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학생 명부’ 환영도 비판도 못하는 러시아 [국제]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세르비아에서 14년 넘게 이어진 부치치 대통령의 집권이 끝났다. 10월 25일 총선에서 학생 시위로 출발한 학생 명부 가 부치치 전 대통령의 여당 연합을 이겼다. 세르비아 선거관리위원회의 잠정 집계에 따르면 학생 명부는 52.71%, 부치치 측은 39.17%를 얻었다. 의석도 각각 140석과 104석이다. 부치치는 (많은 전문가들이 놀랍게도) 곧바로 패배를 인정했다. 이번 선거는 세르비아 국내 정치뿐 아니라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에서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세르비아는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하면서도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부치치는 그 두 방향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한 대표적인 유럽 정치인이었다.
EU 가입 추진하면서도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 유지
부치치는 오랫동안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한편으로는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예전부터 추진해 왔다. EU는 세르비아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고 많은 세르비아인에게 유럽은 일자리와 미래의 기회로 다가온다. 다른 한편으로 부치치는 러시아와 정치, 경제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세르비아는 유럽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런 제재 속에서도 러시아와의 직항 노선을 계속 유지해 온 유일한 유럽 국가가 바로 세르비아다. 푸틴 대통령도 이를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실각한 알렉산다르 부치치
이런 외교는 세르비아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세르비아와 러시아는 종교와 문화적으로 깊은 유대 관계를 맺어 왔다. 두 나라 모두 슬라브계 국가로 언어가 비슷하고 정교회를 믿는다. 역사적 교류도 오래됐다. 러시아는 제정 시대부터 세르비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90년대 코소보 문제에서도 세르비아의 편을 들었다. 반면 오늘날 세르비아의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는 EU다. EU는 세르비아가 앞으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정치, 경제적 공간이기도 하다. 역사와 문화면에서 러시아와 공통점이 더 많지만 세르비아 역시 유럽의 일부다. 세르비아인들의 정체성도 러시아와의 유대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부치치는 어느 한쪽을 완전히 선택하지 않으려고 애를 굉장히 많이 썼다. 유럽에는 EU 가입 의지를 보여주면서도 러시아와도 대화의 문을 열어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런 외교는 유럽에서 더 많은 의문을 불러왔다. 특히 EU가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는 상황에서 가입 후보국인 세르비아가 모스크바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치치의 친러 성향도 점점 약화돼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 동원 피하려는 러시아인들의 피난처된 세르비아
세르비아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 러시아 사람들에게 더욱더 특별해졌다. 세르비아는 푸틴 정권에 우호적이었지만 동시에 푸틴 정권에 반대하거나 전쟁과 동원을 피해 러시아를 떠난 러시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이주해 간 나라다. 이 점은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러시아 정부에 우호적인 나라가 그 정부를 떠난 러시아인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세르비아는 익숙한 문화와 언어, 비자가 필요 없는 편리한 입국 조건, 러시아인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갖춘 곳이었다. 전쟁 이후 조지아나 카자흐스탄에 머물다가 세르비아로 옮긴 이들 중에는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기관에 따라 평가가 다르지만 2022년 2월부터 최소 7만 4000명의 러시아인이 세르비아에서 임시 거주를 등록했다는 통계자료가 있다. 러시아 sns에서 세르비아는 ‘반전쟁 성향의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피난처’로 등장했다.
부치치의 패배는 유럽에서 친러 성향의 정치인들의 입지가 줄어드는 흐름 속에서 일어났다. 앞서 2026년 4월 헝가리에서는 빅토르 오르반이 선거에서 패했다. 오르반은 EU 안에서 ‘푸틴의 강아지’라는 치욕스러운 호칭을 받을 정도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이런 오르반이 물러난 뒤 부치치는 유럽에서 모스크바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정치인 가운데 한 명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부치치도 선거에서 패했다. 푸틴이 유럽에서 자기 아젠다를 밀어붙일 수 있는 정치적 파트너가 한 명 더 없어진 셈이다.
물론 오르반과 부치치의 패배가 곧바로 러시아의 영향력 상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같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헝가리는 EU 회원국이지만 세르비아는 가입 후보국일 뿐이다. 무엇보다 부치치의 패배는 세르비아 내부 상황 때문이지 세르비아 국민 전체의 대러 태도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다.
부치치의 퇴장과 새 정부 탄생은 러시아에 불리한 변화이지만 세르비아의 대러 정책이 곧바로 뒤집힐 거라고 보기 어렵다. 새 정부 역시 EU 가입이라는 목표와 러시아와의 오랜 관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지만 워낙 명확한 지도자가 없고 분명한 외교 노선이 안 정해진 세력이라 미래 예상은 사실상 힘든 상황이다.
총선 결과 세르비아 의회의 과반 의석을 차지한 학생 명부 정당 대표들이 29일(현지시간) 수도 베오그라드의 선구자 공원(Pionirski Park)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새 정부 운영 계획 등을 밝히고 있다. 2026.10.29. 로이터 연합뉴스
세르비아 새 정치세력 등장이 혼란스러운 러시아 언론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 언론의 반응이다. 친정부 언론은 부치치의 패배를 두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친러 성향의 부치치가 패배하자 마치 세르비아가 몰락한 것 처럼 묘사하면서도 학생 명부 가 반러 성향인지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만큼 승자들을 비판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새 정부를 비판해야 할지 우호적으로 평가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애매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다. 그동안 친러 국가인 세르비아를 높이 평가해 왔고 그곳에 러시아 국민도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친정부 언론이 더욱 망설이는 이유는 바로 학생 명부 의 성격에 있다. 뚜렷한 지도자 없이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부패한 권력을 몰아내고 선거를 통해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은 러시아 정부가 자국민에게 절대 전하고 싶지 않은 메시지다. 헝가리의 경우에는 사악한 미국과 러시아 혐오를 부추기는 못된 유럽이 선거에 개입해 자신들에게 불리한 후보를 떨어뜨렸다”고 선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경우에는 그런 주장을 내세우기 어렵다.
이번 세르비아 선거는 그 자체로도 의미 있고 흥미롭지만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라는 관점에서도 특별하다. 세르비아는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고 별다른 관계가 없는 동유럽 국가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요즘에는 세르비아 등 세게 곳곳에 이루어지는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교수 abnormal.ily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