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극우생태계에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사람들] 6일 오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참배하고 있다.2026.7.6 연합뉴스
이 연재의 출발점은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의 5·18 조롱 사건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광주제일고를 찾아 사과하고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습니다. 학교도 전교생을 대상으로 특별 역사·인권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야구부가 받은 전국대회 출전정지 처분은 학교의 재심 신청을 거쳐 6개월에서 1개월로 줄었습니다(연합뉴스, 2026.7.14; TV조선, 2026.7.20; 프레시안, 2026.8.6).
학생과 야구부에 대한 징계는 가시화됐습니다. 그러나 감독과 학교장, 재단이 어떤 책임을 지고 무엇을 바꿀 것인지는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광주에서 고개를 숙였지만, 그들을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어른들의 책임은 흐려졌습니다. 극우화된 청년만 남기고 어른들은 사라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학교가 어떤 역사를 가르쳐왔느냐는 것입니다. 배재고 교정 한가운데에는 전두환 정권 시기인 1984년에 세운 3m 높이의 이승만 동상이 서 있습니다. 비문은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이승만 정부 아래 자행된 국가폭력에는 침묵한 채 그를 항일과 반공, 자유민주주의에 바친 겨레의 큰 스승”이라고 기립니다. 기숙사는 이승만의 호를 따 ‘우남학사’로 불립니다(경향신문, 2024.10.5; 민들레, 2026.6.30).
동상은 침묵하는 교육과정입니다. 헌법이 계승한다고 선언한 4·19혁명으로 쫓겨난 대통령을 ‘겨레의 큰 스승’으로 기리며, 학교가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역사를 기억하는지를 날마다 가르칩니다. 동상 하나가 학생들의 구호를 직접 만들어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를 미화하는 학교의 기념문화와 청소년의 온라인 조롱문화가 만나는 지점까지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승만 동상을 그대로 둔 채 특별 역사교육을 실시했다고 학교의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청년은 갑자기 극우화된 것이 아닙니다. 청년을 민주주의의 시민으로 길러낼 공동체와 공론장이 무너지는 동안, 오랫동안 축적된 극우의 세계관이 그 빈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민주화를 이끈 세대는 권위주의 정권을 물러나게 했지만 민주주의를 다음 세대의 삶과 문화에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학교도 학생들이 어떤 세계관에 포획되고 있는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교사가 역사 왜곡과 혐오를 바로잡으려 하면 ‘정치적 편향’이라는 공격을 받았지만, 학교와 교육청은 그 교사를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을 지키지 못한 학교와 교사를 지키지 않은 국가. 그 두 번의 방치가 만나는 곳에서 극우생태계는 성장했습니다.
교육부와 국가교육위원회는 중학교 역사 과목의 근현대사 비중을 현행 20%에서 30%로 늘리는 교육과정 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최종 확정되면 2030년부터 적용됩니다(연합뉴스, 2026.7.16). 근현대사 비중 확대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청년극우화를 수업시간 부족의 문제로 축소하고 극우생태계는 그대로 둔 채 교과서 분량만 늘리는 것은 미봉책입니다.
청년극우화를 막는다는 것은 청년을 교정하거나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거짓과 혐오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정보와 관계, 공동체를 선택할 수 있도록 출구를 여는 일입니다. 그 출구가 시작되는 가장 가까운 공적 공간은 학교입니다.
극우생태계 밖의 세계와 만나는 학생들.학생들이 5·18민주화운동교육관에서 당시의 기록과 증언을 살펴보고 있다. 개인의 각성은 혼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믿어온 세계와 충돌하는 사실, 그 사실을 이해할 자료, 질문을 나눌 사람과 공동체가 필요하다. 극우생태계에서 빠져나오는 결단은 개인이 내리지만, 그 결단을 가능하게 할 ‘진실의 창’은 사회와 학교가 열어주어야 한다. (사진 5·18민주화운동교육관 공식 게시물)
■ 극우생태계에서 빠져나올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 성공한 개인을 넘어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한국 교육은 오랫동안 지배질서에 잘 적응하고 경쟁에서 성공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학교는 더 높은 성적과 더 좋은 대학, 더 안정된 직장으로 이어지는 경쟁의 사다리가 되었습니다. 성공은 소득과 자산으로 평가됐고, 실패는 개인의 무능과 노력 부족으로 돌려졌습니다.
경쟁은 현실이며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할 권리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성공이 교육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순간, 타인의 실패와 공동체의 붕괴는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성공한 개인을 길러내는 데는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기준을 의심하고 실패한 이웃의 손을 잡을 시민을 길러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민주공화국에 필요한 사람은 경쟁에서 이긴 사람만이 아닙니다. 사실과 거짓을 분별하고 부당한 권력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선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타인의 존엄을 존중하고 개인의 발전과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책임지는 시민입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하나의 모범적인 시민상을 정해 학생에게 주입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권위주의 국가의 국민교육을 내용만 바꾸어 되풀이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 교육은 정답을 암기시키는 교육이 아닙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다른 사람과 토론하며,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수정할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 개인의 각성에도 진실의 창이 필요하다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80년대에는 생각을 뒤흔드는 각성의 계기가 캠퍼스 곳곳에 있었습니다. 선배들을 통해 국가와 언론이 감추었던 5·18민주항쟁의 진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현대사와 실제 역사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깨닫고 나자, 제가 믿어온 세계 전체를 다시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가난이 개인의 게으름이나 능력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그러한 각성은 혼자 이루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실을 알려준 선배가 있었고, 함께 읽을 책과 자료가 있었으며, 밤새 질문하고 논쟁할 학회와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대학의 공론장이 언제나 민주적이고 개방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념적 경직성과 집단주의도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던 세계를 의심하고 다른 현실과 만날 통로는 열려 있었습니다. 개인이 깨달았지만, 깨달음의 계기는 공동체가 제공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역할을 맡았던 대학공동체와 공론장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그 빈자리를 온라인 커뮤니티와 플랫폼이 차지했습니다. 과거의 공론장이 모르던 현실과 다른 생각을 만날 통로였다면, 플랫폼 알고리즘은 이미 선호한 정보를 반복해서 보여주며 질문보다 확신을 강화합니다. 각성의 공간이 사라진 자리에 확증의 공간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닫힌 정보환경에서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프로게이머 출신인 황희두 노무현재단 이사는 한때 온라인 커뮤니티와 인터넷 방송이 보여주는 세계를 세상의 전부로 여겼다고 밝혔습니다. 전환점은 박근혜 탄핵 국면이었습니다. 그는 인터넷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자신이 왜 그 세계에 빠졌는지를 돌아보고 정치와 역사를 다시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혐오와 정치적 선동이 유머와 놀이로 포장되어 청년에게 퍼지는 과정을 알리고 있습니다(MBC, 2025.8.7).
저와 황희두 이사의 경험 사이에는 수십 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믿음과 충돌하는 사실, 이를 이해할 자료와 관계가 있었기에 자신의 판단을 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은 같습니다. 극우생태계에서 빠져나오는 결단은 개인이 내립니다. 그러나 그 결단을 가능하게 할 진실의 창은 사회가 열어주어야 합니다.
■ 개인·가족·학교를 잇는 민주주의의 안전망
● 청년극우화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생태계의 산물이다
미국 코넬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 유리 브론펜브레너(Urie Bronfenbrenner, 1917~2005)는 당시 발달심리학이 아동을 가정이나 학교 같은 개별 환경 안에서 분리해 연구하는 한계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개인이 가족과 또래, 학교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제도, 사회의 문화와 가치가 연결된 생태체계 안에서 성장한다는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아이에게 나타난 문제를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말고, 그를 둘러싼 환경들의 연결과 작동방식까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유리 브론펜브레너, 「인간발달의 실험생태학을 향하여」〔 Toward an Experimental Ecology of Human Development”〕, 『미국심리학자』〔American Psychologist〕 32권 7호, 1977; 『인간발달의 생태학』〔The Ecology of Human Development: Experiments by Nature and Design〕, 하버드대학교출판부, 1979).
브론펜브레너가 극우화나 정치적 급진화를 연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청년극우화를 개인의 품성이나 가정교육 문제로 돌리고 일부 학생의 특이한 일탈로 치부하는 설명이 왜 불충분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러한 설명은 학생에게 책임을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행동을 만들고 증폭한 학교와 또래문화, 온라인 플랫폼과 정치·사회적 환경의 책임을 지워버립니다.
청년극우화는 한 개인이 어느 날 갑자기 극우사상을 선택하면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가정의 권위주의적 가치, 또래집단의 조롱문화, 학교와 대학에서 사라진 공론장, 일부 종교·교육시설의 정치적 주입, 플랫폼의 반복적인 추천, 혐오를 수익과 정치동원으로 바꾸는 조직이 맞물려 작동합니다. 이념의 생산과 교육, 확산과 수익화, 정치동원이 순환하는 연결망. 이것이 이 연재에서 말하는 극우생태계입니다.
학생들의 행위에는 분명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나 학생과 부모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면 학교와 플랫폼, 정치세력과 국가의 책임은 사라집니다. 개인의 책임과 생태계의 책임은 서로를 지우지 않습니다. 개인의 잘못을 묻되 그 잘못을 만들어내고 확산하며 이용하는 생태계도 함께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학생을 처벌한 자리에 또 다른 학생이 들어설 뿐입니다.
● 보호막은 때로 족쇄가 된다
가족은 아이가 처음 만나는 공동체입니다.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며 함께 살아가는 규칙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의 정보 접근을 막고 특정한 정치·종교적 신념을 강요한다면 가족은 보호막이 아니라 족쇄가 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식 수업에서는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학교의 공간과 기념문화가 권위주의적 역사관을 전한다면, 학생들은 충돌하는 두 개의 교육과정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곳에서든 실패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영역이 실패했을 때 다른 영역이 이를 발견하고 학생을 보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족이 아이를 고립시키면 학교가 다른 정보와 관계를 제공하고, 학교가 책임을 회피하면 교육청과 지역사회가 개입해야 합니다. 플랫폼이 허위정보와 혐오를 반복해서 노출하면 시민사회와 국가가 그 구조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모두의 책임은 자칫 아무의 책임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위험을 발견하고 사실을 확인하며, 도움을 연결하고 회복을 지원할 것인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 또 다른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극우생태계의 가장 위험한 특징은 특정한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다른 정보는 모두 거짓으로 규정하고 관계를 끊게 하며, 믿음을 바꾸는 일을 배신과 패배로 여기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선택지를 줄이고 출구를 닫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여러 의견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형식적 자유가 아니라, 허위정보를 사실과 대조하고 자신을 가둔 관계에서 벗어나 도움을 요청하며 과거의 선택을 수정할 자유입니다.
민주주의의 힘은 오류가 없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위험한 지도자가 선출되고 잘못된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권력분립과 상호 견제를 통해 파괴를 제한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가능성을 남겨두는 데 있습니다. 개인과 가족, 학교와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곳의 실패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른 영역이 위험을 발견하고 회복을 지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안전망입니다.
이 안전망이 정치적 생각을 감시하고 교정하는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수적 견해나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는 감시의 대상이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개입해야 할 지점은 미성년자에 대한 정치적·종교적 강요, 조직적인 허위정보 유포, 차별과 폭력의 선동, 부당한 정치동원처럼 타인의 자유와 헌법질서를 실제로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사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와 폭력으로부터 선택의 자유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학생에게 가장 가까이에서 다른 선택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교사입니다. 그러나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 학교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면 어떤 안전망도 작동할 수 없습니다. 보호받지 못한 교사에게 학생을 보호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 보호받지 못한 교사가 학생을 보호할 수 있는가
● 교과서를 가르쳤는데 ‘좌파’가 되었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5학년 사회과 수업에서 일제강점기와 3·1운동, 유관순 열사를 가르쳤다가 교육과정이 좌파로 치우쳤다”는 항의를 받았습니다. 5·18민주항쟁과 4·19혁명, 6월민주항쟁을 가르치고 좌파 사상을 주입한다”, 공산당이냐”는 민원을 받은 교사도 있었습니다(오마이뉴스, 2025.11.10). 교사노동조합연맹이 전국 교사 1,937명을 조사한 결과, 20.2%인 391명이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하고도 정치적 중립성 위반이라는 항의나 민원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연합뉴스, 2026.7.9).
정치적 중립은 교사가 자신의 견해를 학생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지,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의 가치와 교육과정에 포함된 역사적 사실 앞에서 침묵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정치적 편향’이라고 공격하면 교사들은 논쟁이 생길 만한 주제를 피하게 됩니다. 교실에서 먼저 사라지는 것은 교사의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렵게 확립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 교사는 모든 갈등의 최종 책임자가 되었다
오늘날 학교는 수업과 생활지도, 학부모 상담과 행정업무, 학교폭력과 위기학생 대응, 각종 민원까지 교사에게 떠넘깁니다. 문제가 생기면 학교와 교육청이 앞에 서기보다 담당 교사에게 먼저 해명을 요구합니다. 학생을 보호할 책임은 분명하지만, 그 책임을 수행할 권한과 보호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학생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온 교사들. 2023년 9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대로에서 열린 서이초 교사 49재 추모집회에서 전국의 교사들이 교권 회복과 공교육 정상화를 요구하고 있다. 2023.9.4 연합뉴스
2023년 7월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은 이러한 고립을 사회에 드러냈습니다. 경찰은 특정 학부모의 지속적인 괴롭힘이나 폭언·협박 등 범죄 혐의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인사혁신처는 2024년 2월 고인의 죽음을 공무 수행과 관련된 순직으로 인정했습니다(연합뉴스, 2024.2.27).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자살로 사망한 초·중·고 교원은 116명이었습니다(오마이뉴스, 2025.10.10).
이 죽음을 모두 악성 민원이나 교권침해의 결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교육 당국이 교원 사망의 원인과 직무 관련성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축적해왔느냐는 것입니다. 교사의 죽음을 개인의 우울과 불운으로만 돌리는 순간 학교와 교육청, 국가의 책임은 다시 사라집니다.
● 법은 바뀌었지만 고립은 끝나지 않았다
서이초 사건 이후 국회는 2023년 9월 이른바 ‘교권보호 4법’을 개정하고 학교장과 교육감의 민원 처리와 지원 책임을 강화했습니다(국회입법조사처, 2024.3.28). 그러나 2023년 9월 25일부터 2025년 2월 말까지 아동학대로 신고된 교원은 1,065명이었습니다. 수사가 끝난 438건 가운데 95.2%인 417건은 불입건 또는 불기소로 종결됐습니다(한국교육신문, 2025.5.13).
불입건과 불기소가 곧 허위신고나 무고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고된 교사는 혐의 여부가 확정될 때까지 조사와 진술, 법률 대응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혐의 결정은 마지막에 나오지만 고립과 소진은 그보다 먼저 시작됩니다. 법률에 교사의 권리가 적혀 있는 것과 실제 위험 앞에서 국가가 교사의 곁에 서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 교사의 수업권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 교권과 학생인권은 대립하지 않는다
교권을 강화하려면 학생의 권리를 줄여야 하고, 학생인권을 보장하면 교사가 무력해진다는 주장은 잘못된 구도를 만듭니다. 교사의 교육권은 학생 위에 군림할 권리가 아니라 전문적으로 수업하고 정당하게 생활지도하며 자신의 인격을 보호받을 권리입니다. 학생인권 역시 지도와 평가를 무조건 거부할 권리가 아니라 폭력과 차별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배울 권리입니다.
교사의 수업권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사람은 학생입니다. 수업 방해를 제지할 수 없다면 다른 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됩니다. 민원이 두려워 5·18민주항쟁과 독재의 역사를 가르치지 못한다면 학생은 민주주의를 판단할 지식과 언어를 잃게 됩니다. 교사와 학생의 권리는 서로를 약화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존엄을 지켜야 함께 성립하는 권리입니다.
그렇다고 교사의 모든 행위를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폭언과 체벌, 차별과 정치적 강요를 당한 학생이 신고하고 구제받을 통로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보호가 아니라 정당한 교육활동과 권리침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구분하는 체계입니다.
● 민원은 기관이 책임지고 수업권은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
교권과 수업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면 세 가지 전환이 필요합니다.
첫째, 민원을 교사 개인이 아니라 학교와 교육청이 책임져야 합니다. 학교의 민원 창구를 일원화하고 교사의 개인 전화번호와 근무시간 밖의 생활을 보호해야 합니다. 반복적이고 위협적인 민원은 학교장이 맡고, 폭행과 협박, 불법 촬영과 허위 영상물 유포 같은 중대한 침해에는 교육청이 법률·행정 인력을 즉시 투입해야 합니다.
정부는 2026년 1월 학교 민원을 학교와 교육청이 맡도록 하고 교육활동보호센터를 2025년 55곳에서 2026년 110여 곳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교육부, 2026.1.22). 방향은 옳습니다. 그러나 학교장이 민원을 다시 담당 교사에게 떠넘기거나 교육청이 사안이 커진 뒤에야 개입한다면 이름만 기관 대응일 뿐입니다. 개입 시점과 처리 기한을 명확히 정하고 이행 현황을 공개해야 합니다.
둘째, 교육과정과 검증된 사실에 근거한 수업은 교육제도가 보호해야 합니다. 정치적 편향이라는 민원이 제기됐을 때 교사가 혼자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육활동보호센터 안에 교과 전문가와 현장 교사, 법률가가 참여하는 신속 검토체계를 두어야 합니다. 정당한 수업은 우선 보호하되, 정치적 강요나 학생인권 침해가 제기되면 객관적인 자료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학교와 교육청은 그 결과를 민원인에게 공식 통보하고 반복 민원에 직접 대응해야 합니다.
셋째, 위기학생 대응을 교사 개인의 감시와 희생이 아니라 공동의 교육적 지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교사는 수사관이 아닙니다. 학생의 정치성향을 감시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폭력과 혐오, 강요와 고립의 구체적인 징후를 기준으로 상담과 교육적 개입을 시작해야 합니다. 학교 상담 인력과 교육지원청, 청소년 전문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판단하고 지원하되, 긴급한 폭력 위험이 없다면 처벌보다 사실 확인과 상담, 관계 회복이 먼저여야 합니다.
교사의 도움 요청을 묵살한 학교장과 교육청의 책임도 물어야 합니다. 교원 사망이나 중대한 교육활동 침해가 발생하면 업무량과 관리자 대응, 학생 지도와 학부모 민원, 직무 관련성을 독립적으로 조사하고 그 결과를 축적해야 합니다. 교사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면 보호체계는 다시 무너집니다.
민주주의는 질문하고 판단을 수정하는 능력이다.교사와 학생들이 교실에서 하나의 사회적 쟁점을 놓고 토론하고 있다. 민주주의 교실은 모든 의견을 똑같이 옳다고 말하는 곳이 아니다. 근거를 제시하고 반론을 들으며,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이를 고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다. 학생이 극우생태계 밖의 사실과 만날 수 있으려면 교사가 민원과 신고의 두려움 없이 질문과 토론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교육부 행복한 교육 2026년 여름호 교복 입은 유권자, 세상을 읽는 눈을 뜨다, 저현고등학교 중에서. 사진 이혜정 저현고 교사
● 교사를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의 교실을 지키는 일이다
교사는 특정 정당의 선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민주주의와 인권, 헌법질서와 역사적 사실 앞에서 침묵해서도 안 됩니다. 민주주의와 독재, 인권과 폭력, 역사적 사실과 조직적 허위정보 사이에서 기계적인 중간지점을 찾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사실과 책임의 회피입니다.
교사는 학생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명령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왜 서로 다른 판단이 나오는지 토론하며, 자신의 주장에 책임지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민주주의 교실은 모든 의견이 똑같이 옳다고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근거를 제시하고 반론을 들으며 오류를 수정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가족과 또래집단, 온라인 플랫폼이 하나의 닫힌 세계를 만들더라도 교실에서는 다른 사실을 만나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창을 여는 사람이 교사입니다. 교사를 보호한다는 것은 권위적인 교실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교사와 학생 모두의 존엄을 지키고 사실과 토론이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교실을 회복하자는 요구입니다.
■ 결론 ― 출구가 없는 선택은 자유가 아니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와 학교가 정한 하나의 정답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어온 세계를 의심할 수 있는 사실, 다른 질문을 나눌 사람, 자신을 가둔 관계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 결단은 개인이 내리지만, 결단을 가능하게 할 조건은 사회가 마련해야 합니다.
그 가장 가까운 접점이 교실입니다. 교사가 사실을 가르치고 질문을 열 수 있어야 학생은 자신이 알던 세계의 바깥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사를 민원과 신고 앞에 홀로 세워둔 채 청년에게 민주시민이 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학생을 지키려면 먼저 교사가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출구를 열고 교실을 지키는 것만으로 극우생태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조직과 플랫폼, 일부 종교권력과 교육시설이 청년을 거짓과 혐오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에게 돌아올 곳을 마련하는 일과 그들을 포획하는 생태계의 작동을 끊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출구만 열고 입구를 방치해서도 안 되고, 생태계를 단속하면서 돌아올 곳을 마련하지 않아서도 안 됩니다.
이제 질문은 국가로 향합니다. 청년을 포획한 세계관의 생산과 교육, 온라인 확산과 수익, 정치동원은 어떤 조직과 자금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국가는 사상과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조직적인 기만과 강요, 불법적인 자금과 정치동원, 폭력과 민주헌정질서의 파괴로 이어지는 행위를 어디까지 조사해야 합니까.
다음 글에서는 극우생태계의 조직과 자금, 세계관의 생산과 확산, 정치동원의 관계를 국가가 어떻게 조사하고 밝혀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