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 카워드, 상류사회 웃음거리로 만든 상류층 총아 [사람들] 영국 출신 배우, 극작가, 작곡가, 연출가로서 반 세기 넘게 무대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 노엘 카워드(Noel Coward, 1899~1973)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정장을 빼입고 담배연기를 뿜으며 신랄한 농담을 던지는 영국 신사 이미지를 떠올린다. 틀린 그림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그런 인물이었다. 다만 그 우아한 겉모습 뒤에는 훨씬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삶이 숨어 있었다.
1972년의 카워드(위키피디아)
열한 살 배우, 스물다섯의 스타
카워드는 템스사이드 로던 근처 테딩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점잖은 가난 이라고 표현했다. 피아노 외판원이던 아버지 아더 사빈 카워드는 야심도 근면함도 부족했고, 집안 살림은 늘 빠듯했다. 그럼에도 어머니 바이올렛 아그네스 베이치는 아들을 무대에 세우기로 결심했고, 카워드는 열한 살에 첫 무대에 올랐다. 한 친구는 노엘이 피아노 선으로 만든 탯줄로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 고 말했고, 다른 친구는 함께 있을 때 신혼부부처럼 군다 고 말했을 정도였다.
스물다섯이 되던 1924년, 마약중독과 불륜을 소재로 한 문제작 「소용돌이」로 단숨에 극작가이자 배우로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헤이 피버」, 「사생활」, 「디자인 포 리빙」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1929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그의 희곡은 하나같이 상류층의 위선과 허영을 유쾌하게 도려내는 풍자극이었다. 이혼한 부부가 우연히 신혼여행지에서 재회한다는 「사생활」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무대에 오르는 고전이 됐다.
1911년의 노엘 카워드(왼쪽)와 리디아 빌브룩, 찰스 호트리(위키피디아)
조국을 위해 일했지만, 훈장은 마흔여섯 해 뒤에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카워드는 단순한 딴따라로 남지 않았다. 그는 영국 외무부를 위해 정보활동을 벌였고, 전선의 병사들을 위문했으며, 영화 「토린호의 운명」(In which We Serve, 1942)의 각본을 쓰고 데이비드 린과 공동 연출해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다. 재간이 많은 그는 출연도 했고 음악까지 맡았다. 이런 공로로 그는 진작 기사 작위를 받아 마땅했다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 서훈은 1970년, 그의 나이 일흔에야 이루어졌다. 그 사이 수십 년, 그는 영국 사회의 총아이자 동시에 눈엣가시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있는 도시) 워딩(Worthing)에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는 노부인이 몇 명 있다 며 특유의 재치와 기지로 슬쩍 비켜갔을 뿐이다. 배우 그레이엄 페인과 평생을 함께 했지만, 세상 앞에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진실은 그가 자메이카 북부 해안의 빌라에서 아침 커피를 끓이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뒤 일기와 편지, 그리고 지인들의 회고를 통해서야 온전히 드러났다.
1925년 《더 볼텍스(The Vortex)》의 공동 출연자이자 절친 조이스 캐리의 어머니인 릴리안 브레이스웨이트와 함께한 카워드(위키피디아)
상류사회를 조롱한 상류사회의 사람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하나 생긴다. 카워드는 평생 상류층의 허세와 이중 잣대를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런데 정작 상류층은 그를 끌어안았다.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린 폰탄, 조지 버나드 쇼, 캐리 그랜트, 마를렌 디트리히, 비트리스 릴리 등과 충성스럽고 빛나는 우정을 누렸다고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는 부고 기사에 적었다.
나중엔 여왕이 직접 기사 작위를 내렸다. 풍자의 대상이 풍자하는 자를 훈장으로 감싸 안은 셈이다. 게다가 그는 높은 세율을 피해 영국을 등지고 버뮤다와 자메이카로 떠난 조세 망명자이기도 했다. 기자가 왜 자메이카에 사느냐고 묻자 그는 답은 한 단어로 충분하다, 소득세(Income Tax) 라고 답했다고 한다. 특권을 비웃으면서도 특권을 최대한 누린 사람, 그것이 카워드였다.
하지만 그 이중성이야말로 그의 풍자가 강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안에서 보는 자만이 그 계급의 허점을 정확히 찌를 수 있다. 그는 정치를 정면으로 논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속이고, 어떻게 체면을 지키는지를 무심한 듯 능청스럽게 그려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가벼움 속에 사회 전체의 위선이 고스란히 비쳤다.
1944년 8월 1일, 실론(Ceylon, 스리랑카)에서 HMS 빅토리어스(Victorious)호의 해군들을 위해 노먼 해크포스(Norman Hackforth)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공연하는 카워드(위키피디아)
한국이 지금 새겨 볼 대목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권력을 웃음거리로 삼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풍자와 해학은 늘 권력자에게 불편한 것이었다. 카워드가 살던 시대의 영국 역시 그를 완전히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후 그의 신랄한 유머가 긴축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는 이유로 한동안 외면당한 적도 있었다. 웃음은 시대의 공기를 못 견디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시대가 웃음을 못 견디기도 한다.
동시에 카워드의 삶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한 사람의 공적 업적과 사적 진실이 이렇게 오랫동안 분리되어 있어야 했던 시대는 과연 정상이었는가. 그가 죽고 나서야 세상은 그의 진짜 삶을 알게 됐다. 진실을 숨겨야 안전한 사회, 위선을 걷어내는 재주로 명성을 얻었으나 정작 자신의 위선은 감춰야 했던 인생. 이건 비단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 이 땅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적 자리에서는 한 얼굴, 사적으로는 다른 진실을 감춘 채 살아가는지 돌아볼 일이다. 권력을 향한 아부와 특권 유지를 위한 침묵, 그것을 예리한 농담 몇 마디로 정당화하려는 이들이 지금도 곳곳에 있다.
카워드는 신랄했지만 잔인하지 않았고, 가벼웠지만 얕지 않았다. 그의 재치는 시대를 조롱하는 무기였지, 시대에 아부하는 방편이 아니었다. 웃음으로 위선을 벗기는 일과 웃음으로 위선을 감추는 일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차이를 가려낼 줄 아는 눈,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런던 중심가의 노엘 카워드 극장(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