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오귀굿’ 거쳐 김민기 ‘소리굿 아구’로 완성된 마당극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마당극’의 효시를 소리굿 보다 4개월 전 공연된 (1973년 12월 25일 제일교회 본당에서 공연)으로 보기도 한다. 은 사실 마당극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고, 대본 자체가 마당극 형식으로 지어졌다. 다만 공연이 닫힌 공간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마당’의 열림, 즉흥성, 배우와 관객의 대등성 등을 살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한국민족극협회’가 공식 연혁에서 를 마당극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에 담겨 있는 ‘마당극의 원형질’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1984년 5월 놀이패 한두레가 재공연한 김민기가 만든 소리굿 아구의 포스터 . 1974년 초연된 이 작품은 대학 탈춤운동, 마당극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 출처: 프레시안( 채희완 제공)
대본은 1973년 여름 김지하가 썼다. 1년 전(1972년 8월) 남한강 대홍수를 계기로 가톨릭 원주교구가 펼치고 있던 남한강 유역의 농촌, 산촌, 광산촌의 재해 및 빈곤 극복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2년 4월 ‘비어’ 필화 사건으로 마산국립결핵요양병원에 위리안치돼 있던 김지하는 그해 겨울 원주로 근거지를 옮긴 뒤였다.
악귀를 물리치는 ‘오구’ 또는 ‘오구굿’이라는 전통 굿에서 형식과 내용을 빌려, 당시 농촌의 민주화와 협동화를 가로막는 여러 장애물과 벌이는 한판 투쟁을 덧뵈기 형태로 꾸몄다. 당시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를 상징한 세 마리 도깨비(수해귀, 외곡귀, 소농귀)를 농민들이 단합해 진압한다는 게 줄거리다.
김지하가 전통 굿의 형식, 즉 ‘마당’을 무대로 삼게 된 것은 1972년 봄 일본 극단 ‘상황’의 공연 에서 받은 충격에서 비롯됐다. 극단 은 무대였던 운동장에 이르는 공간을 무대로 삼고 있었다. 김지하는 그때 함께 공연했던 와 비교하며 꽤나 부끄러웠다고 했다.
(은) 아리스토텔레스식의 고전적 연극 무대를 버리고 브레히트의 반원형 무대마저 뛰어넘어, 문자 그대로 살아 생동하는 원, ‘마당’, ‘판’에서 이뤄지는 ‘굿’ 또는 ‘극’이었다.”(김지하)
김지하는 임진택에게 공연을 맡겼다. 둘은 연극 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뒤풀이할 때, 임진택이 김지하를 ‘두목’으로 삼고, 자신은 김지하의 반쯤 한다는 의미에서 ‘한목’으로 자호를 삼은 사이였다. 임진택은 고교 선배 채희완에게 안무를 부탁하고 자신은 연출을 맡았다.
은 불행하게도, 남한강 대홍수 피해지역 순회공연을 앞두고 포기했다. 수재가 워낙 심해 불과 1년 만에 마을공동체 자체가 깨져 버린 곳이 많았고, 남아 있는 농민들도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런 이들 앞에서 공연한다는 게 오히려 결례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은 엉뚱하게도 그해 말, 농민들을 괴롭히는 원귀들과 맞서는 농촌이 아니라 대도시 한복판, 박형규 목사가 이끌던 서울 제일교회에서 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당시 공연엔 김지하와 역시 필화로 구속됐다가 출옥한 ‘기자 리영희’도 참관했다.
이 공연에 대한 김지하의 평가는 인색했다. 그러나 당시 이 공연을 참관했던 기독 학생, 청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채희완이 봉산탈춤의 ‘먹중 과장’을 바탕으로 창작한 ‘도깨비 마당’의 춤과 소리는 청년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보수적이었던 새문안교회 청년회에서도 임진택에게 공연 지도를 요청할 정도였다.
김지하는 마당극의 남상(濫觴)을 국문학자 조동일(전 서울대 교수)에게서 찾았다. 김지하는 에 이렇게 썼다. (조동일은) 6·3항쟁 당시 ‘원귀 마당쇠’라는 마당굿을 시도하였고, 그것은 서울대 단식 농성 학생들의 ‘박산군(朴山君)’을 거쳐 훗날 ‘호질’과 ‘야, 이놈 놀부야!’ 등의 탈춤이나 마당굿으로 발전했으며, 그 이후 풍물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의 꽃다운 남상이 되었다.”
조동일은 불문학과 대학원생 시절 봉산탈춤을 보고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고 한다. 1963년 그가 짓고 공연한 는 최초로 시도한 탈춤과 연극의 콜라보였다. 국문과 학부로 전과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 ‘탈춤+연극’은 1964년 5월 20일 한일협정 반대를 위한 서울대 시위(‘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에서도 공연됐다.
1964년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주의 장례식장면. 이 자리에서 원귀 마당쇠 공연이 열렸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1965년 조동일과 김지하 그리고 심우성, 허금목 등은 ‘민속극연구회-말뚝이’를 발족해 탈춤의 원리와 가치를 연구하고 새로운 극적 형식으로 재창조하는 데 앞장섰다. 조동일은 그러나 2023년 부산대 특강에서 (는 탈을 쓰고 하는 연극이었다”며 마당극과는 거리를 두었다.
6·3항쟁 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건 서울대생들의 단식 농성이었다. 이 농성을 이끈 김지하는 농성 현장에서 박정희를 연산군에 빗대어 ‘박산군(朴山君)’이란 소리 사설을 지었다. ‘박산군’이 기폭제가 되어 단식 농성장은 서울대의 기재들이 풍자와 해학, 비판 정신을 폭발한 문화 놀이마당이 되었다. 또 이를 통해 한일 협상 반대 시위에서 정치투쟁은 민중적 문화 운동과 결합하게 됐다. 그 결실이 바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는 장대한 ‘의례’이자 거대한 ‘시위’였다.
는 6·3항쟁의 중심에서 탄생한 ‘원귀 마당쇠’ ‘박산군’의 계보를 잇는 것이었다. ‘아구’의 성공 이후 대학가는 운동의 문화적 형식에 주목했다. 민청학련 사건과 함께 유신 정권의 폭압이 정점으로 치닫고, 그 서슬에 집회와 거리 투쟁 중심의 기존 학생운동이 침묵할 때였다. 일반 학생들은 물론 주도 그룹조차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집단은 ‘문화패’뿐이었다. 그들이 무대 혹은 마당에서 펼친 질펀한 현실 비판 과 는 문화패와 학생 운동가들에게 새로운 상상력의 발현을 자극했다.
마당극의 효용성은 다양했다. 1970년대는 세계적으로 민족주의 물결이 휩쓸던 시대였다. 한국에서는 특히 친일파 박정희 정권의 압제와 일탈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민족주의 파도가 거셌다. ‘매판적’ 한일 국교 정상화의 여진도 여전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비등하는 국민적 분노와 불만을 담기에 마당극의 민족적 형식보다 더 적절한 그릇은 없었다.
마당극의 뿌리인 탈춤은 1870년대 조선조 민란의 시대, 억압과 수탈의 신분 질서에 대한 변혁의 움직임이 확산할 때 성행했다. 전태일 노동자의 죽음, 광주 대단지 항쟁 등과 함께 시작한 1970년대의 화두는 단연 ‘민중’이었으니, 탈춤에 기반한 마당극은 민중의 고통과 정서 그리고 시대적 모순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탈춤과 굿, 판소리 등을 결합한 마당극은 관중을 각성하고, 행동을 자극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각 대학 학생회는 축제나 각종 행사 때마다 풍물로 판을 열고, 판소리로 성명을 대신하며, 마당극으로 풍자하고, 굿으로 악귀의 퇴치를 염원하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축제의 대미인 마당극이 끝날 때면 어느덧 마당은 집회장이 되고, 시위라면 꽁무니를 빼던 학생들까지 적극 나서게 하여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민중의 문화 전통은 이제 폭정의 지배자에게 맞서고, 폭압을 뒤엎는 무기로 인식되고, 또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문화’가 어떻게 집회와 시위를 고양하고, 질기게 하는지 보여주는 임진택의 에피소드다. 1971년 문리대 연극회는 김지하의 희곡 과 을 공연하기로 했다. 학교 당국은 예산도 지원하지 않고, 공연 장소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는 3선개헌과 군사교육훈련 강화 등의 문제로 학교가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문리대 학생들이 그런저런 이유로 본관 4층 대강의실에서 농성을 시작하던 날이었다. 연극반 학생들도 대부분 참여했다.
농성은 프로그램이 웬만큼 치밀하고 또 재미가 없으면 무료해지거나 흐지부지 끝나기 쉽다. 게다가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다. 날이 저물자, 교수들이 들어와 여학생만 골라 귀가를 종용했다. 농성 학생들은 흔들렸다. 그때 임진택이 나섰다.
교수님들도 동참하셨으니, 우리 구호 한번 외칩시다.”
남북분단 서러운데!”
학생들의 복창이 우렁찼다.
남녀 분열 웬 말이냐!”
농성장은 이 구호 하나로 뒤집혔다. 이후 일신한 분위기에서 연극반 주도의 농성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팀이 농성장을 공연장으로 바꾼 것이다. 관객이 배우가 되고 연출자가 됐다. 강당 전체가 무대가 되고 객석이 되어 버렸다.
그해 10월 서울에 위수령이 내려지고, 10개 대학엔 휴업령과 함께 군인들이 진주했다. 학생운동의 전위들은 대부분 체포되거나 구속됐다. 각 대학의 학생회장단과 간부들, 사회과학 써클의 수장들도 무더기로 징집당했다. 전사의 양성소였던 사회과학 서클은 모두 해산당했다. 학생운동은 대를 잇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75년 어린이날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봉산탈춤 ‘목중춤’을 공연하는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대학 탈춤반은 전통연희를 익히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 비판과 대동의 문화로 발전시켰다. 사진출처: 프레시안(채희완 제공)
서울대 교양학부는 휴업에서 예외였다. 축제도 열렸다. 축제 프로그램을 주관한 문리대 연극회는 그해 봄 태동한 민속가면극연구회(회장 채희완)에 탈춤 공연을 요청했다. 채희완은 기능 보유자들까지 모셔 와 집중 연습을 했다. 짧은 연습이었지만, 봉산탈춤은 그해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 홍세화 등이 이끌던 탈춤반과 연극반은 축제를 정신 놓고 노는 놀이터가 아니라 비판 정신을 벼리고 대동의 의지를 달구는 화로가 되었다. 굿이 그렇고 탈춤이 그렇듯이 춤과 소리와 연극은 사실 모두 하나였다. 1973년 10.2 시위에서도 이들 문화패는 ‘대동의 축’ 노릇을 했다.
‘아구’의 제작 및 출연자들은 6월 서울의 대학 탈춤반들이 연합해 기획한 춤꾼 이애주의 춤판 ‘땅끝’으로 몰려갔다. 폐쇄된 공간(섬)에서 독재자(섬주)에게 유린당하는, 사랑하는 남녀의 비극을 그렸다. 민청학련 사건을 포함한 유신 체제의 억압과 폭력을 사실상 대놓고 비판한 작품이었다. 김지하가 술집에서 털어놓은 구상을, 이애주와 채희완이 시나리오와 안무로 구체화했다. ‘대사는 없지만, 춤으로 말하는 마당극’이었다. 김민기도 춤패의 일원으로 출연했다.
1974년 10월 김민기는 입대했다.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듬해 4월 11일 유신 체제를 흔드는 사건이 터졌다. 박정희에게 통절한 반성을 요구하며 김상진 학생이 수원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할복했다. 박정희 정권은 주검을 탈취해 12시간 만에 가족도 없이 화장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관련한 일체의 행사를 금지했다. 장례식도 물론 금지였다.
긴급조치 9호선포를 보도한 1975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 1면. 헌법 비방 반대 엄금, 유언비어, 학생 정치활동 불용등의 제목이 눈길을끈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더러운 정권이었다. 학생들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행사를 조직할 힘이 없었다. 그때 나선 서클이 민속가면극연구회(‘탈반’)였다. 탈반은 야학문제연구회와 함께 ‘서울대학장(葬)’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학교에선 불허했다. 강행하면 학칙에 따라 엄격하게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5월 13일 가장 악질적이었다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에 대해 비방만 해도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장례식 추진위원회에선 잠시 동요가 있었다. 그러나 ‘탈반’의 입장은 강경했다. 기왕 하기로 한 거 끝장을 보자는 것이다. 정보기관이 선수를 쳤다. 5월 21일 장례식 하루 전날 기관원들이 주모자들을 급습해 채희완과 임진택을 끌고 갔다.
1980년 4월 11일 5년만에 열린 김상진열사 장례식장면.
그러나 22일 오후 1시, 대학본부 앞에서 꽹과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어 장구와 북을 난타하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500여 명으로 늘었고, 대열은 본부 뒤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선두는 탈반의 사물이었다.
교직원과 보직교수들이 나와 막으려고 했지만, 감당할 수 없었다. 장례식은 엄숙하지만 처절한 의례이자 규탄대회로 치러졌다. 참석자는 4,000여 명에 이르렀다. 유신의 정수리를 가격한, 이른바 ‘오둘둘 시위’는 그렇게 시작했다. 김상진 열사 장례식은 1980년대 치러진 수많은 시위형 의례, 의례 형 시위의 전범이 되었다.
김민기는 유신 이후 ‘노래’를 사실상 작파했다. 탈춤의 채희완, 장만철, 연극의 임진택과 김석만, 음악의 김구한, 이종구, 김영동 그리고 춤의 이애주 등과 어울려 지냈다. 자연히 운동에 깊숙이 빠졌다. 여기서 말하는 ‘운동’이란 탈춤이고 굿이고 소리이고 춤이었고, 이 모든 놀이와 연희의 결합체였다.
말없이 이들을 결속한 이가 채희완이었다. 그는 김민기의 고교 1년 선배로, 1970년대 대학가에서 탈춤의 ‘교주’로 통했다. 돌아보면 당시는 경기고 출신의 전성시대였다. 교주도 있고, 당수(신동수)도 있고, 두목 김지하 밑의 한목(임진택)도 있었고, 전설(김민기)도 있었다.
채희완이 연출을 맡은 수주(박형규목사) 탈춤 예수전 공연 포스터. 이 공연은 2023년까지 순회공연을 했다. 1973년 12월 25일 박형규 목사가 시무한 제일교회 본당에서 김지하의 지노귀굿, 김민기의 소리굿 아구는 1974년 초연됐다. 채희완은 마당극 운동 50주년 맞이라는 표현으로 효시논쟁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연에서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창작 안부도 선보였다. 사진출처: 아르코 공식블로그
수주탈춤예수 공연장면. 사진출처: 아르코공식블로그
채희완이 1968년 재수할 때였다. 그는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봉산탈춤 공연에 혼이 쏙 빠졌다. 몸과 마음이 떨려 주체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세 번의 시도 끝에 1970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첫해부터 그는 민속 서클 결성을 시도했다. 첫 해엔 실패했지만, 이듬해 학생 56명의 서명을 받아 민속가면극연구회라는 이름의 공식 서클로 등록할 수 있었다.
1971년 가을 교양학부 축제 때 봉산탈춤 공연을 계기로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반에서 탈춤 지도를 요청했다. 이대에선 이듬해 연극반에서 분가한 이들이 민속극연구회를 결성했다. 1973년엔 연세대와 서강대에서도 탈춤반이 태어났다. 채희완은 이대와 연대를 맡았고, 2대 회장 장만철(장선우 영화감독의 본명)이 서강대를 맡아 출범을 도왔다. 1974년부터는 전국의 대학으로 탈춤이 열병처럼 번졌다. 채희완은 전국 대학을 돌아다니며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 바람이 얼마나 거셌던지 심지어 고등학교에서까지 탈춤 동아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학 탈춤 패들은 전통 탈춤의 원형을 습득하고 또 공연하는 한편 탈춤의 틀을 빌려 현실의 모순을 담아내는 창작 탈춤을 시도했다.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를 고발하고, 풍자하고 비판하는 1970년대의 문화적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의 활동은 학내에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저곡가와 이농으로 피폐해진 농어촌, 부당노동행위에 시달리는 노동 현장으로 확장했다. 각 현장에선 동아리 결성을 돕고, 그들의 이야기를 촌극이나 창작 탈춤, 마당놀이 형태로 꾸며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종교계에서도 ‘진오귀굿’ 이후 가톨릭 농민회, 기독교 농민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연합(‘기청’) 등이 게릴라식으로 마당극을 공연한 데 이어, 1976년엔 기청 산하 문화선교분과위에 탈춤반이 발족했다. 기청 탈춤반은 각종 청년대회에 참석해 분위기를 고양하고, 노동운동과도 결합해 원풍모방, 삼양화학, YH 등 민주노조가 결성된 사업장의 조합원들에게 탈춤을 전수하고, 창작 탈춤을 공연하기도 했다.
채희완은 1975년 이런 탈춤 바람을 몰아 마당극 운동 조직 ‘한두레’를 결성했다. 이 틀 속에서 2세대 문화 운동 패들이 대거 출현했다. 김정환, 황선진, 김봉준, 박인배, 유인열, 연성수, 김명곤, 유인택 등이 그들이었고, 그 맥은 정희섭, 문병욱, 강영희, 심규호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현장 공연 외에도 마당극의 미학적 체계를 이론화하는 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상황적 진실성, 집단적 신명성, 민중적 전형성, 현장적 운동성 등 1980년대 민족민중문화운동의 이념은 이때 정립됐다.
초연 이듬해 새로운 의례로서 ‘김상진 장례식’이 거행되고, 그해 말 백지광고 사태 때는 서울대 연극반 박인배 등이 을 공연했다. ‘동아’를 죽이려는 악귀를 물리치고 정의의 실현을 기원하는 창작 마당극이었다. 1978년엔 동일방직 사태를 소재로 , 함평 농민들의 고구마 수매 싸움을 소재로 한 그리고 광주의 ‘무등산 타잔’을 소재로 한 가 마당극 혹은 마당굿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마당극(혹은 마당굿)이 한편에선 시대의 한을 풀고, 다른 한편에선 저항의 최일선을 지키는 기수로 나선 것이다.
대학 탈춤 패들은 1970년대 후반 ‘연탈’(전국 대학생 탈춤반 연합)이라는 연대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1980년 5월 ‘연탈’을 중심으로 전두환과 신군부의 쿠데타를 고발하는 대본을 창작하고 배포해, 각 대학 탈춤 패들이 각자의 사정에 맞게 각색해 공연할 수 있게 했다.
탈춤이 대학가에 오죽 유행했으면, ‘5공의 괴벨스’ 허문도는 탈춤을 5공의 문화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981년 ‘국풍81’ 무대에 돈을 쏟아부어 대학 탈춤 패를 대거 동원하려 했다. 그러나 ‘연탈’의 조직적인 거부 활동으로 참여 대학은 한두 군데에 그쳤다.
탈춤 부흥 운동은 단지 탈춤과 마당극에만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다. 음악, 무용, 연극 등 공연 예술계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미술 등 시각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전문 연희 집단이 쏟아져 나왔다. (원작 김지하, 연출 임진택)이나 (작·연출 채희완)을 무대에 올린 극단 ‘길라잡이’, 놀이패 ‘한두레’ 등이 그들이었다. 탈춤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공연도 잇따랐다. (작·연출 문무병, 놀이패 한라산)나 (작·연출 류기형, 민족예술단 우금치) 등이 그것이다. 전문 연극 집단은 (작·연출 박인배, 극단 현장)이나 (작 김인경, 연출 유순웅, 놀이패 열림터) 등의 연극을 닫힌 무대가 아닌 열린 ‘마당’으로 끌어내, 마을공동체의 축제가 되도록 시도했다. ‘마당’을 지향하고,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었다. 굿의 형식이든, 탈춤의 형식이든, 연극 형식이든 모두 ‘마당극’으로 통했다.
양과 질의 측면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마당극 운동은 1988년 전국 연합체를 결성한다. 24개 공연단이 서울 미리내예술극장에서 ‘민족극 한마당’을 개최하면서 전국 단위의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한국민족극협회, ‘민극협’의 전신)를 발족했다.
한동안 주춤하던 마당극의 기세는 1990년대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마당극은 다시 상승세를 탔다. 전국 각지에 특성화되고, 수준 높은 극단이 생겨났고, 이들은 마당극을 통해 마을공동체의 제의성·축제성을 되살리려 했다. 지방의 어떤 마당극 극단은 매년 100회 이상씩 공연하기도 했다.
‘민극협’ 주최로 1988년 시작한 전국민족극한마당(‘한마당’)은 2024년 34회째를 기록했다. ‘한마당’ 이외에도 목포우수마당극축전, 광주민중연희페스티벌, 원마루우수마당극퍼레이드, 서울우수마당극퍼레이드 등 5개의 마당극 축제가 열리고 있다. 광명에서 열린 34회 ‘한마당’은 마당극 탄생 50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가 공연된 지 50년이 흐른 것이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시작한 김민기와 젊은 문화패의 작은 날갯짓은 오랫동안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을 이끄는 태풍이 되었다. 때로는 고단한 이들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훈풍이 되었으며, 지금은 한민족 고유의 문화 형식이자 연희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