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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인권침해, 반빈곤 투쟁은 의무” 르생스키의 꿈
[사람들]
2025년 10월 17일 ‘세계 빈곤 퇴치의 날(빈곤 철폐의 날)’을 맞아 서울 용산의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불평등 세상 공공성으로 뒤집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빈곤사회연대) 프랑스 파리의 샤요궁 앞은 에펠탑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인 데다 바로 앞에 트로카데로 정원과 바르샤바 분수대가 펼쳐져 늘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샤요궁 두 날개 건물 사이의 널찍한 공간은 인권 광장으로 불린다. 1948년 12월 10일 유엔이 샤요궁에서 총회를 열어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한 뒤 여기서 발표했기 때문이다. 1985년 미테랑 대통령은 이곳을 ‘자유와 인권 광장’으로 명명하면서 한쪽에 프랑스혁명 때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1조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를 새긴 기념석판을 설치했다. 2년 뒤 광장 반대편에 두 번째 기념석판이 조성됐다. 여기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1987년 10월 17일, 전 세계의 인권과 시민권 수호자들이 이 광장에 모여 굶주림, 무지,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가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신념을 재확인하고 전 세계에서 빈곤 퇴치를 위해 싸우는 이들과의 연대를 선언했다. 가난한 삶에 내몰리는 그 어떤 곳이든 인권은 침해되고야 만다. 이들의 인권이 존중될 수 있도록 단결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다.”   프랑스 파리 ‘인권과 자유의 광장’에 설치된 빈곤 퇴치 운동 기념석판 앞에서 ATD 제4세계 아일랜드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ATD 제4세계)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인류 최대 난제 석판 설치를 주도한 인물은 조제프 르생스키 신부였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빈곤은 인류 최대의 난제였다.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이들을 돕는 데 앞장선 사람은 많았지만 이들과 함께 어깨를 겯고 빈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한 인물은 드물었다. 그는 1917년 2월 12일 프랑스 중서부 앙제의 폴란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빈곤과 차별을 겪으며 평생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1946년 천주교 사제가 된 뒤 농촌과 공장지대 등에서 활동하다가 1956년 파리 인근 250가구가 사는 노숙자 캠프의 성당 주임신부로 임명됐다.   평생을 빈곤 퇴치 운동에 몸 바친 조제프 르생스키 신부. (ATD 제4세계)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유럽 부흥 계획(마셜 플랜)에 따라 고도성장을 누리고 있었으나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이 잇따라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민과 빈민이 생겨났다. 르생스키는 1957년 가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하며 수용자들과 함께 단체를 결성했다. 국제구호인권단체 ATD 제4세계(All Together in Dignity to Overcome Poverty Fourth World)의 출발이었다. 르생스키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옷과 음식보다도 인간 존엄성”이라고 강조하며 무료 급식소와 헌옷 배포소를 도서관, 유치원, 예배당으로 바꿔나갔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빈곤연구소를 설립해 빈곤 원인과 퇴치 방안을 연구하는 한편 가난으로 소외된 이들이 모든 사회 계층과 연대할 수 있도록 국가, 교회, 국제기구가 참여하는 지도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국은 ‘빈곤 철폐의 날’이란 이름으로 기념 그의 노력에 따라 빈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차츰 바뀌었다. 프랑스 정부도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해 1979년 그를 경제사회환경위원에 위촉했다. ATD 제4세계는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 태국,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와 세네갈 등지에 지부를 설립했다. 1982년 ATD 제4세계 창설 25주년을 맞아 벨기에 브뤼셀에 모인 활동가들은 유엔이 빈곤을 인권침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을 시작했다. 르생스키는 1987년 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에 보고서를 발표하고 기념석판 설치를 제안했다. 위원회는 보고서 내용을 지지하고 기념석판 제안도 받아들였다. 10월 17일 열린 제막식에는 프랑스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기념석판 주변 길에는 르생스키 산책로란 이름이 붙었다.   르생스키 신부(왼쪽)가 아이들과 즐겁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ATD 제4세계)  르생스키는 제막식 4개월 뒤인 1988년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파리 기념석판을 복제한 석판이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와 브뤼셀 유럽연합 본부 등 세계 각국 50여 곳에 설치됐다. 유엔은 1992년 총회에서 파리 기념석판 제막식이 열린 10월 17일을 국제 빈곤 퇴치의 날(International Day for the Eradication of Poverty)로 제정해 해마다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전국빈민연합과 빈곤사회연대를 비롯한 우리나라 반빈곤운동 단체들은 이날을 ‘빈곤 철폐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한다. 가난을 질병처럼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를 유발하는 사회구조와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ATD 제4세계 활동 기록 르생스키는 빈곤 퇴치 활동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주변으로도 퍼져 나가려면 모든 투쟁 기록을 문서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제프 르생스키 기록연구센터는 ATD 제4세계의 활동을 글, 사진, 녹음, 영상 등으로 보존해왔다. 1957년부터 1992년까지 ATD 제4세계가 프랑스와 부르키나파소에서 펼친 활동 기록은 202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파리의 빈곤 퇴치 운동 기념석판에는 빈곤 문제에 관한 르생스키 신부의 신념과 철학을 담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전 세계 50여 곳에 복제품이 설치됐다. (ATD 제4세계) 르생스키는 가난을 ‘기본적 안전 결여’의 빈곤과 ‘만성적 빈곤’의 절대빈곤으로 나눠 정의했다. 이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채택된 ‘절대빈곤과 인권에 관한 유엔 지침’에 지금도 쓰이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2021년 이후 절대빈곤 기준을 하루 3달러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원화로는 4천 원 정도인데 40년 전 1달러에서 계속 높아진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른 절대빈곤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약 8.5%로 7억 명 안팎이다.   ATD 제4세계 활동 기록은 202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부르키나파소 빈민 수용소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센터)  1990년 38%에 달했던 절대빈곤 비율은 2024년 8.5%까지 빠르게 감소했다. 최대 인구 대국인 중국의 빈곤 인구가 줄어든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은행(IBRD), 식량농업기구(FAO), 세계식량계획(WFP), 국제아동기금(UNICEF) 등 국제기구와 NGO들의 노력도 큰 보탬이 됐다. 유엔은 2000년부터 15년씩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를 추진하며 빈곤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2020년 이후 코로나 팬데믹, 경제성장 둔화, 전쟁, 기후변화 등에 따라 감소세가 주춤한 상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복합빈곤지수(MPI)를 기준으로 한 전 세계의 극심한 빈곤 인구는 지난해보다 5150만 명이 늘어난 12억 명에 이르렀다. 빈곤 인구가 늘어난 것은 2010년 조사 이후 처음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옥스퍼드 빈곤·인간개발 이니셔티브 연구센터(OPHI)와 공동으로 발표하는 MPI는 소득 수준뿐 아니라 주거, 위생시설, 전기, 연료, 식량, 교육 등을 종합한 것이다.   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2026년 기아 지도(Hunger Map). 영양 부족 인구 비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색깔이 진하고 어둡다. 북한, 차드, 마다가스카르 등이 가장 짙은 고동색으로 표시돼 있다. (WFP) 가난이 능력 부족과 게으름에서 비롯된다는 착각 우리나라에서는 국제사회 기준에 따른 절대빈곤 인구는 사라졌다.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는 올해 1인가구 기준으로 월 82만 원, 4인가구에는 207만 원이 지급된다. 1인가구의 경우 하루 20달러꼴이다. 그러나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처럼 본인이 신고하지 않아 누락되거나 소득과 재산이 있는 부양 의무자가 방치하는 사각지대가 있다. 이 같은 비수급 빈곤층은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즘은 양극화가 심해져 상대적 빈곤이 더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소득이나 자산 모두 상위 가구 쏠림 현상이 심해져 상대적 빈곤율이 높아졌다. 특히 66세 이상 인구의 상대적 소득빈곤율은 39.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이고 OECD 평균(14.8%)의 약 2.7배에 이른다.   유엔이 새천년개발목표(MDGs)에 이어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추진하고 있는 지속가능개발목표(SDGs) 17개 가운데 첫 번째가 빈곤 퇴치이고 두 번째가 기아 종식이다. (유엔) 올해 빈곤 철폐의 날을 맞아 서울에서는 아시아빈민대회가 열리고 있다. 일본, 대만, 홍콩, 필리핀 등의 빈민과 활동가가 모여 각국 빈곤 현황과 투쟁 사례를 발표하고 연대 의지를 확인하는 자리다. 16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대강당에서 ‘아시아의 빈곤과 불평등, 반빈곤운동의 오늘’이란 주제로 콘퍼런스를 개최한 데 이어 17일 오후 1시 서울 종로1가 영풍문고 앞에서 기념집회를 열고 가두행진을 펼친다. 가난은 능력 부족이나 게으름에서 비롯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타고난 여건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훨씬 많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져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가난이 소 아들’이란 속담이 있듯이 빈민 대부분은 소처럼 죽도록 일하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는 기아로 고통받는 아동 사진을 내세워 연민과 후원을 끌어내는 이른바 ‘빈곤 포르노’ 대신 주체성과 연대의 가치를 강조하는 새로운 후원 마케팅 영상 콘텐츠 ‘슈퍼 히어로’를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제1편 ‘망토를 두른 아이, 하늘을 꿈꾸다’의 한 장면. (반크)  그렇다고 가난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은 아니다. 빈곤을 유발하는 사회구조와 제도를 바꾸면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39년 전 오늘 파리 인권과 자유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믿음이었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여기에 화답해왔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는 것이다.   16~17일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빈민대회 포스터. 일본, 대만, 홍콩, 필리핀 등의 빈민과 활동가들이 참여해 콘퍼런스를 열고 가두행진을 벌인다. (아시아빈민대회 조직위원회) 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hoprav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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