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눈앞의 기후위기를 멀게 느낄까? [환경] 2026년 9월 7일 네팔 누와코트(Nuwakot) 지역 트리슐리(Trishuli)에서 한 남성이 돌발 홍수 피해 현장의 잔해를 살펴보고 있다. 앞서 8월 26일 중국-네팔 접경 지역의 빙하 산이 붕괴하면서 발생한 쓰나미와 같은 거대한 물살과 진흙, 잔해의 급격한 유입으로 인해 수백 명의 외국인을 포함해 5650명 이상이 사망, 실종되었다. 2026.9.7. AFP 연합뉴스
느린 위기는 어떻게 갑작스러운 재난이 되는가?
네팔 빙하 홍수가 보여준 시간의 역설
지난 8월 26일 네팔과 중국 티베트 접경의 히말라야 지역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재난이 일어났다. 빙하와 산악지형의 붕괴로 추정되는 거대한 얼음과 암석 사태로 물과 토석이 한꺼번에 계곡을 휩쓸면서 아래에 있던 트리슐리강 일대의 마을과 도로, 교량, 수력발전시설을 순식간에 덮쳤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9월 11일 현재 네팔과 티베트에서 1300명 이상이 숨졌고 약 5000명이 실종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 재난이 충격적인 것은 피해 규모만이 아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재난이 만들어진 시간이다. 한순간에 발생한 홍수 사태로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변화가 있었다. 기온 상승은 빙하를 녹이고 영구동토층을 약화시켰다. 산악지형의 얼음과 암석을 붙잡고 있던 구조도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으면서 얼음과 암석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토석류와 하천 범람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느린 변화가 초래한 갑작스러운 파국이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일은 지난 10여 년 사이 수차례 있어 왔다. 중국, 인도, 스위스 지역에서 이미 빙하호수 붕괴 사태가 있어 왔는데, 그 극적인 형태가 이번 네팔 참사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런 일이 앞으로도 빈도와 강도를 더해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느린 위기’와 ‘갑작스러운 재난’을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기후위기에서 이 둘은 하나의 과정으로 묶여서 나타난다. 빙하는 천천히 녹지만 홍수는 갑자기 일어난다. 바다는 오랜 시간 열을 축적하지만 해양 폭염과 초강력 태풍은 긴박한 사건의 형태로 나타난다. 산림과 토양은 수년간 건조해지지만 대형 산불은 몇 시간 만에 마을과 도시를 초토화시킨다. 기후위기는 느린 과정으로 눈에 띄지 않게 축적되어서 위험하고, 어느 순간 너무 빠르게 재난 형태로 나타나서 또한 위험하다.
롭 닉슨(Rob Nixon)은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를 ‘느린 폭력’(slow violence)이라 불렀다.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다 보니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크고 정치적 현안에서 쉽게 배제된다. 그렇다고 해서 드러나지 않은 형태의 폭력과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축적된 위험이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의 얼굴로 나타나게 된다. 이번 네팔 참사는 이런 현실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기후위기는 장기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현재 당면한 구체적인 문제다. 따라서 기후 문제를 다루는 핵심은 온실가스 총량 관리만이 아니라 ‘타이밍’에 있다. 같은 감축량이라 하더라도 지금 줄이는 것과 10년 뒤 급격하게 줄이는 것이 미치는 영향은 매우 다르다. 그렇다면 기후 재난은 이미 현실이 되었고, 과학적 경고도 충분히 축적되었는데, 왜 우리의 정치와 일상은 기후위기를 여전히 먼 미래의 다른 누군가의 문제처럼 다루는가?
지난 9월 2일 카트만두 파슈파티나트 사원에서, 홍수로 인해 여전히 실종 상태인 희생자들을 위한 상징적 장례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유가족들이 네팔 힌두교 의식에 따라 쿠시(Kush) 풀로 만든 인형을 화장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 2026.9.2. AFP 연합뉴스
우리는 왜 눈앞의 위기를 여전히 멀게 느끼는가?
‘평균화’와 ‘거리화’가 주는 착시
기후위기 대응이 늦어지는 이유를 두고 사람들이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지구온난화, 탄소배출, 폭염과 해수면 상승 등에 대한 경고를 수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도 전향적 태도 변화를 못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기후위기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기후 문제를 우리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고 보는 데는 두 가지 착시 현상이 작동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평균화’가 만들어내는 착시다. 기후 문제는 흔히 평균의 언어로 다뤄진다. 일상의 구체적 경험의 영역인 날씨와 달리, 기후는 수십 년 동안의 온도와 강수량 등의 변화를 통계적으로 개념화해서 다뤄진다. 기후 문제와 관련해 지구 평균기온 1.5℃, 2050 탄소중립, 탄소 예산 같은 개념이 여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런 평균화 된 개념이 현실을 설명하는 도구를 넘어 현실 자체로 받아들여질 때 생긴다. 예를 들어 지구 평균기온 ‘1.5℃’라는 숫자는 일교차가 10℃를 넘는 날이 흔한 우리의 일상적 감각에서 대수롭지 않게 보이도록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지구 ‘평균’ 기온 1.5℃ 상승이 어느 지역에서나 똑같은 수준으로 기온이 오른다는 오해를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위도상 지역의 위치와 계절에 따라 기온 변화의 폭은 훨씬 크고 극적이다. 게다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의 실질적 효과는 기상 체계 자체의 교란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기후변화는 폭염과 가뭄, 홍수, 산불, 감염병, 농작물 피해, 생계 상실 같은 구체적 사건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영향과 피해 또한 매우 차별적이다. 같은 폭염이라도 냉방이 가능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야외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농민이 경험하는 위험이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기후와 관련된 현실의 사회·정치·경제·지역·생태계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평균화된 개념과 수치적 접근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거리화’로 인한 착시다. 사람들은 기후변화를 ‘먼 훗날에서야 일어날 일’, ‘먼 지역이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 ‘나와 다른 사람들의 문제’, 또는 ‘정말 그렇게 될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기후 문제를 시공간적 거리 두기를 통해 바라보도록 한다는 것이다.
네팔 재난도 이런 거리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에서 4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히말라야 지역의 참사는 쉽게 ‘그곳의 그들의 재난’이 된다. 2050년 탄소중립은 ‘나중에 해결할 목표’가 되고, 미래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로 현세대의 정치적 결정에서 쉽게 밀려난다. 문제는 이런 거리화가 기후 문제를 지금 여기의 선택과 먼 곳, 먼 미래의 피해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고, 책임의 윤리나 책임있는 행동이 들어설 자리를 막아버린다는 점이다.
결국 오늘날 가장 현실적인 위험 가운데 하나인 기후 문제는 평균화와 거리화가 일으키는 착시 과정을 통해 추상화되고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문제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기후 문제의 전 지구적이고 장기적인 차원과 ‘지금 여기 나’의 구체적 현실 차원과의 괴리를 좁히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다.
지난 8월 28일 네팔과 누코트(Nuwakot) 지구 바타르 바자르(Battar Bazar) 마을의 한 군부대에서 구조된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틀 전인 8월 26일 중국-네 팔로워 지역의 빙하 산이 붕괴되면서 전대미문의 홍수사타가 일어나 수천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2026.828. AFP 연합뉴스
‘나중에 되돌리면 된다’는 위험한 착각
1.5℃ 오버슈트에 숨겨진 시간 구조
지난 9월 2일 유엔환경계획(UNEP)은 상당히 엄중한 판단을 담은 보고서를 내놓았다. 현재의 정책과 가까운 미래의 배출경로를 고려하면 지구 평균온도의 1.5℃ 초과는 사실상 피하기 어려워졌으며, 이제 국제사회는 초과 폭과 기간을 최대한 줄인 뒤 온도를 다시 1.5℃ 아래로 낮추기 위한 경로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버슈트’(overshoot)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오버슈트는 지금 충분히 하지 못한 일을 미래에 더 많이 하면 된다”는 것으로, 유엔환경계획의 주장처럼 지구 평균기온이 1.5℃를 일시적으로 넘어갔더라도 강력한 감축과 탄소 제거를 통해 다시 1.5℃ 아래로 내려오는 경로를 말한다.
하지만 기후 문제에 있어 ‘되돌린 온도’와 ‘되돌릴 수 없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 미래에 지구 평균기온을 다시 낮출 수 있다고 하더라도 초과 기간에 일어난 모든 일까지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임계점을 넘어선 기온 상승으로 사라진 빙하, 높아진 해수면, 사라진 산호초, 멸종한 생물종, 영구동토층의 해빙, 생태계의 붕괴는 평균온도가 다시 회복된다고 해서 복원되지 않는다. 이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들, 사라진 마을, 무너진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오버슈트 논리 속에는 매우 위험한 시간 구조가 숨어 있다. 오버슈트는 현재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를 미래의 기술 가능성으로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현재 세대가 누리는 편익과 미래 세대가 떠안는 위험 사이의 ‘시간적 거래’이자 ‘위험의 시간적 외주화’에 해당한다.
결국 기후 문제는 목표 값 만의 문제가 아니다. 똑같은 1.5℃라도 ‘한 번도 크게 넘지 않은 1.5℃’와 ‘이것을 초과한 뒤 수십 년 뒤 다시 회복된 1.5℃’는 전혀 다르다. 1.5℃를 초과하는 정도가 클수록, 그리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과 자연이 받는 위험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후정치의 초점도 달라져야 한다. 평균 온도 1.5℃에 가려진 현실의 구체적인 차이들, 온난화의 최고점 수준과 지속 정도에 따른 구체적 영향과 충격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2050 탄소중립 목표도 총량 감축을 넘어서 언제부터 얼마나 어디서부터 줄일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다뤄야 한다. 최종 목적지로 가는 경로와 타이밍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직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지난 9월 1일 카트만두의 고카르나 산림 보호구역 내 구덩이에 집단 매장을 위해 안치된 신원 미상의 홍수 희생자 시신들. 2026.9.1. AFP 연합뉴스
닫혀가는 ‘시간 창’과 2030년의 의미
기후정치의 핵심은 타이밍이다
‘시간 창’(time window)은 어떤 위험을 피하거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질적인 행동이 가능한 제한된 시간 범위를 뜻한다. 2050년 탄소중립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말한다면, 시간 창은 그 목표로 갈 수 있는 선택지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묻는다.
기후위기에서 이 차이는 중요하다. 기후변화는 일반적인 정책처럼 언제 시작해도 비슷한 결과를 달성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온실가스는 계속 누적되고, 기후시스템에는 관성과 시차가 있으며, 생태계에는 임계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 가능했던 선택지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관련해서 최근 과학은 기후와 관련한 시간 창이 얼마나 빠르게 좁아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올해 6월 《Earth System Science Data(지구시스템 과학 데이터)》에 발표된 논문 「Indicators of Global Climate Change(글로벌 기후변화 지표) 2025」에 따르면, 2016~2025년 10년간 인간 유발 온난화 속도가 약 0.27℃로 관측 기록에서 가장 높은 수준과 맞먹는다. 같은 학술지 5월호에 발표된 「Global Carbon Budget(글로벌 탄소예산) 2025」는 2025년 수준의 배출이 이어진다면 남은 탄소예산이 대략 4년치 정도라고 분석한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특별보고서 또한 지구온도 1.5℃ 목표 달성과 관련해 2030년을 탄소중립으로 가는 중간 과정이 아니라, 2050년 목표 달성을 결정짓는 시점으로 보고 있다.
물론 4년 후 2030년을 지구가 끝장난다”는 식의 종말론으로 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다. 기후 문제는 멀쩡하던 세계를 어느 순간 갑자기 재앙의 세계로 바꾸는 소행성 충돌 같은 사건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지금에서 보면 감축을 늦출수록 남은 탄소예산은 줄어들고, 앞으로 필요한 감축 속도는 더욱 가팔라질 수밖에 없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비교적 완만한 속도의 감축으로도 1.5℃ 경로를 상상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대규모 탄소제거 기술을 활용한 오버슈트 가능성도 낙관하기 어렵다.
‘시간 창’ 관점에서 보면 2030년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로가 급격히 줄어드는 분기점이 분명하다. 시간 창이 좁아지고 닫힌다는 것은 덜 위험한 선택지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30년은 기후 문제 해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간 지표다.
관련해서 2030년은 지속가능한 나라를 열망하는 우리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2030년은 현재 이재명 정부가 책임지는 정치적 시간과 기후과학이 경고하는 결정적 시간대가 거의 겹친다. 그만큼 2030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는 현 정부에 주어진 역사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정부의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임기 중 몇 퍼센트의 온실가스를 줄였는지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 정부는 2030년 이후의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를 얼마나 남겨놓을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하다. 기후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의 정책 방향과 투자가 미래의 선택지를 넓히는가? 제한하는가? 아니면 지속불가능한 경로로 잠궈(lock-in) 버리는가?
지난 8월 29일 네팔 누와코트(Nuwakot) 지구 데비가트(Devighat)에서 발생한 돌발 홍수 이후, 한 주택 밖 진흙투성이가 된 매트리스 위에 가족사진이 놓여 있다. 2026.8.29. AFP 연합뉴스
기후 시간과 정치 시간의 불일치
메가프로젝트 미래주의에 던지는 질문
기후위기에 대응해 한국 정부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탄소중립기본법을 개정하고, 중장기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도 법적 틀 안에서 구체화하고 있다. 개정된 법은 2035년 감축목표를 2018년 대비 53~61%, 2040년은 69~80%, 2045년은 84~90%의 범위로 설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평가가 달라진다. 문제의 핵심은 감축 목표 숫자만이 아니라 감축을 언제 시작하고 어느 시기에 얼마나 더 부담을 지느냐가 중요하다. 감축 경로와 관련해 장기간에 걸쳐 일정한 비율로 줄이는 ‘선형 감축’과 초기부터 더 많이 줄여 미래의 부담을 덜어주는 ‘조기 감축’이 있는데, 같은 최종 목표를 향하더라도 이 두 경로가 미래세대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다르다. 그래서 국회 기후특위 공론화위원회에 참여했던 시민대표단 다수가 조기 감축 경로를 선택해 제안했다. 그런데 지난 8월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탄소중립기본법 개정안은 미래세대에 부담을 더 떠넘기는 ‘선형 감축’ 경로를 선택했다. 현실을 움직이는 정치 시간이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기후 시간을 눌러버린 결과다.
기후위기로 인한 미래의 경고가 몇 년 뒤 선거와 분기별 실적, 당장의 생활 물가에 민감한 현실의 단기적 시간 구조에 갇혀 쉽게 묻혀버리는 것이 안타깝지만 당면한 현실이다.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는 인간 행위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길어지는데 정치가 관심을 유지하는 시간은 오히려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지금 현세대의 선택이 미래세대가 가질 선택의 폭을 제한하는 ‘현재에 의한 미래의 식민화’ 상황이 나타난다. 결국 기후정치의 실패는 기후와 관련한 서로 다른 시간 규모와 리듬들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한 정치의 실패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온다. 정부는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를 미래 성장의 핵심 축으로 규정하고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국가적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이 프로젝트가 대한민국을 대체 불가한 초격차 산업 강국으로 대도약 시킬 기회라면서 속도전”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지난 호 글 ‘메가프로젝트’ 속도전, 어디로 무엇 향해 달려가나?”를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 중요하게 확인해야 할 것은 기후위기를 맞아 ‘미래’ 인식이 전혀 달라지는 상황에서 대규모 인프라 투자로 성장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이 과연 가능하고 타당한가다. 20세기 미래주의에서 속도는 진보이고 대규모 인프라는 발전의 상징이었다. 생산성을 높이면 풍요가 확대되고 기술은 인간을 더 안전하고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미래는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오고 있다. 성장은 생태적 부채와 결합하고, 속도는 자원과 에너지 소비를 가속하며, 거대한 디지털 시스템은 생태적 한계를 넘어선 막대한 전력과 용수, 광물과 토지를 소모한다.
지금은 ‘미래지향적 산업’이라는 이름만으로 정책의 미래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시대다. 정책에 대한 판단 기준은 자본의 투자 규모나 기술의 첨단성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어떤 미래를 열고 잠그느냐에 있다. 그런데 지금 추진하려는 메가프로젝트는 20세기 미래주의에 머물러 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미래를 건설하는 일 못지않게 미래가 소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만큼 우리의 산업구조와 에너지 체계 전반을 바꾸게 될 메가프로젝트도 다음과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자원과 시간을 집중하는 사업과 정책이 남아 있는 기후 시간 창을 넓힐 것인가? 아니면 좁힐 것인가? 미래세대에게 더 많은 선택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시스템과 경로를 장기간 고착시킬 것인가?
지난 9월 4일 네팔군이 촬영해 배포한 이 사진은 네팔 라수와(Rasuwa) 지역의 트리슐리-3A(Trishuli-3A) 수력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터널 안에 갇혀 있던 노동자를 이송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2026.9.4. AFP 연합뉴스
미래를 소진시키는 정치에 맞서기
‘시간 만들기’ 전략과 ‘시간 반란자들’
우리는 이미 기후변화가 일정한 수준을 넘어선 세계에 살고 있다. 그만큼 기후변화로 미래가 나빠지는 속도를 늦추는 것과 동시에 달라진 세계에서 살아갈 능력을 키워야 한다.
관련해서 토니 프라이(Tony Fry)가 강조한 ‘시간 만들기’(time making) 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지속 불가능한 문명이 미래 자체를 소진시키는 문제에 대응해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 만들기’를 제안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계의 시간’(clock time)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지속되는 시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후위기 시대의 ‘시간 만들기’는 파괴 속도를 늦추고, 생존 가능성을 연장하며,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선택지를 보존, 확장하는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가장 가장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은 돈과 기술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만큼 기후 ‘시간 창’이 너무 빨리 닫히지 않도록 하는 정치적 실천이 기후 시간 만들기다. 당연히 현재의 책임 있는 결단을 뒤로 미룬 채 지구공학과 네거티브 기술을 활용한 ‘시간 벌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기후 정책을 시간 만들기 차원에서 살펴보면, ‘감축’은 임계점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만들어주고, ‘적응’은 기후로 인한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살아갈 시간을 만든다. 산림과 습지, 하천과 토양을 복원하는 것은 자연에게 회복의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고, 미래세대의 권리를 제도에 반영하는 것은 미래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보존하는 일이다. 민주적 숙의는 비록 느려 보이지만 개발 속도가 미래를 잠가버리지 않도록 사회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시간 만들기는 정책과 제도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정부의 임기와 선거의 시간, 투자와 이윤 회수의 시간, 주식과 금리, 물가 변동의 시간이 지배적으로 작동하면서 우선순위를 결정해 오고 있다. 하지만 기후위기에는 빙하가 녹는 시간, 숲이 자라는 시간, 토양이 다시 비옥해지는 시간, 어종이 회복되는 시간, 강이 스스로를 정화하는 시간, 지역공동체가 재난 뒤 삶을 복원하는 시간이 매우 중요해졌다.
기후 문제의 원인은 과거부터 누적되어 왔고, 결과는 지연되고 있으며, 때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미래는 저절로 오는 시간이 아니다. 오늘의 선택이 미래가 들어올 여지를 넓히기도 하고 닫아버리기도 한다. 그만큼 화석자본주의가 작동시키는 시간을 멈추고, 기후 대응 지연에 저항하며 전환의 속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 생태계의 재생시간, 비인간 생명의 시간, 미래세대의 시간, 지역사회의 시간, 돌봄의 시간 등을 아울러 시간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의 시간 질서를 뒤흔들고 새로운 시간 질서를 만들어가는 ‘시간 반란자들’(time rebels)의 역할이 중요한 때다. 이들은 미래를 기다리기 보다는 시간질서를 바꿔서 가능한 미래를 확장시키려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현재의 이익과 속도를 위해 미래의 시간을 끊임없이 당겨쓰는 기존의 시간질서가 반란의 대상이 된다.
기후 운동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미래를 위한 금요일’(FFF, Fridays for Future), ‘멸종 반란’(XR, Extinction Rebellion) 같은 단체도 시간 반란자에 해당한다. 우리의 경우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시간 반란자들다. 매년 9월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자, 청년, 농민, 종교인, 지역공동체 구성원들이 거리에 모여 ‘기후정의행진’을 펼쳐왔는데, 올해도 9월 19일 지구를 불태우는 폭주를 멈춰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정규호 생명학연구회 부회장, 녹색국가 저자
시간정치의 관점에서 ‘기후정의행진’은 단순히 정부에 온실가스 감축을 요구하는 집회가 아니다. 기후위기를 초래한 우리 사회의 시간표 자체를 새롭게 바꾸자는 것이다. 미래의 선택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고 확장하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늦추고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물음으로써, 불타는 지구를 방치하고 개발 폭주로 치닫는 시간의 작동 원리와 구조를 바꾸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2030년과 2050년의 시간, 미래세대의 시간, 폭염 피해자의 시간, 농민의 계절적 시간, 멸종위기종의 시간, 생태계의 회복시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의 시간을 현재의 정치적 선택의 시간으로 소환하기 위한 시간 반란자들의 목소리가 광장을 넘어 정치 현실의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정규호 생명학연구회 부회장(『녹색국가』 저자) ecosociet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