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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예수와 열두 제자 뒤의 무리 를 주인으로 세운 안병무

예수와 열두 제자 뒤의 무리 를 주인으로 세운 안병무
[사람들]
성경의 단역을 주연으로 올리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대개 예수와 열두 제자만 쳐다본다. 안병무(1922~1996)는 그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자꾸 눈에 걸렸다. 마가복음에 줄곧 얼굴을 내미는 그리스어 오클로스(ὄχλος) , 곧 무리 다. 학계는 이 무리를 영화로 치면 지나가는 단역 쯤으로 다뤘다. 안병무는 단역 명단을 들고 감독실로 쳐들어가 따졌다. 예수가 먹고 자고 병을 고쳐주며 함께 다닌 이들이 바로 이 무리인데 어찌 배경이냐는 것이다. 그가 본 무리는 로마의 압제와 성전의 수탈에 눌린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우리말로 민중 이라 부르며 신학의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으로 세운 것이 민중신학이다.   안병무(http://moran.or.kr/heros/1357) 만주 벌판에서 독일 강의실까지 안병무는 1922년 평안남도에서 한의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 살 때 가족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고, 캐나다 선교부가 세운 중학교에서 기독교를 만났다. 194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해방 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배웠고, 중앙신학교에서 사회학과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1956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떠났다. 스승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의 수제자 귄터 보른캄(Günther Bornkamm, 1905~1990)이었다. 박사논문 주제가 걸작이다. 공자와 예수의 사랑 이해를 비교분석했다. 동양성인과 서양성인을 한 책상에 앉혀 놓고 누가 사랑을 더 아느냐고 따진 셈인데, 두 분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니 논문은 무사히 통과했다. 1965년에 귀국했으니 유학만 거의 10년이었다. 생전에 필자와의 인터뷰 중 유학기간 10년 동안 한국에 계신 홀어머니를 한 번도 뵙지 못해서 어머니가 너무나 그리웠다고 회고했다. 필자도 영국에 유학한 6년 동안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한 번도 뵙지 못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의 얘기로만 들리지 않았다.   귄터 보른캄(Günther Bornkamm (1905-1990), scholar - 4 Enoch: : The Online Encyclopedia of Second Temple Judaism, and Christian and Islamic Origins) 전태일의 불꽃, 유신의 독방 1970년 한국신학대학 교수가 된 그해 11월,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1948~1970)이 몸을 불살랐다. 안병무는 이 죽음에서 남을 살리려는 민중의 구원자를 보았고, 예수는 민중 속에서 끝없이 되살아난다고 고백했다. 1973년에는 독일교회의 도움으로 한국신학연구소를 세워 계간 『신학사상』을 펴냈다. 그러나 독재자 박정희 정권의 유신시대는 신학자를 가만두지 않았다. 1975년 6월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함석헌(1901~1989), 윤보선(1897~1990), 김대중(1924~2009), 서남동(1918~1984)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에 이름을 올렸다. 그 값으로 1977년 2월까지 옥살이를 했다. 그는 감옥에서 민중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10년에 걸려 쓴 박사논문보다 독방 한 칸이 더 많이 가르친 셈이다. 수업료도 받지 않았으니 유신정권은 본의 아니게 신학교육의 후원자 노릇을 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다시 해직됐다. 두 번 쫓겨나고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에서 열린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한 안병무(왼쪽 두 번째)와 함석헌 (왼쪽 세 번째) ⓒ함석헌기념사업회 무리에게 말을 돌려주다 안병무는 『민중신학 이야기』(1987), 『갈릴래아의 예수』(1990), 『안병무전집』(1993)을 남기고 1996년 10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서남동과 함께 1970년대에 민중신학의 터를 닦았고, 그 뿌리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에 닿아 있다. 이 신학은 교회 담장 안에서만 맴돌지 않았다. 군사독재 아래서 교회가 설교단을 내려와 노동자와 억눌린 이웃 곁에 서야 하는 까닭을 성경의 말로 설명해 주었다. 훗날 여성신학의 물음도 받아들여 생명과 살림으로 생각의 폭을 넓혔다.   안병무(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201810151322035220) 지금 한국에서 안병무를 읽는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의 밤, 국회로 달려가 군용차량 앞을 막아선 이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마가복음식으로 말하면 오클로스다. 역사책에는 주연 몇 사람의 이름만 남겠지만 그 밤을 지킨 것은 단역들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전광훈 등 일부 교회는 십자가를 흔들며 계엄을 감싸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믿으면 복 받아 부자 된다는 장사로 재미를 보던 이들이 하필 권력 편에 설 줄은 몰랐다는 얘기가 아니다. 예수가 서 있던 줄이 어디였는지 안병무라면 물었을 것이다. 여기서 배울 것이 몇 가지쯤 보인다. 첫째, 오늘의 오클로스가 누구인지 묻는 일이다. 국민 이라는 넓은 이름 아래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청노동자, 배달노동자, 이주노동자, 돌봄노동자다. 선거철마다 민생 은 외치지만 민중 은 부르지 않는다. 둘째, 말이 낡아 보인다고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중 이라는 말이 어색해졌다면 새 말을 찾아야 한다. 안병무는 말을 먼저 만들지 않고 사람 곁에 먼저 섰고, 말은 그 뒤에 따라왔다. 셋째, 광장의 힘이 제도 안에서 다시 단역으로 돌려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선거가 끝나면 주연은 정당과 후보가 되고 광장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예산을 짜고 법을 고칠 때 당사자를 맨 앞 책상에 앉히는 일이 안병무가 마가복음에서 읽은 무리가 주인 이라는 말의 오늘판일 것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 법정에서 증인석을 지키는 이들은 늘 방청석 맨 뒷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다.   안병무(https://www.khan.co.kr/article/202210041429001)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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