. 다석 손글씨 원문과 비교해서 보기 바란다. 18)이세종은 ‘이공(李空)’이고, 이현필은 이세종을 이었기에 ‘이공(二空)’이다. 19)박영호가 쓴 『다석전기』, 451~452쪽 참조. 461~469쪽 참조. 20)‘동광원’이라는 명칭과 고아원 조직은 1950년 무렵에 성립되었다. 1949년 화순 청소골에서 제자들이 고아 여덟 명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21)류영모는 1928년 서울 YMCA 연경반을 맡기 시작해 1963년까지 약 35년 동안 강학을 이어 갔다. 다석학회 엮음, 『다석강의』, 현암사, 2006; 박영호, 『다석 유영모』, 두레, 2009 참조. 22)류영모의 일일일식 시작일은 1941년 2월 17일이다. 함석헌은 1947년 전라도 여행 뒤 하루 한 끼 생활을 시작했다. 23)함석헌은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의거 뒤 체포되었고, 1946년 말 오산학교 출신들의 반정부 전단 사건과 관련해 다시 구금되었다. 1947년 월남은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가족 이산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gjg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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