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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왕의 친구였는데 대성당에서 암살된 토머스 베켓

왕의 친구였는데 대성당에서 암살된 토머스 베켓
[사람들]
대주교가 된 술친구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 1118~1170)은 원래 영국 런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밑바닥부터 관료로 출세한 인물이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사람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Henry II, 1133~1189)였다. 헨리는 베켓을 대법관으로 삼아 국정 전반을 맡겼고, 둘은 사냥과 술자리를 함께하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162년, 헨리는 아예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앉힌다. 왕의 계산은 단순했다. 내 사람을 교회수장으로 앉혀 놓으면 교회도 내 손에 들어오겠지. 그런데 베켓은 대주교가 되자마자 완전히 딴사람처럼 굴었다. 화려한 옷을 벗고 거친 옷을 입었으며, 교회의 권리를 지키는 데 왕보다 더 철저해졌다. 헨리는 배신감을 느꼈다.   토머스 베켓, 『성 토마스 칸투아리엔시스의 서한 모음집』에서, 1180년경(위키피디아) 성직자를 누가 재판하는가?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한 지점은 뜻밖에도 사법제도였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성직자가 범죄를 저질러도 왕의 법정이 아니라 교회법정에서 재판받았고, 형벌도 훨씬 가벼웠다. 헨리는 이 특권이 못마땅했다. 1164년 클래런던 조례를 통해 성직자 범죄도 왕의 법정이 다루도록 손보려 했다. 베켓은 이를 교회의 독립을 무너뜨리는 시도로 보고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다. 그리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결국 프랑스로 망명해 6년을 버틴다. 교황의 중재로 1170년 겨우 화해가 이뤄져 베켓은 캔터베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파문하려 했던 주교들을 실제로 파문해 버렸고, 이 소식을 들은 헨리는 폭발했다. 저 골칫덩이 성직자 하나를 처치할 자가 정녕 아무도 없는가! 정확히 이렇게 말했는지는 역사가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대략 이런 취지의 말을 홧김에 내뱉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이 일치한다.   캔터베리 대주교로 즉위하는 성 토머스 베켓(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노팅엄 설화석고 조각, 위키피디아) 애매한 말 한마디가 부른 살인 문제는 이 말을 곁에서 들은 기사 네 명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곧장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달려가 저녁 기도 중이던 베켓을 제단 앞에서 칼로 베어 죽였다. 1170년 12월 29일의 일이다. 헨리가 명시적으로 살해를 지시한 문서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의 짜증 섞인 한마디가 부하들에게는 곧 명령으로 해석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말을 내뱉은 자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잘 보여준다. 파장은 헨리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유럽전역이 경악했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1181)는 1173년 베켓을 성인으로 서둘러 추대했다. 헨리는 1174년 캔터베리까지 맨발로 걸어가 무덤 앞에서 수도사들에게 매를 맞는 공개참회를 해야 했다. 베켓의 무덤은 이후 수백 년간 유럽최대 순례지가 되었고,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의 『캔터베리 이야기』도 바로 이 순례길에서 나온 작품이다. 훗날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는 교회와 싸울 때 이 순교자의 무덤조차 파괴해 버리는데, 죽은 지 300년이 지난 성직자가 여전히 왕에게는 눈엣가시였던 셈이다.   상스에서 교황 알렉산데르 3세를 만나는 성 토머스 베켓, 노팅엄 설화석고 패널, 15세기 후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위키피디아)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 윤석열과 겹쳐 보이는 장면 베켓이 지키려던 것은 사실 거창한 신학이 아니었다. 사법의 독립성, 즉 권력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재판절차 자체를 손보려는 시도에 맞선 것이다. 그가 살해된 뒤 아이러니하게도 성직자의 사법적 특권은 오히려 수백 년 더 유지되었다. 억압이 저항의 정당성을 오히려 강화해 준 대표적 사례다. 이 장면은 검찰총장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윤석열의 행적과 겹쳐 읽힌다. 그는 재임 중 자신과 김건희에게 불리한 수사와 특검법을 거부권으로 막고, 수사·기소 라인에 측근을 앉혀 사법절차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재편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 선포를 통해 그 불편함을 아예 힘으로 지워 버리려 했다. 계엄군을 국회에 투입해 의결자체를 막으려 했고, 선거관리위원회에도 군을 보내 서버 확보를 시도했다. 헨리가 재판 절차를 왕의 뜻대로 고치려 했다면, 윤석열은 아예 국회와 헌법기관의 기능을 무력으로 정지시키려 한 셈이니 규모로 보면 훨씬 노골적이다. 결과도 헨리의 경우처럼 계산과 정반대로 흘렀다. 계엄은 몇 시간 만에 시민과 국회의 저항으로 무산됐고, 같은 해 12월 14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이후 그는 법기술 을 총동원해 체포와 재판절차 곳곳에서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2026년 2월 19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별도의 특수공무집행방해·직권남용 사건에서도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아직 남은 재판이 여럿이다. 베켓을 죽인 기사들처럼, 국회와 선관위에 투입된 이들 역시 명령이었다 는 항변 뒤에 숨으려 했지만 법원은 그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사가 반복해서 알려주는 교훈은 하나다. 사법절차를 권력자 개인의 편의에 맞춰 뜯어고치려는 시도는 그 순간에는 성공한 듯 보여도, 결국 권력자 자신을 옭아매는 밧줄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다. 애매한 명령 뒤에 숨으려 한 자도, 그 명령을 그저 로봇처럼 곧이곧대로 실행한 자도, 역사의 심판대에 나란히 서게 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중앙에 베켓, 왼쪽에 헨리 2세가 묘사된 14세기의 그림(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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