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월드컵의 북한, 2026년의 카보베르데 [뉴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이번 2026년 북중미 월드컵 조별 리그에서 스페인, 우루과이, 사우디 아라비아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8강에 오른 카보베르데가 4일 아르헨티니와 혈전을 펼친 끝에 3-2로 아깝게 패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이며 FIFA 랭킹 67위의 카보베르데가 스페인 우루과이 등 전통적 축구 강국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32강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세계 축구팬들을 놀라게 한 이변으로 꼽히고 있으며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강력한 우승 후보의 하나인 아르헨티나와 연장전까지 간 혈전은 지금까지 나온 이번 대회 최고의 명승부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카보베르데 축구 국가대표팀 응원단과 선수들이 6월 26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바아와의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조 2위로 32강 진출을 확정짓고 기뻐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우승 확률 20% 강적에 맞선 확률 1%의 북한
이에 못지않은 명승부와 이변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66년 7월 19일 오후 7시 30분, 영국 미들즈브러 에어섬파크. 잉글랜드 월드컵축구 4조 5번째 경기에서 북한과 이탈리아전에서 벌어졌다. 이탈리아는 1934년과 1938년 월드컵에서 연속 우승한 전통의 강호인 반면 북한은 16개 본선 참가국 중 최약체로 꼽혔다.
영국 대니얼 고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천리마축구단’ 포스터. ‘월드컵 사상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당시 FIFA(국제축구연맹)가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세 대륙에 본선 진출 티켓을 달랑 한 장만 주자 아프리카는 이에 반발해 집단 보이콧했다. 한국도 북한과의 대결이 부담스러워 불참한 가운데 북한은 최종 2연전에서 호주를 연파해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것이다. 도박사들이 점친 우승 확률도 이탈리아는 20%로 3위였고 북한은 1%로 최하위였다.
이날 경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1차전에서 칠레를 2-0으로 가볍게 눌렀으나 소련과의 2차전에서 0-1로 패했다. 그래도 최약체와의 경기를 남겨놓고 있어 8강 토너먼트 진출을 의심하지 않았다. 너무 싱거운 승부를 예상해서인지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1만 7000여 명에 불과했다.
북한은 소련과의 1차전에서 0-3으로 무너졌다. 두 번째 칠레전에서도 페널티킥을 허용해 0-1로 끌려가다가 후반 43분 박승진이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뜨려 1-1로 비겼다. 아시아 팀이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올린 승점이었다. 8강 토너먼트에 올라가려면 반드시 이탈리아를 눌러 승점 2점(1994년 미국 월드컵부터 승리 시 승점 3점으로 변경됨)을 추가해야 했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 선수들은 작은 키의 열세를 극복하려고 동료 선수들의 도움을 받아 점프하는 기술을 구사했다. 지금은 FIFA 규정상 금지돼 있다.
경기 초반 흐름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결정적인 세 번의 찬스에서 날린 슛이 잇따라 북한 골기퍼 리찬명의 선방에 막히거나 골대를 빗나가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북한의 스트라이커 박두익을 마크하던 이탈리아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는 발빠른 미드필더 박승진에게 무리한 태클을 걸었다가 오히려 자신이 크게 다쳐 퇴장했다. 당시엔 선수 교체가 허용되지 않아 부상으로 빠져도 대체 선수를 투입할 수 없었다.
북(축구)에 차이고 남(복싱)에 매 맞은” 이탈리아
경기 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전담 마크맨이 없어지자 ‘동양의 진주’란 별명의 박두익은 펄펄 날았다. 전반 41분, 센터서클 부근에 높이 뜬 공을 북한의 풀백 하정원이 헤딩으로 따내 페널티박스 쪽으로 흘려주자 박두익이 쇄도하며 오른발 논스톱 슛으로 골문에 차넣었다. 전광판에는 1-0의 스코어가 새겨졌다.
후반 들어 이탈리아는 줄기차게 북한 골문을 위협했으나 밀집 수비에 가로막혀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빗장(카테나치오) 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가 자신이 즐겨 쓰던 무기에 당하는 꼴이었다. 북한의 빠른 역습에 추가골을 내줄 뻔한 순간도 있었다. 결국 박두익의 선제골은 결승골이 됐고, 북한은 아시아 팀 최초의 승리를 거두며 소련에 이어 조2위로 8강 토너먼트에 올랐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1-0으로 누르고 8강에 진출하면서 선수와 임원들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충격적인 패배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성난 모국 팬들을 피해 귀국 장소를 제노바로 바꿔 한밤중에 몰래 들어왔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부 팬들이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선수단에게 토마토와 달걀을 던졌다. 에드몬도 파브리 감독은 1년간 근신 처분을 받았고 주축 선수 3명도 대표팀에서 영구 퇴출됐다.
불과 한 달 전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가 한국의 김기수에게 판정패해 챔피언 타이틀을 내줬기 때문에 남북한에게 연거푸 수모를 당한 셈이 됐다. 이탈리아 언론은 북에 차이고 남에게 매 맞았다”고 썼다.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과 이탈리아가 맞붙었을 때 붉은악마 응원단이 카드 섹션으로 ‘AGAIN 1966’이란 문구를 만든 것도 북한과 이탈리아 경기를 재연하자는 취지였다. 응원 구호대로 이탈리아는 북한에 패한 지 36년 만에 한국에도 일격을 당해 8강 진출이 좌절됐다.
포르투갈과 8강전서 3-0으로 앞서다 에우제비우 활약에 무릎
북한은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에서 포르투갈을 만나 전반전 중반까지 더욱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다. 경기 시작 1분 만에 박승진이 선제골을 터뜨린 데 이어 전반 21분과 22분에 리동운과 양성국이 잇따라 추가골을 넣어 3-0으로 앞서간 것이다. 월드컵 관계자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관중들도 넋이 빠진 듯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흑표범이라고 불리는 특급 골잡이 에우제비우가 있었다. 전반 27분 첫 만회골을 터뜨린 데 이어 42분 페널티킥으로 2-3까지 따라붙었다. 북한은 쫓기는 입장이었으나 국제경기 경험이 부족해 시간 끄는 방법도 몰랐다. 후반 11분 동점골을 허용하고 3분 뒤 페널티킥으로 역전골까지 내줬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전 북한과의 경기에서 맹활약하는 포르투갈의 스트라이커 에우제비우. 2014년 1월 5일 사망했다.
에우제비우는 연속 4골을 기록했다. 후반 33분에는 주제 아우구스토가 쐐기골을 터뜨려 포르투갈은 5-3 역전승을 거뒀다. 북한의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포르투갈은 준결승에서 잉글랜드에 패하고 3·4위전에서 소련을 눌렀다. 에우제비우는 이 대회에서 모두 9골을 넣어 득점왕을 차지했다.
준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귀국길에 오른 북한 선수단은 평양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일성은 선수단을 주석궁으로 초대해 감독·코치와 선수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8강 진출의 일등공신인 박두익은 북한 대표팀 감독과 축구연맹 처장 등을 역임했다. 영국의 대니얼 고든은 2002년 북한을 방문해 그때의 주역들을 인터뷰하고 기록 필름 등을 입수해 다큐멘터리 ‘천리마축구단’을 제작하기도 했다.
2002년 6월 21일자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에 실린 1966년 8강 영웅들의 사진과 기사. 당시 20대였던 선수들이 이제는 할아버지로 변했다. 왼쪽 세 번째가 박두익.
미국이 잉글랜드 이겼다는 소식 못 믿어 오보 소동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대이변이 일어났다. 축구 종가를 자처하는 잉글랜드는 FIFA와의 갈등으로 참가를 거부하다가 20년 만에 처음 출전해 벨루오리존치에서 미국을 상대했다. 미국 대표팀은 아마추어와 준프로 선수로 급조된 약체였으나 예상을 깨고 1-0으로 잉글랜드를 눌렀다.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언론사들조차 현지 특파원이 오타를 냈다고 여겨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이긴 게 아니라 잉글랜드가 미국을 10-0으로 제압했다는 오보를 냈다가 정정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이쯤 되면 언더독이 톱독을 이긴 정도가 아니라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자이언트 킬링이라고 할 만했다.
미국과 북한의 사례는 역대 월드컵 이변 가운데 단골로 거론된다. 지난 5월 19일 글로벌 스포츠매체 디애슬레틱은 이 두 경기와 함께 1990년 이탈리아대회 카메룬 대 아르헨티나(1-0), 2002년 한일대회 세네갈 대 프랑스(1-0), 2022년 카타르대회 사우디아라비아 대 아르헨티나(2-1) 경기를 월드컵 역대 이변 톱 5에 꼽았다. 이밖에 1982년 스페인대회 알제리 대 서독(2-1), 1998년 프랑스대회 노르웨이 대 브라질(2-1), 2018년 러시아대회 한국 대 독일(2-0) 등도 자주 입에 내린다.
이번 북중미대회도 숱한 이변을 낳고 있다. 카보베르데가 거둔 놀라운 성적 외에도 파라과이가 32강전에서 독일과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이긴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축구 팬들은 우리나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0-1로 져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도 이변으로 여기고 있다.
6월 29일(현지시간) 독일과 파라과이의 32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독일이 패배하자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가 기뻐하는 파라과이 선수들을 뒤로 하고 퇴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러나 결승전으로 다가갈수록 이변은 줄어든다. 1930년부터 지난 2022년까지 22회를 거쳐오는 동안 월드컵 우승국은 브라질·독일·이탈리아·아르헨티나·우루과이·프랑스·잉글랜드·스페인 8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축구공은 둥글기 때문에 이변이 많이 벌어지는 것일까?
월드컵을 포함한 각종 스포츠대회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팀이나 선수를 가리는 취지로 열리지만 만일 이변이 없다면 흥미는 반감될 것이다. 무명 선수가 관록의 1인자를 꺾거나 약팀이 강팀을 누르는 언더독의 반란은 스포츠 영화나 만화의 단골 소재다. 실제 경기에서는 만화나 영화보다 더 극적인 반전이 얼마든지 일어난다.
축구는 경기를 야외에서 치르고 체력 소모량이 많아 기후, 시차, 이동거리, 경기장 조건, 선수 컨디션 등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월드컵 개최 대륙에서 우승팀이 나오는 전통이 거의 지켜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강팀일수록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많아 조직력을 다질 시간이 부족하므로 토너먼트보다 조별리그 경기에서 이변이 많이 나온다.
FIFA 211개 회원국 간에 실력이 평준화한 것도 월드컵 축구에서 이변이 잦은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축구는 규칙이 간단하고 장비나 시설이 거의 필요 없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즐긴다. 리그마다 선수들의 스카우트 경쟁도 치열해 나라별 수준 차이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전통의 강호가 첫 출전한 신예에게 망신을 당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강인 선수가 6월 24일(현지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A조 3차전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 0-1로 패한 뒤 아쉬워하고 있다. 6. 25 연합뉴스
축구의 인기가 유독 높은 것도 스포츠 애호가들이 이변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키우는 요인이기도 하다. 비인기 종목의 경우에는 대이변이 일어난다 해도 일반인은 어느 나라가 강팀이고 약팀인 줄 알지 못해 이변을 실감하기 어렵다. 반대로 웬만한 축구 팬들은 역대 월드컵 성적이나 나라 간 전적 등을 훤하게 꿰고 있기 때문에 작은 이변도 사람들 입에 훨씬 자주 오르내린다.
북중미 월드컵도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다. 비록 한국은 32강 토너먼트 진출이 좌절됐지만 월드컵은 계속되면서 연일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로 축구 팬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나라가 이변의 주인공과 희생양이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