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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우상 깨뜨리는 망치를 든 글쟁이, 리영희

우상 깨뜨리는 망치를 든 글쟁이, 리영희
[사람들]
리영희에게서 오늘 우리가 배울 것 손바닥 위 작은 화면에서 하루에도 수십 건의 충격적인 소식이 쏟아진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쓴 사람조차 모르는 눈치다. 사실을 확인하기보다 자기 편에 유리한 이야기인지부터 따지는 세상이다. 이런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의심하고 확인하며 번역하고 비판하다가 평생 권력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던 언론인 리영희(1929~2010)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우상을 깨뜨리려 했다. 그런데 그 망치는 남의 머리만 겨누는 도구가 아니었다. 자기 생각까지 의심하는 데 써야 하는 것이었다.   리영희(위키피디아) 낡은 세계관 무너뜨린 통역장교 시절 리영희는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삭주군 대관동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경성공립공업학교를 거쳐 국립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그는 자원입대해 통역장교가 됐다.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전쟁은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훗날 그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믿어온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뒤집었듯, 리영희도 자기 머릿속에 자리 잡은 낡은 세계관을 무너뜨렸다. 그가 말한 우상과 이성 의 싸움은 자신에게서 먼저 시작된 셈이다.   1953년 군인 시절의 리영희. 통역장교로 7년간 복무한 뒤 기자, 학자의 길을 걸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실을 전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기자 리영희 1957년 합동통신에서 시작한 기자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964년 조선일보로 옮긴 그는 그해 11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안과 관련한 기사를 썼다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12월 불구속으로 석방됐지만 기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갔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의 처지를 보여준다. 이 사건은 한국기자협회가 창립된 뒤 처음 벌어진 필화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그는 베트남전쟁, 중국혁명, 제3세계의 정치적 변화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중국은 공산주의라는 이름만으로 악마화되기 일쑤였고, 베트남전쟁은 자유세계를 지키는 전쟁으로 선전됐다. 그는 그런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국언론과 자료를 찾아 읽고, 서로 다른 주장을 비교하고, 사실에 근거해 판단하려 했다. 그 대가도 컸다. 1969년 조선일보에서 물러났고, 1971년에는 합동통신에서 64인 지식인선언 참여 등을 이유로 해직됐다. 권력과 언론사의 압력에 밀려 직장을 잃었지만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리영희 선생이 1980년 1월 반공법 위반으로 광주교도소에서 2년 복역한 뒤 출소하면서 부인과 포옹하고 있다. 뒤는 함께 마중 나온 한승헌 변호사(지인들이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의 삶 - 경향신문) 금서목록의 단골손님, 독자들이 찾아 읽게 해 1972년 한양대학교 교수가 된 그는 본격적으로 국제정세와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발표했다. 1974년 출간한 『전환시대의 논리』는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77년에는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을 펴냈다. 『8억인과의 대화』는 당시 중국을 직접 취재한 외국기자와 학자들의 글을 번역하고 엮은 책이다. 중국을 무조건 적으로만 바라보던 한국 독자들에게 중국 사회를 다른 시각에서 이해할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불온 이념서 목록 가운데 『전환시대의 논리』가 1위, 『8억인과의 대화』가 2위, 『우상과 이성』이 5위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세 권이 모두 상위권을 차지한 것이다. 권력이 금서로 취급한 책들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널리 읽혔다. 광고비를 들이지 않고도 권력이 책의 존재를 열심히 알려준 셈이다. 1977년 11월 23일 그는 다시 구속됐다. 『8억인과의 대화』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았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80년 1월 19일 만기출소했다.   1974년 봄 ‘전환시대의 논리’ 출판기념회에서 리영희(왼쪽 둘째) 선생이 염무웅·한남철·백낙청 등 당대의 지성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리영희재단) 해직 네 번, 구속 다섯 번 1980년 3월 대학에 복직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5월 15일 교수 시국선언에 참여했다가 다시 해직됐다. 5월 17일에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이후 전두환 신군부는 그를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몰아갔다. 실제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밝히기보다, 비판적인 지식인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했던 시절이었다. 1984년에는 교과서의 반통일적 내용을 바로잡으려는 연구회 사건으로 다시 구속돼 두 달 만에 풀려났다. 그해 7월 한양대에 복직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해 이사와 논설고문을 맡았다.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신문을 만들려는 시대적 노력에 힘을 보탠 것이다. 1989년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 기획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다시 구속돼 경기도 과천에 있는 서울구치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필자는 당시 구치소로 그를 면회 갔다. 면회를 마치고 구치소 앞에서 부인 윤영자 여사가 세상에 북한에 간 것도 아니고 가려고 생각(기획)한 것만으로 사람을 가두는 게 어디 있나?”라며 노태우 정권의 부당함을 비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여간 그는 이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160일 만에 석방됐다. 그는 전부 다섯 차례 구속됐고, 아홉 차례 연행됐다. 언론사와 대학을 포함해 네 차례 해직됐다.   1989년 7월 한겨레신문의 방북 취재 계획으로 구속(국가보안법 위반)된 리영희 논설고문이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생각하는 법을 가르친 사람 리영희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특정한 정치적 주장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태도다. 첫째,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로 세상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 반공주의는 세상을 선과 악, 자유와 공산주의라는 흑백논리로만 나눴다. 그는 그 틀 자체를 의심했다. 둘째, 사실을 확인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외국 언론과 자료를 찾아 읽고 원문을 대조하고 번역하는 일은 눈에 띄지 않지만 지식인의 기본적인 책무였다. 셋째,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글쓰기는 지식과 실천을 연결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판단이 언제나 옳았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생각을 새로운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는 일이다. 리영희 자신이 평생 경계했던 것도 바로 그런 태도였을 것이다.   대외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감시와 생활고로 암울하게 지내던 80년대 초반, 청암은 거시기산악회 에서 재야인사들과 산행을 하며 위로를 얻었다. 이돈명, 리영희, 백낙청, 이호철, 변형윤, 미국 버클리대학생 피터 벡 등과 산에 올랐다(청암언론문화재단) 오늘의 한국, 리영희에게 무엇을 물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의 우상이 반공주의였다면 오늘의 우상은 무엇일까. 우리 편이 하는 말은 무조건 옳다 는 진영논리가 아닐까.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사실조차 다르게 받아들이고, 자기편의 잘못에는 눈을 감는 풍토가 그렇다. 손바닥 위 화면은 이런 태도를 더욱 부추긴다. 내가 좋아하는 주장과 비슷한 이야기만 계속 보여주는 알고리즘에서 사람들은 확신만 키운다. 다른 의견을 접하는 일은 점점 불편해진다. 리영희라면 먼저 물었을 것이다.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누가 말했는가. 반대되는 자료는 없는가.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는 국제질서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쪽을 무조건 추종하거나 다른 쪽을 무조건 적대하는 태도로는 한반도의 평화와 국익을 지킬 수 없다.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냉정하게 살피고 우리 자신의 판단 기준을 세워야 한다. 언론의 책임도 달라지지 않았다. 권력을 감시하는 일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바뀌는 원칙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같은 잣대로 권력을 평가하는 기자가 필요하다.   리영희(나무위키) 망치는 자기 머릿속 우상에도 겨눠야 한다 리영희는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오랜 재활 끝에 다시 몇 가지 작업을 마무리했고, 2005년에는 문학평론가 임헌영과의 대담을 엮은 자전에세이 『대화』를 출간했다. 2006년 9월에는 『리영희 저작집』 출간을 계기로 50년 집필 생활의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2010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그가 깨뜨리려 했던 우상은 권력의 우상만이 아니었다. 우리자신의 머릿속에 편안하게 모셔 놓은 우상도 있었다. 자기편의 생각, 익숙한 상식, 의심하기 싫은 믿음도 때로는 깨뜨려야 할 우상이다. 그러니 그의 책을 다시 펼치며 오늘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무엇을 의심 없이 믿고 있는가. 그 믿음의 근거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때는 언제인가. 혹시 내가 깨뜨려야 할 우상을 다른 사람에게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상은 대개 편안하고 그럴듯하게 생겼다. 그래서 망치는 남의 손에만 쥐어 줄 것이 아니다. 내 손으로, 내 머릿속 우상부터 깨뜨릴 용기가 필요하다.   국립 5·18민주묘지의 리영희 묘(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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