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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한국의 베를린 …피란수도 서사, 인류 기억으로
[뉴스]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참가자들이 부산근현대역사관을 찾아 추억을 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세계유산 분야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지난 19일 부산에서 막을 올렸다. 대한민국이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뒤 처음으로 개최한 것이다. 세계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억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국제회의가 이 도시에서 열리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부산이 지금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유산은 이미 국내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됐으며, 부산시는 2030년 등재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유네스코 부산회의는 세계유산을 심사하는 국제행사인 동시에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를 다시 읽는 계기였다. 해운대와 광안대교, 영화제와 항구도시의 활력 뒤에 가려져 있던 또 하나의 부산, 전쟁과 피란, 분단과 생존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세계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담한 문장이 필요하다. 부산은 한국의 베를린이다. 두 도시가 외형적으로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부산에는 베를린 장벽이 없으며, 베를린에는 부산항과 산복도로가 없다. 두 도시의 정치적 위상과 전쟁 경험 역시 동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부산과 베를린은 전쟁이 도시의 운명을 바꾸었고, 분단의 역사를 몸으로 증언하며, 국가폭력과 민주주의의 기억을 도시 공간에 축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마주 본다. 전쟁이 만든 피란민의 도시 베를린과 부산 모두 전쟁으로 인해 인구와 공간의 질서가 무너지고 다시 형성된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베를린은 피란민과 귀환민, 폭격 피해자와 점령군이 뒤섞인 거대한 전쟁 도시였다. 동부 독일 지역에서 소련군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몰려왔고, 연합군의 폭격과 시가전은 도시의 일상적인 삶을 파괴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추방민과 귀환병, 이산가족의 이동이 이어졌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경험한 인구 변화는 더욱 극적이었다. 해방 직후 40만~50만 명 수준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전쟁 중 100만 명 안팎으로 급증했다. 기존 시민과 맞먹는 50만 명 이상의 피란민이 짧은 기간에 도시로 밀려든 것이다. 부산은 피란민을 수용하는 동시에 정부와 국회, 행정기관, 학교, 언론사, 문화예술계와 산업시설을 떠안았다. 1950년 8월 18일부터 정부가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부산은 1023일 동안 대한민국의 피란수도였다. 그 기간 부산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자 피란민의 안식처였고, 유엔군과 국제 구호물자가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베를린이 전쟁의 파괴와 패전을 압축한 도시였다면, 부산은 전쟁 속에서 국가의 존속과 생존을 떠맡은 도시였다. 베를린이 무너지는 제국의 수도였다면 부산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틴 민주공화국의 수도였다. 수많은 피란민은 학교와 사찰, 창고와 극장, 판잣집과 산비탈에 몸을 의탁했다. 산복도로와 피란민 마을, 국제시장과 부산항 부둣길, 임시정부 청사와 피란학교는 전쟁이 만들어낸 도시의 흔적이다. 부산의 급격한 팽창은 단순한 인구 증가가 아니었다. 고향과 가족, 재산과 생활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은 거대한 피란민 수용소가 아니라, 피란민이 시민으로 변해간 도시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되는 부산의 기억 공간들 부산시 제공 연합뉴스 분단을 몸에 새긴 도시 베를린은 20세기 냉전과 독일 분단을 상징하는 도시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점령 구역으로 나뉘었고, 이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갈라졌다. 1961년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하나의 도시뿐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 유럽과 세계를 양분했다. 부산에는 물리적인 장벽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부산 역시 한국 분단의 결과가 도시의 구조와 시민의 삶 속에 깊게 새겨진 장소다. 한국전쟁기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 가운데 많은 사람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특히 이북 출신 피란민에게 부산은 잠시 머무는 피난처가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대신하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부산의 시장과 부두, 산동네와 골목 곳곳에는 분단이 만들어낸 이산과 정착의 역사가 남았다. 베를린 장벽이 분단을 눈앞에 보이는 구조물로 만들었다면, 부산의 피란민 마을과 산복도로는 분단을 생활의 풍경으로 만들었다. 베를린의 분단은 콘크리트 장벽으로 표현되었고, 부산의 분단은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집과 시장, 말투와 음식, 가족사로 표현되었다. 부산은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끝의 도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분단의 역사가 가장 밀도 높게 쌓인 도시가 되었다. 전쟁을 피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내려온 사람들이 바다 앞에서 멈춰 섰기 때문이다. 부산은 분단의 경계선은 아니었지만, 분단이 밀어낸 사람들이 도착한 종착지였다. 국가의 기억과 시민의 기억 베를린이 세계적인 기억의 도시로 평가받는 까닭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많아서가 아니다. 베를린은 나치 독재와 유대인 학살, 전쟁과 패전, 냉전과 장벽, 동독의 감시체제와 통일의 경험을 도시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드러내고 토론한다. 브란덴부르크문이나 국회의사당 같은 국가적 상징만이 아니라, 유럽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추모 공간, 테러의 토포그래피, 베를린 장벽 기념관, 슈타지 관련 기억시설 등 가해와 피해, 독재와 저항의 장소가 도시 곳곳에 공존한다. 베를린은 과거의 영광만을 전시하지 않는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와 시민이 겪은 고통도 도시 정체성의 일부로 인정한다. 부산 역시 아시아에서 보기 드물 만큼 다양한 근현대사의 기억이 중첩된 도시다. 부산에는 일제강점기와 강제동원의 기억, 한국전쟁과 피란수도의 기억, 유엔군 참전과 국제원조의 기억이 있다. 전쟁 이후에는 수출항과 공업도시로 성장하며 산업화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부두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 신발공장 여성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삶이 한국 경제성장의 밑바탕을 이루었다. 동시에 부산은 민주화의 도시다. 1979년 부마항쟁은 유신체제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에서도 부산 시민과 노동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부산의 기억에는 자랑스러운 민주화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국가와 지방행정기관이 ‘부랑인 단속’과 사회정화라는 명목 아래 시민을 강제로 수용하고, 폭행과 강제노동, 성폭력과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폭력의 역사다. 거리에서 생활하던 사람뿐 아니라 주민등록증이 없거나 단정하지 못해 보인다는 이유로, 심지어 길을 잃었다는 이유로 끌려간 시민도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유대인 학살과 같게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특정 민족과 집단의 절멸을 목적으로 국가가 조직한 대량학살이었으며, 형제복지원 사건과는 목적·규모·역사적 조건이 다르다. 그러나 두 사건을 둘러싼 기억의 윤리는 비교할 수 있다. 국가는 누구를 정상적인 국민으로 인정하고 누구를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가. 행정의 언어와 법률, 경찰과 수용시설은 어떻게 폭력을 일상적인 업무로 바꾸는가. 시민은 국가가 낙인찍은 사람들의 고통을 왜 오랫동안 외면하는가. 이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형제복지원은 부산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국가폭력의 유산이다. 그것은 독일의 역사를 모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산과 한국 사회가 자신의 가해와 방관의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해 필요하다. 베를린의 교훈은 모든 비극을 홀로코스트와 동일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비극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도 국가폭력이 작동하는 구조를 끊임없이 성찰하라는 것이다.   26일 부산 남구 용호부두에서 열린 조선통신사선과 함께하는 세계유산 행사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참가를 위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들을 태운 조선통신사선이 부산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2017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 문화유산이다. 2026.7.26. 연합뉴스 기억이 흩어져 있는 도시 부산에는 이미 수많은 기억의 장소가 존재한다. 임시수도 대통령관저와 정부청사, 부산근현대역사관, 유엔기념공원, 우암동 소막마을, 감천문화마을, 영도대교와 국제시장, 소설가 이호철이 걸었던 부산항 부둣길, 부마항쟁과 6월항쟁의 현장, 민주공원, 부산시민공원, 일제강제동원역사관, 형제복지원의 흔적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기억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기억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피란수도의 역사는 전쟁사로, 산업화의 역사는 경제성장사로, 민주화의 역사는 정치사로, 형제복지원은 인권침해 사건으로 각각 분리되어 다뤄진다. 그러나 실제 부산의 역사는 그렇게 나뉘어 있지 않다. 피란민은 전쟁이 끝난 뒤 항만 노동자와 시장 상인, 공장 노동자와 도시 빈민이 되었다. 전쟁기의 임시 거주지는 산업화기의 산동네가 되었다. 국가 생존을 위해 동원된 시민들은 개발독재 시기에도 희생을 요구받았다. 산업화 과정에서 성장한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은 다시 민주화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개발과 질서의 이름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은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에 감금되었다. 피란, 정착, 산업화, 민주화, 국가폭력은 서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 이후 부산이라는 도시가 만들어지는 하나의 연속된 과정이다. 따라서 부산의 기억문화는 개별 유적을 보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기억망으로 구성해야 한다. 피란수도 유산과 유엔기념공원, 산복도로와 산업시설, 민주항쟁의 현장과 국가폭력의 장소를 연결하는 ‘부산 기억의 길’이 필요하다. 그 길은 영웅과 승리만을 기념하는 길이어서는 안 된다. 피란민과 노동자, 여성과 어린이, 도시 빈민, 수용시설 피해자처럼 공식 역사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함께 담아야 한다.  베를린을 닮는다는 것 부산이 베를린을 닮아야 한다는 말은 베를린의 건축물이나 박물관을 모방하자는 뜻이 아니다. 거대한 추모시설을 세우거나 관광상품을 개발하는 것만으로 기억의 도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베를린의 핵심은 기억을 도시의 장식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로 만든 데 있다. 베를린에서는 과거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기억문화의 일부다. 무엇을 보존할 것인지,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지, 가해자의 흔적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가 대변할 것인지가 지속적으로 논의된다. 기억은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세대마다 다시 질문해야 하는 공적 과제다. 부산에도 그러한 태도가 필요하다. 피란수도 부산을 단순히 대한민국을 지켜낸 ‘구국의 수도’로만 기억하면 역사의 절반만 보게 된다. 국가는 부산에서 살아남았지만, 수많은 피란민은 굶주림과 질병, 주거난과 가족 해체를 겪었다. 국제원조는 생존의 기반이었지만 냉전 질서의 일부이기도 했다. 산업화는 도시의 번영을 가져왔지만 노동착취와 빈곤, 강제철거를 동반했다. 민주화는 시민의 용기로 이루어졌지만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았다. 기억의 도시는 자신에게 유리한 과거만 선택하지 않는다. 부산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한다면 피란수도의 건축물만 보존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장소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 특히 가난하고 이름 없는 피란민의 생활사를 함께 보존해야 한다. 세계유산은 오래된 건축물에 주는 훈장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기억할 가치가 무엇인지 선언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피란수도 부산유산 특별전 연합뉴스 자료사진  패전의 기억과 생존의 기억 베를린과 부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베를린은 패전의 기억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다. 나치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국가가 저지른 전쟁과 학살의 책임을 외면할 수 없는 장소다. 따라서 베를린의 기억문화는 가해의 책임을 인정하고 민주주의의 윤리를 재건하는 데 중심을 둔다. 부산은 생존의 기억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다. 부산은 전쟁으로 붕괴할 위기에 놓인 국가와 피란민을 수용했다. 부산항으로 들어온 국제원조와 유엔의 지원, 시민들의 노동과 피란민의 자구 노력은 대한민국이 전쟁을 견디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생존의 기억에 영광의 기억만 따라 오지 않는다. 생존 과정에 연대와 희생이 있었지만, 차별과 배제도 있었다. 국가는 살아남았지만 모든 시민의 존엄을 지키지는 못했다. 피란민과 도시빈민은 산업화의 주역이면서 동시에 개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형제복지원 피해자와 같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은 오랫동안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부산의 기억문화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는가. 살아남는 과정에 누구를 외면했는가. 그리고 그 기억을 오늘의 민주주의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때 부산의 생존 서사는 승리의 신화를 넘어 보편적인 인류의 기억이 된다. 부산은 한국의 베를린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도시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분단이 시민의 삶과 공간에 깊이 새겨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산업화와 민주화, 국가폭력의 기억이 한 도시에 중첩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부산은 아직 완성된 기억의 도시가 아니다. 베를린은 자신의 어두운 역사를 도시의 중심에 세웠다. 부산의 기억은 여전히 산복도로와 시장, 철거된 시설과 피해자의 증언 속에 흩어져 있다. 피란수도의 기억은 기념되고 있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국가폭력 피해자의 기억은 충분히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202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부산에서 열린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세계의 유산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피란수도였던 도시에 모였다. 이제 부산은 세계를 향해 자신의 유산이 왜 인류가 함께 기억할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은 부산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는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산은 전쟁 속에서 국가를 지킨 도시였고, 피란민이 새로운 시민으로 살아간 도시였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산업화를 떠받친 도시였으며, 학생과 시민이 독재에 맞선 도시였다. 동시에 국가가 시민을 버리고 감금했던 폭력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 모든 기억을 함께 받아들일 때 부산은 비로소 기억의 도시가 된다. 세계유산 등재는 그 출발점일 뿐이다. 진정한 과제는 도시 곳곳에 남은 기억을 보존하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록하며, 다음 세대가 그 장소에서 전쟁과 분단, 인권과 민주주의를 질문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베를린이 과거의 책임을 기억함으로써 미래의 민주주의를 설계했듯, 부산도 생존과 희생의 기억을 통해 새로운 도시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부산은 바다의 도시만이 아니다. 영화의 도시나 관광의 도시만도 아니다. 부산은 전쟁과 분단을 견딘 도시이며, 국가폭력과 민주주의가 충돌한 도시다. 영광과 상처, 환대와 배제, 생존과 희생이 함께 축적된 도시다. 그러므로 다시 말한다. 부산은 한국의 베를린이다. 그리고 부산은 베를린을 닮는 데 멈추지 않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기억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정광민 시민기자 vietho@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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