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인간보다 오래 기억한다 [사람들] 리처드 파워스(Richard Powers, 1957년 6월 18일 출생)는 현대 과학 기술의 영향을 탐구하는 작품을 쓰는 미국의 소설가이다. 그의 소설 에코 메이커 는 2006년 전미 도서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1. 나무에서 시작되는 아홉 사람의 이야기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overstory)는 나무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소설이다. 나무는 오랫동안 인간 문학에서 삶의 배경이나 상징으로 등장했다. 생명의 성장과 쇠락을 보여주는 존재이거나 고향과 추억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나무는 인간의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속도로 살아가며, 인간이 미처 이해하지 못한 생명의 관계망을 이루는 존재로 등장한다.
2018년 출간된 이 소설은 2019년 퓰리처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작품의 제목은 숲에서 아래층 식생 위로 펼쳐지는 나무의 수관층을 가리킨다. 동시에 개별 생명의 이야기를 넘어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더 큰 이야기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소설은 나무와 인연을 맺은 아홉 사람의 삶을 여러 갈래로 펼쳐 보인 뒤, 서로 무관해 보이던 이야기들이 숲을 중심으로 교차하도록 구성한다.
각 인물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고 살아간다. 미국밤나무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니컬러스 호엘, 전쟁을 경험하고 숲의 파괴를 목격하는 더글러스 파블리체크, 나무의 생태를 연구하는 과학자 패트리샤 웨스터퍼드, 거대한 삼나무를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올리비아 밴더그리프트와 니컬러스 등이 주요 인물이다. 이들의 삶은 가족사와 직업, 개인적 상처와 우연한 만남을 통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나무를 매개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작가는 인물들을 처음부터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아 놓지 않는다. 각자의 삶을 충분히 펼쳐 보인 뒤 독자가 그 사이의 연결을 발견하도록 한다. 이 구성은 숲의 생태적 질서를 닮았다. 숲은 하나의 나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종과 개체가 함께 살아가며, 각각의 생명은 자신이 속한 환경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다. 소설의 여러 이야기도 독립적인 생애이면서 동시에 더 큰 생명의 이야기 안에 놓여 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개별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선택이 다른 생명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오버스토리』의 서사는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는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크기를 확장한다.
2. 인간의 시간과 나무의 시간
소설의 첫 부분에서 니컬러스 호엘의 가족사는 미국밤나무 한 그루와 연결된다. 호엘 가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나무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가족의 삶과 역사가 사진 속 나무의 변화와 함께 축적된다.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으며 시대는 바뀌지만, 나무는 인간의 기억을 넘어서는 시간을 품고 서 있다.
이 이야기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흔든다. 인간에게 백 년은 한 세대가 살아내기에도 긴 시간이다. 반면 오래 사는 나무에게 인간의 여러 세대는 긴 생애의 일부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지만, 나무의 생애를 기준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역사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 문명의 발전과 성취를 자랑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계절을 거듭하며 성장하고, 숲은 인간의 계획과 무관하게 생태적 변화를 겪는다.
미국밤나무의 운명에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자연에 남긴 상처도 담겨 있다. 북미의 미국밤나무는 외래 병원균의 유입으로 광범위하게 고사하면서 생태계와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를 겪었다. 나무의 소멸은 한 종의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그 나무에 의존하던 생물과 사람들의 생활 방식까지 영향을 받는다. 생명의 역사는 개별 종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관계가 얽힌 역사다.
패트리샤 웨스터퍼드의 이야기는 나무를 이해하는 방식에 또 다른 시선을 더한다. 그녀는 나무가 인간의 관찰 대상이나 목재 생산의 수단으로만 취급되는 현실에 의문을 품고, 나무의 생태적 관계를 연구한다. 나무는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토양과 균류, 주변 식물과 환경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숲을 개별 나무의 집합으로만 바라보면 이러한 관계를 놓치게 된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변화와 즉각적인 결과를 중시한다. 경제적 성과는 수치로 측정하고, 효율성은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는지로 평가한다. 그러나 나무의 성장은 인간의 조급함에 맞춰 진행되지 않는다.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며 생태계의 일부가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나무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연의 속도를 인간의 기준에 맞추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3. 숲을 상품으로 보는 문명
『오버스토리』의 중심 갈등은 숲을 살아 있는 생태계로 바라보는 시선과 경제적 자원으로 취급하는 시선 사이에서 발생한다. 벌목 산업은 나무를 목재로 환산하고, 숲의 가치는 생산량과 수익성으로 측정한다. 거대한 나무를 베어내는 일은 경제활동의 한 과정으로 설명되지만,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생태적 관계는 계산서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다.
이러한 충돌은 더글러스 파블리체크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전쟁을 경험한 그는 살아남은 뒤 나무를 심는 일에 참여한다. 그러나 숲을 복원하려는 노력과 벌목을 통해 숲을 파괴하는 현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나무를 심는 일은 미래를 위한 행위이지만, 한편에서 오랜 세월 형성된 숲이 사라진다면 어린나무를 심는 것만으로 그 손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
숲은 나무의 수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축적된 토양과 수분의 흐름,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 종 사이의 관계가 함께 숲을 이룬다. 따라서 오래된 숲을 베어내고 같은 수의 나무를 새로 심었다고 해서 생태적 손실이 복구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축적과 생명의 다양성은 단순한 숫자로 대체할 수 없다.
패트리샤의 연구는 나무를 인간과 무관한 개별 존재로 이해하는 관점에 도전한다. 나무들은 뿌리 주변의 균류와 토양을 비롯한 생태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다만 이러한 관계를 인간 사회의 협력이나 의사소통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식물의 생리와 생태에 관한 과학적 발견을 인간의 감정과 의도를 나무에 투영하지 않고 이해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나무가 인간과 똑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해 온 생명의 경계보다 자연의 관계가 훨씬 복잡하다는 점이다.
소설은 환경 파괴를 개인의 탐욕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벌목과 개발은 경제적 이익, 일자리, 소비자의 수요, 사회의 성장 논리와 얽혀 있다. 자연을 이용하는 구조에 참여하면서 그 결과를 외면하는 일은 특정한 악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편리함을 누리는 방식과 경제적 성공을 평가하는 기준도 생태적 파괴와 연결될 수 있다.
이 작품이 문명에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개발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생명과 생태계의 손실은 누가 책임지는가. 숲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벌목 현장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연을 무한히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의 구조까지 살펴야 한다.
4. 나무를 지키려는 사람들
올리비아 밴더그리프트와 니컬러스는 거대한 삼나무를 지키기 위한 환경운동에 참여한다. 나무와 숲에 관한 관심은 이들에게 개인적인 취향이나 감상의 대상을 넘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문제가 된다. 이들은 오래된 나무가 벌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서고, 자신들의 선택이 일상과 관계에 미칠 결과를 감수한다. 이 과정에서 소설은 환경운동을 낭만적인 영웅담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자연을 지키려는 행동에는 위험과 갈등이 따르고, 개인의 삶은 운동의 목표와 충돌할 수 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행동해야 하는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선택한 수단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도 남는다. 환경 파괴에 저항하는 일은 도덕적 확신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사진 pixavay.com
그럼에도 인물들의 행동은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나무를 바라보는 일에서 출발한 관심이 숲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회적 문제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자연이 파괴되는 현실에 맞서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감수성이 책임으로 이어지려면 자신의 삶과 이해관계까지 돌아보아야 한다.
물론 모든 독자가 이들의 선택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작중 인물들의 행동은 환경운동이 마주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드러내며, 생태적 목적이 언제나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생각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환경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무조건 영웅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이상주의자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러한 선택에 이르렀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이 작품에서 숲을 지키는 일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묻는 과정이다. 인간의 생존과 경제활동이 자연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얻는 이익을 발전의 전부로 평가할 수는 없다. 숲을 보전하는 일은 다른 생명을 보호하는 동시에 인간 사회가 지속될 조건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 감소를 바라보는 데도 의미가 있다. 생태적 문제는 개인의 선한 마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연을 훼손하는 개발에 대한 제도적 통제, 생태계 보전 정책, 생산과 소비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정책의 부담이 노동자와 지역 주민, 사회적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연을 지키는 일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5. 숲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오버스토리』를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다. 우리는 흔히 숲을 찾아간다고 말한다. 산에 오르고 나무 그늘에 앉으며 자연 속에서 휴식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은 자연 바깥에서 숲을 방문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와 물, 발밑의 흙과 몸을 지탱하는 음식은 모두 다른 생명의 활동과 지구의 순환에 기대고 있다. 숲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숲 안에 있다.
사진 pixavay.com
이러한 깨달음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방식도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소유하고 관리하며 자신의 필요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왔다. 나무는 목재가 되고, 강은 개발의 대상이 되며, 땅은 경제적 가치를 계산하는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자연의 가치를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로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이 지닌 고유한 존재 의미를 놓치게 된다. 나무는 인간에게 그늘을 제공하기 때문에만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숲은 경제적 이익을 만들어내기 때문에만 보전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삶과 자연의 삶을 서로 대립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 역시 먹고살아야 하며, 집과 일자리와 안전한 생활환경을 필요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다른 생명의 터전을 무조건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개발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고 그로 인한 피해는 누가 감당하는지, 오늘의 편리함을 위해 미래 세대가 살아갈 조건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야 한다. 오래된 숲을 지키는 문제는 나무 몇 그루를 남길 것인가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며, 무엇을 발전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나는 생태적 감수성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되,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는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숲의 파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는 주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않다. 멸종 위기에 놓인 생명을 보호하면서도 환경오염과 기후위기의 부담을 더 크게 떠안는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생태적 책임은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며, 인간 사회 안에서도 약한 존재가 감당하는 고통을 먼저 살피는 데서 깊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적 삶은 거창한 선언보다 일상의 태도에 가깝다. 나무 한 그루를 쉽게 베어내지 않는 마음, 물과 에너지를 함부로 쓰지 않는 습관, 다른 생명의 서식지를 존중하는 선택, 개발의 편익 뒤에 가려진 손실을 묻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절제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자연을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만드는 경제구조와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생명을 보호하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고, 지역 주민과 노동자, 미래 세대의 목소리가 개발과 보전의 결정 과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생태적 감수성은 개인의 마음에 머무는 선의가 아니라 사회의 책임을 바꾸는 윤리가 되어야 한다.
『오버스토리』의 인물들이 나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듯, 우리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주인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어디에서 오고, 나의 선택이 다른 생명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돌아볼 때 삶의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것만이 잘 사는 길은 아니다. 다른 생명과 함께 살아갈 자리를 남기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가 살아갈 세계를 보전하는 것 역시 삶의 중요한 성취다.
나는 이 소설이 전하는 생태적 깨달음을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사실에 걸맞게 살아가는 일로 받아들이고 싶다. 흙과 물과 바람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라면 그것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다른 생명의 삶에 의존하는 존재라면 그 생명의 소멸을 자신의 일과 무관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자연을 지키는 일은 인간 바깥의 세계를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과 삶의 관계를 지키는 일이며, 약한 존재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숲은 인간보다 오래 기억한다. 그러나 그 숲도 인간의 손길 앞에서 영원할 수는 없다. 수백 년의 시간을 살아온 나무가 베어지는 데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파괴는 짧지만, 그 상처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의 불균형 앞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을 정복하는 더 큰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는 뜻일 것이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면 다른 생명은 더 이상 인간의 필요를 위한 배경으로 남지 않는다. 그때 숲은 정복하거나 소유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세계가 된다.
나 역시 칠십 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숲으로 들어가 숲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나무와 풀과 바람을 만나며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임을 배웠다. 우리가 숲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생명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거기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세우는 길이 시작된다는 것을.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