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와 담배꽁초 맞으며 걸은 여의사 앤 프레스턴 [사람들] 1858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남자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남자와 나란히 진료실에 들어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터키 여인들이 온몸을 가리지 않고 남편과 형제 손을 잡고 사원에 걸어가는 것을 보는 편이 낫겠다.”
당시 여의사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 풍기를 어지럽힌다는 논리였다. 이 발언을 받아친 사람이 바로 앤 프레스턴(Ann Preston, 1813~1872)이다. 그녀는 미국 최초로 의과대학 학장에 오른 여성이며, 지금도 미국여성 의학교육의 시조로 불린다.
1867년경의 앤 프레스턴(위키피디아)
아홉 남매 중 홀로 남은 딸
프레스턴은 1813년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그로브의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이머스 프레스턴(Amos Preston)은 노예제 폐지를 설파하던 퀘이커 목회자였고, 아홉 남매 중 딸은 셋이었으나 성인까지 살아남은 딸은 앤뿐이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어린 프레스턴은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일과 간병을 떠맡았다. 오빠 여섯을 뒷바라지하며 그녀가 깨달은 것은 단순했다. 여자의 몸과 삶에 대해 정작 여자 자신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동네 퀘이커 의사 밑에서 도제로 의학을 익히며 여성들에게 위생과 생리를 가르치는 강좌를 열었다.
앤 프레스턴 초상화(위키피디아)
문을 두드리다 아예 문을 만들다
1849년 프레스턴은 여러 의과대학에 지원했으나 번번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듬해인 1850년, 퀘이커 사업가 윌리엄 J. 멀른(William J. Mullen, 1805~1882)을 비롯한 필라델피아 유지들이 세계 최초로 여성만을 위한 의과대학을 세웠다. 첫해 입학생 여덟 명 중 다섯 명이 퀘이커교도였고 프레스턴도 그중 하나였다. 1851년 졸업 후 그녀는 교수진에 합류했고 1853년 위생학·생리학 교수가 되었다.
프레스턴의 다음 목표는 여성병원 설립이었다. 1858년 필라델피아 의사회는 여성의사들이 시내 병원 임상실습에 아예 발도 들이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실습 없이는 제대로 된 의사를 길러낼 수 없었다. 프레스턴은 손수 마차를 몰고 인근 퀘이커농가들을 돌며 모금을 다녔다. 그러던 중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며 학교가 문을 닫는 위기가 왔지만, 그녀는 모아둔 돈으로 동료의사 에멀린 호턴 클리블랜드(Emeline Horton Cleveland, 1829~1878)를 프랑스 파리로 유학 보내 산부인과를 배우게 했다. 같은 해인 1861년 프레스턴은 아예 여성병원을 설립했고, 1863년에는 간호학교까지 세웠다.
윌리엄 J. 멀른(William James Mullen (1805-1882) - Find a Grave Memorial)
돌멩이와 담배꽁초를 맞으며 병원복도를 걷다
1866년 프레스턴은 미국최초의 여성 의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그의 재임 중 이 학교는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의사와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의사를 배출했다. 그러나 진짜 싸움은 그다음이었다. 여학생들은 필라델피아의 대형병원 임상강의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프레스턴은 끈질기게 병원 문을 두드렸고, 1868년과 1869년 각각 블록클리 병원과 펜실베이니아 병원이 마침내 여학생 입학을 허락했다.
첫날 풍경은 참혹했다. 여학생들이 강의실로 들어서자 남학생들이 야유를 퍼붓고 은박지와 담배꽁초를 던졌다. 여학생들은 묵묵히 실습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돌팔매까지 맞았다. 여론은 오히려 이 추태를 목격한 뒤 여학생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프레스턴은 이후 관절 류머티즘을 앓으면서도 강단과 병원 진료를 놓지 않다가 1872년 세상을 떠났다.
앤 프레스턴(브리태니카)
한국에서 곱씹어볼 대목
프레스턴의 이야기가 160년 전 미국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지금 한국에서도 비슷한 다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의사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대립
로스쿨 도입 당시 기존 법조계의 반발
타투이스트 합법화를 놓고 의료계와 문신업계가 벌이는 다툼
원격의료·비대면 진료를 둘러싼 의사협회의 반대
세무사·회계사·변호사 사이 업무영역 다툼
이런 논쟁에서 오간 언어들을 떠올려보면 프레스턴 시대 남자의사들의 논리와 놀랍도록 닮았다. 의료의 질이 걱정된다는 말, 전통과 체계가 무너진다는 말, 결국 소비자와 환자를 위한 것이라는 말. 정작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집단이기주의, 새로운 사람이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프레스턴의 싸움에서 가장 눈여겨볼 지점은, 그녀가 논리로 상대를 이기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냥 모금을 통해 병원을 하나씩 짓고, 학생을 한 명씩 졸업시키고, 지속적인 모금활동을 통해 돈을 한 푼씩 꾸준히 모았다. 남자의사들의 조롱은 말로 받아치기보다 조용히 결과로 눌러버렸다. 어떤 제도든 문을 걸어 잠근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를 지키는 논리를 우아하게 포장한다. 그 포장을 벗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논쟁이 아니라, 문 반대편에서 계속 실력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의 여러 직업 간 갈등에서도 곱씹어볼 만한 교훈이다.
앤 프레스턴(Ann Preston, M.D., Historical Marker - Clio)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