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티무르가 세계를 정복한 이유... 수호자 란 이름의 폭력

티무르가 세계를 정복한 이유... 수호자 란 이름의 폭력
[사람들]
양치기 소년, 세계의 재앙이 되다 티무르(Timur, 1320년대~1405년)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땅, 케시라는 작은 도시 근처에서 태어났다. 몽골계 유목 부족 바를라스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양이나 말을 훔치는 도적질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양을 훔치다 화살을 두 대 맞아 오른쪽 다리와 손을 다쳤고, 이 부상으로 평생 다리를 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절름발이 티무르 , 페르시아어로 테무르 랑, 서양에는 타메를란(Tamerlane)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도둑질하던 소년이 어쩌다 세계사에 이름을 남기는 정복자가 됐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재주를 그냥 좀 더 크게 키웠을 뿐이다. 1370년 무렵 발흐(Balkh)라는 도시에서 자신을 후원자로, 인심 좋은 지도자로 포장하는 데 성공한 그는 경쟁자 후사인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다. 이후 35년간 그는 페르시아, 인도, 시리아, 아나톨리아, 러시아 남부를 잇달아 짓밟으며 역사상 손꼽히는 잔혹한 정복자로 자리매김한다.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게라시모프가 복원한 티무르의 얼굴(위키피디아) 칸이 아니라 보호자 라는 자,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티무르는 칭기즈칸(Genghis Khan, 1162년경~1227년)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몽골 전통상 칸 이라는 칭호를 쓸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꼭두각시 칸을 세워놓고 자신은 아미르 , 즉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뒤에서 실권을 휘둘렀다. 명목상으로는 칭기즈 가문의 수호자 였지만, 실제로는 그 이름을 방패삼아 자기 마음대로 제국을 요리한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최고 칭호인 칼리프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이 아니었던 그는 이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아예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토성과 목성이 만나는 길일에 태어났다며 스스로를 사히브 키란 ,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비로운 존재로 포장한 것이다. 명분이 없으면 명분을 발명해서라도 정당성을 얻어내는 재주, 이것이야말로 티무르라는 인물의 진짜 무기였다. 이렇게 얻은 권력으로 그는 무슨 짓을 했나. 1398년 인도 델리를 침공해 도시를 초토화하고 주민을 학살했으며, 저항하는 노예 10만 명을 죽여 버렸다. 1401년 바그다드를 함락했을 때는 병사 한 명당 잘라온 머리 두 개씩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나중에는 죽일 사람이 없어서 병사들이 서로의 아내까지 목을 베었다는 끔찍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스파한에서는 사람 머리 1500개씩을 쌓아 탑 스물여덟 개를 만들었다는 목격담도 있다.   1405~1409년경 티무르 사후 그의 손자 칼릴 술탄이 티무르 왕조의 계보를 다룬 삽화본을 위해 제작을 의뢰한, 현존하는 티무르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위키피디아) 학자를 아끼는 학살자, 시인과의 재치 대결 그런데 이 사람이 단순한 야만인은 아니었다는 점이 티무르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그는 학자와 시인을 곁에 두고 아꼈다. 역사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과 직접 대화를 나눴고,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Hafez, 1315년경~1390년경)를 불러다 시비를 걸었다가 도리어 재치 있는 답변에 감탄해 후한 선물을 내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의 치세는 이른바 티무르 르네상스 로 불리며 중앙아시아 예술과 건축이 꽃피는 시기이기도 했다. 손자 울루그 베그(Ulugh Beg, 1394~1449)는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로 성장했고, 후대의 후손 바부르(Babur, 1483~1530)는 인도에 무굴제국을 세웠다. 그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와 그가 후원한 학문의 유산이 같은 이름 아래 공존하는 셈이다. 1405년, 티무르는 명나라 정벌을 준비하던 중 병을 얻어 지금의 카자흐스탄 남부에 있던 파라브(Farab)라는 도시, 실크로드의 요충지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분열됐지만, 그의 이미지는 지역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건국의 아버지 로 떠받들어지지만, 그가 초토화시킨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델리가 있는 아랍과 페르시아, 인도에서는 지금도 재앙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의 칸 토크타미시와의 전투 중 말 위에 탄 티무르. 1420~1440년경의 필사본(부분 채색), 제작지는 헤라트로 추정됨(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질문, 명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티무르 이야기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잔혹함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그는 실제 자격이 없는 자리를 탐낼 때마다 수호자 라는 이름을 빌려왔다. 몽골 전통의 수호자, 이슬람 신앙의 전사,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늘의 선택받은 자. 명분은 계속 바뀌었지만 목적은 하나, 자기 권력의 확장이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에서도 헌법 수호 라는 명분을 내걸고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일이 있었다. 명분과 실제 목적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 간극을 국민이 얼마나 빨리 알아채고 저지할 수 있는가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질문이다. 티무르 시대에는 그 간극을 막을 장치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헌법과 국회, 그리고 무엇보다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선 용감한 시민들이 있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 하나 새겨볼 점은 역사적 평가의 이중성이다. 같은 인물이 어느 땅에서는 영웅으로, 어느 땅에서는 학살자로 기억된다. 결국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심판할지는 승자의 서사가 아니라 피해자의 기억과 사실 그 자체에 기반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 중인 반헌법행위자에 대한 기록과 평가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 권력자가 스스로 남긴 신화가 아니라, 그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아무리 화려한 명분으로 치장해도, 결국 남는 것은 그가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가 하는 사실뿐이다.   1370년 발흐(Balkh)에서 티무르가 즉위하며 알현을 허락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 술탄 후사인 바이카라의 의뢰로 1467년 제작된 《자파르나마(Zafarnama)》에서(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