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성찰의 정직한 기록, 그리고 남은 질문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와 이어진 탄핵 정국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헌법이 무엇이며, 사법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됐다. 여기에 최근 청와대와 조희대 대법원장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법관 임명 절차를 둘러싼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사법 권력의 독립성과 민주적 정당성은 어느 때보다 격렬한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
김기영 전 헌법재판관의 『헌법을 생각하는 일』(사회평론, 2026년 5월)은 바로 이런 시기에 법관 스스로 사법부를 돌아보며 던지는 성찰의 기록이다. 저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충격적인 헌정 위기를 겪은 뒤, 22년간의 법관 생활과 6년간의 헌법재판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을 포함한 법관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되돌아보고 사법부의 자성을 촉구했다.
법관 인사권 틀어쥔 대법원장이 법원 독립을 위협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인상적인 문제의식은 법관을 평가하는 진정한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한 저자의 통렬한 질문이다. 앞으로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 후보자를 평가할 때 출신 연구회나 학벌, 고향, 종교, 재산 같은 표면적인 조건을 따지기보다 훨씬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사법농단 사태 때 당신은 어디에 서 있었는가. 권력의 압력 앞에서 법관의 독립을 지켰는가. 동조했는가. 침묵했는가”라는 질문이다.
과거 사법농단은 재판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훼손된 참담한 사건이었다. 권력이 사법을 압박하던 시기에 법관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그들의 가치관과 법관으로서의 양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평상시의 경력이나 말보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했는지가 한 인간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듯이, 법관 역시 헌법적 위기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가 그가 말하는 ‘사법부 독립’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험대가 된다.
저자는 법원의 독립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로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법관 인사권을 지적한다. 대법원장이 법관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에서는 법관들이 재판할 때 인사권자의 의중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그것만으로도 법관의 독립은 구조적으로 위협받는다는 것이다. 사법부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법관 개개인의 용기와 양심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법관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해 5월 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에 참석, 입술을 다물고 있다. 2026.8.5. [사진공동취재단] 연합뉴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간 제도와 문화의 차이
저자는 같은 사법부에 속하면서도 헌법재판소가 상대적으로 수평적인 소통 문화를 통해 재판관 개개인의 독립성을 지켜내는 모습을 소개한다. 권위적인 직급 대신 각자가 정한 호(號)를 부르고, 가장 늦게 임명된 막내 재판관을 ‘총무’로 지정해 평의에서 먼저 발언하게 하는 관행 등이 좋은 사례다. 선배 재판관들의 의견을 먼저 들은 뒤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젊은 재판관부터 자신의 논리를 펼치게 함으로써 신임 재판관이 위계에 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와 문화의 차이는 단순한 조직문화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그것이 헌법적 판단의 과정과 결과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법관의 독립은 법률상 선언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구조와 문화 속에서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이러한 구조적·문화적 차이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25년 5월 1일 대법원이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일과, 같은 해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해 전원일치 결정을 내린 일을 제시했다. 두 사건의 법적 쟁점과 재판의 성격은 서로 달라 단순 비교에는 한계가 있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개별 판결의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헌법기관 내부에서 재판관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이다.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7차 변론이 열리고 있다. 2025.2.11. 연합뉴스
재판관의 덕목은 무사무욕, 비판적 성찰, 관용과 겸손
총 8부로 구성된 이 책은 사형제, 양심적 병역거부, 집회의 자유 등 헌법재판소에서 다뤘던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헌법적 판단의 의미를 되짚는다. 저자는 결정문이라는 건조한 텍스트 뒤에 숨어 있던 재판관들의 치열한 고민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으며 자신의 판단이 다수의견이 되지 못했던 경우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에는 소수에 머물렀던 생각이 언젠가 헌법의 발전을 위한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동료 재판관들의 판단을 매섭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비판의 칼날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데 있다. 저자는 재판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만이 아니라 무사무욕, 비판적 성찰, 관용과 겸손이라고 강조한다. 확신에 차 있는 사람보다 의심하는 사람이,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사람보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라는 그의 태도에서는 세속의 권력을 다루는 법관이라기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에 가까운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저자는 법관의 양심이 개인적인 취향이나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오직 헌법이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시에 헌법재판관 선임의 민주적 정당성, 재판관 구성의 다양성, 사건 처리 속도의 일관성 등 헌법재판소 자체의 제도적 쇄신도 요구한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라기보다 ‘좋은 법관이란 어떤 사람인가’와 ‘좋은 사법부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함께 묻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오늘의 대한민국 사법부에 던지는 매우 성실하고 양심적인 자기성찰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바로 그 성실한 성찰 때문에 오히려 책의 한계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저자는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인사권의 문제와 사법부 내부의 위계적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그 대안을 주로 법조 엘리트 내부의 권력 배분과 법관 개개인의 직업윤리, 양심과 용기의 강화에서 찾는다.
‘사법부 독립’은 민주주의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사법의 문제가 과연 그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낳는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헌정 위기를 거치고, 최근 청와대와 대법원 사이에서 대법관 제청과 임명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는 상황은 이 질문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대법관 재제청을 둘러싼 논란은 한편으로 대법원장의 제청권과 사법부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묻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통령의 임명권과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민주적 정당성이 사법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도 제기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손봉기 후보자에 대한 재제청 요구와 관련해 구체적인 사유와 헌법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취지로 거부 입장을 밝혔고, 청와대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추천된 후보자들에게 법령상 근거 없이 개별적으로 연락해 사퇴 의사를 묻는 등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대통령의 임명권이 대법원장의 제청에 기계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청와대의 논지다. 반대로 대법원 쪽은 제청권과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다. 어느 쪽의 주장이 최종적으로 옳은지를 떠나, 이번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 헌법이 사법부의 독립과 민주적 정당성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계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더구나 대법관 공백이 장기화할 경우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은 청와대도 대법원도 아니다. 재판받아야 하는 국민이다. 사법부의 독립이 중요한 이유도 결국 국민이 권력이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독립된 법원에서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사법부 독립’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법부 권력은 국민에게 얼마나 열려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을 읽은 뒤 남는 질문이 있다.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면, 독립된 사법부는 누구에게 책임을 지는가. 그리고 사법부의 권력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김기영 전 재판관
저자의 시선은 여기까지 충분히 밀고 나가진 않는다.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가 사법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시민이 재판과 사법행정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면 배심·참심제와 같은 시민의 재판 참여를 확대하는 문제, 법원 행정과 인사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문제 등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물론 이것을 저자 개인의 결함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오랫동안 법조 엘리트로서 훈련받고 사법부 내부에서 생활해 온 사람에게 사법부를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바라보는 것과 사법부를 ‘국민의 것’으로 바라보는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던지는 국난의 순간 당신은 어디에 서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도 유효하다. 오히려 이 질문을 한 단계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사법농단과 헌정 위기의 순간에 법관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묻는 것에서 더 나아가, 평상시 사법 권력이 국민에게 얼마나 열려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하나 더 보태야 할 질문 사법부는 누구의 것인가”
사법부 독립은 권력으로부터 사법부를 떼어놓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법관들이 외부의 압력 없이 헌법과 법률에 따라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그 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또 하나의 폐쇄적 권력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저자는 법관에게 묻는다. 국난의 순간 당신은 어디에 서 있었는가. 이제 우리 시민은 그 질문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한다. 사법부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 책이 우리에게 남긴 성찰을 다음 단계로 이어가는 일일 것이다.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ohtak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