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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김민기와 문화운동 친구들, 유신 동토에 균열

김민기와 문화운동 친구들, 유신 동토에 균열
[사람들]
1973년, 한반도 남쪽은 온통 동토였다. 저벅이는 군홧발, 장갑차의 캐터필러 소리, 사방에 번뜩이는 정보기관의 눈초리…. 학원은 계엄군이 장악했고, 광화문 등 주요 거리와 기관 앞에는 탱크가 버티고 있었다. 학생회 지도부는 검거됐거나 도피 중이었고, 해산된 8대 국회의 야당 지도자들 역시 체포됐거나 연금 상태였다. 자유란 정부의 지시에 따라야 할 자유, 관제 반공 궐기를 할 자유, 정부 발표를 믿어야 할 자유만 있었고, 유신을 찬양할 권리만 있었다. 학교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개학하거나 휴업했고, 수업을 강제로 하거나, 수업을 강제로 하지 말아야 했다. 배워야 할 것, 배워선 안 되는 것도 공안기관이 결정했다. 학생 서너 명만 모이면 ‘짭새’가 기웃거리고, 10여 명만 모여도 해산당했다. 술 한잔하다가 말 한마디 잘못해 인생 조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 문리대 시위는 엄혹한 유신치하에서 발생한 최초의 시위였다. 이를 계기로 반 유신 시위는 들불처럼 번졌다. 사진은  서울대 문리대생들을 시위  장면. 사진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봄이 왔다. 그러나 예전의 봄이 아니었다. 학교는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 아래 개학했다. 4월이었다. 임진택이 휘경동 집에 돌아와 보니, 형사 둘이 찾아와 방을 뒤지더란다. 가져간 것은 달랑 공책 한 권. 다음날 남대문경찰서로 나오라는 전갈이 있었다. 김민기에게 빌린 공책인데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과 ‘실천론’을 번역해 놓은 것이었다. 공책은 김민기가 고교 선배인 문리대 정치학과 손학규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전공과목 공부를 위해 손학규가 갖고 있던 것을 김민기가 빌렸고, 그것을 임진택이 다시 빌려온 것이었다. 임진택은 외교학과였으니, 교양 차원에서라도 알아둬야 할 분야였다. 별다른 걱정 안 하고 경찰서에 갔다. 담당인 듯한 자가 다짜고짜 공책의 임자를 대라고 윽박질렀다. 임진택은 대뜸 낌새를 알아차리고, 입대한 친구의 이름을 댔다. 경찰은 일단 귀가시키며 이튿날 다시 출두하라고 했다. 임진택은 그 길로 줄행랑을 쳐 이화여대 근처 친구의 음악감상실에서 숨어 지냈다. 며칠 뒤 뜻밖에 김민기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뒤를 형사 둘이 미행하고 있었다. 경찰서로 끌려갔고, 조리돌림을 당했다. 쪽방촌에서 살며 빈민 운동을 하던 손학규 이름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전후 사정을 수소문해 보니, 당시 공안기관은 남산 부활절 예배 때 뿌려진 반(反)유신 유인물의 제작 및 살포 범인을 잡기 위해 ‘투망 수사’를 하던 중이었다. 사건이 터지면 아무나 사찰하고 잡아들여, 먼지 한 톨이라도 나오면 조리돌림을 하여 친구나 선후배를 불게 하고, 다시 이들을 잡아 족쳐 문제를 풀려던 게 당시 ‘투망 수사’였고, 당시 경찰과 정보기관의 관행이었다. 경찰 하수인들은 이 과정에서 부수입도 챙겼다. 임진택이나 김민기의 경우, 그 형제들을 윽박지르고 협박해 돈까지 뜯어갔다. ‘동생이 잡히면 잘 봐주겠으니….’ 형제가 10명이나 됐던 김민기 가족은 제 가족보다 훨씬 더 많이 뜯겼을 거라고 임진택은 말했다. 임진택이 김민기에게서 빌린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을 번역한 노트가 임진택의 집에서 발견되면서  둘은 유치장 신세가 되었다. 이 일로 김민기에게  번역 노트를 빌려준 손학규는 10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공안기관은 남산 부활절 예배때 뿌려진 반유신 유인물을 제작, 살포한 범인을 잡기 위해 투망수사를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배포의 주인공은 박형규 목사였다. 사진은  박형규 목사(가운데)가 1975년 민청학련 배후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나자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는 장면. 박형규 목사 뒤에서 고개를 옆으로 돌린 이가  마중나온 손학규. 사진출처:주간경향 유인물 배포의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였다. 손학규는 박 목사가 이끌던 도시빈민 선교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그 역시 부활절 사건과는 무관했다. 마구잡이 투망을 던지다가 ‘우범 학생’ 임진택에게서 ‘불온 공책’이 걸렸고, 이어 손학규가 잡히면서 박 목사까지 걸렸다. 손학규는 구속, 기소돼 반공법 위반으로 10월 형을 살다가,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사실 공책의 주인은 손학규도 아니었고, 그의 정치학과 친구인 신금호였다. 노동 현장에 투신하려던 신금호는 1972년 졸업하기 직전 갓 제대해 복학하려던 손학규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책과 노트를 맡겼다. 문제의 노트와 함께 소련 아카데미가 발간한 따위의 책자가 그중에 포함돼 있었다. 사건이 터진 1973년 봄 태백 도계탄광에서 노동하던 신금호도 결국 어렵게 입사(?)한 탄광을 나와 피신해야 했고, 결국 붙잡혀 구속, 기소됐다. 재판 중 신금호는 담당 판사에게 이런 내용의 탄원서를 냈다. 나는 정치학도다. 정규과목으로 모택동 사상도 공부했고, 민병태 학장의 정치사상사 강의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사도 포함돼 있었다. 모택동 사상을 둘러보고, 사회주의 사상을 살핀 게 무슨 잘못인가. 고려대 김상협 교수도 모택동 사상을 강의하지 않았는가. ‘모순론’이나 ‘실천론’도 포함돼 있었다.” 탄원서 덕분인지, 아니면 강신옥 변호사의 강개한 변론 덕분인지 그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사건도 일단락됐다. 부활절 사건과 애당초 무관했던 김민기와 임진택은 유치장 밥만 축내다가 석방됐다. 그러나 박형규 목사나 손학규 등이 잡혀간 게 저희 때문이 아닌가 싶어, 이들이 풀려나 자초지종을 파악할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렸다. 박형규 목사는 모두가 침묵할 때 처음으로 유신체제에 반기를 든 신망 높은 종교인이자,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보호자였다. 그가 담임을 맡고 있던 제일교회는 개신교계 민주화운동 및 도시빈민운동의 보루였고, 마당극 등 문화운동 확산의 거점이었다. 이런 ‘사소한’ 도전이 있었지만, 1973년은 전반적으로 박정희에게 그의 18년 장기 집권 중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군이 압도적 물리력으로 학생과 시민사회를 짓눌렀고, 경찰은 오가작통제 이상으로 촘촘하게 국민을 감시했으며, 중앙정보부는 때마다 무장간첩 침투 혹은 고정 간첩단 사건을 발표해 사회를 얼어붙게 했다. 1973년 발표된 간첩단 사건만 무려 8건이나 됐다. 북의 대남 침략을 강조해 남쪽 민주화운동의 목줄을 조였다. 동시에 이율배반적이게도 남북 고위당국자 회담, 조절위원회 회의, 적십자 회담 등 속셈이 뻔한 남북 위장 평화 공작을 이어갔다. 7·4 남북공동성명 등 유신 쿠데타 전야에 그렇게 속고도 많은 이들은 긴가민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납치돼  14일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대중 전대통령(당시 야당 지도자)이 기자들과 인터뷰 도중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다.   납치 과정에서 상해를 입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치료하고 있는 이희호 여사. 무엇보다 식겁한 사건은 1973년 8월 벌어진 김대중 납치 및 살해 미수였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 전 야당 대통령 후보를 일본에서 납치해 죽인 뒤 현해탄에 버리려다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해, 한국으로 압송한 것이다. 1969년 야당의 새로운 별로 부상한 김영삼이 당한 질산 테러의 연장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삼선개헌을 추진할 때 김영삼은 40대 초반의 제1야당 원내총무로서 박정희의 유력한 도전자이자, 삼선개헌의 걸림돌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 김영삼을 권력의 사주를 받은 괴한 3명이 벌건 대낮에 질산 병을 투척해 테러하려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해 독재자가 장악한 나라에서는 흔한 게 정치 테러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절 다반사로 벌어졌다. 봉건왕조의 제왕을 부활하려던 이승만은 저보다 더 사랑받고 존경받는 정치인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제거했다. 김구, 여운형, 신익희, 조봉암 등이 암살당하거나, 의문사 혹은 사법살인을 당했다. 박정희 뒤를 이은 전두환은 김대중을 내란죄로 몰아 사법살인 하려 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여전히 껄끄러웠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22대 총선을 앞두고 야당인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는 괴한에게 경동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식칼 테러를 당했다. ‘정치 테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을 잇는, 대한민국의 이른바 ‘보수’로 위장한 극우 세력의 유전자였다. 박정희와 유신 정권에게 김대중은 절대적 위협이었다. 그는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정권의 초현실적인 불법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90만여 표 차로 따라붙었고, 부정선거가 어려웠던 대도시에서는 모두 박정희를 앞섰다. 게다가 든든한 ‘뒷배’로 여겼던 미국이 ‘리틀 히틀러’ 박정희보다 김대중을 더 지지하는 듯한 조짐도 있었으니, 유신 정권으로서는 가만둘 수 없었다. 1972년 7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앞두고 위장 평화공세에 열을 올릴 때였다. 김대중은 그의 진심을 떠보기 위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제안했다. 쇼윈도 남북회담만 할 게 아니라 동시 유엔 가입을 통해 남북이 실질적인 평화를 이뤄내자는 것이었다. 1년 뒤 미국 국무부는 ‘유엔 동시 가입’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거부하자니 대북 평화공세가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고, 받아들이자니 장기 집권에 꼭 필요한 ‘북한의 남침 위협’ 선전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김대중이라는 유력한 정적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으니, 박정희와 그 측근으로서는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미국이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을 지지한 건 1973년 7월 18일이었다. 김대중이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납치돼 대한해협 공해상의 망망대해로 끌려간 건 그로부터 20일 뒤였다. 다행히 미국 CIA가 납치 사실을 알아차리고, 일본 정부에 통보해 납치를 막도록 하는 한편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직접 김대중 암살 시도를 중지하라고 압박했다. 한미 관계가 결딴날 상황이 되자, 중앙정보부는 살해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국내로 끌고 오는 것으로 공작을 바꿔야 했다. 북한으로서는 이런 남한 박정희 정권과 평화 협상을 계속할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김일성 영구 집권을 명시한 헌법을 제정하는 등 위장 평화공세의 단물을 빨아먹을 대로 빨아먹었다. 북한은 8월 28일 김대중 사건을 이유로 남북대화의 중단을 선언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유신체제에 이르기까지 전가 보도로 활용했던 ‘남북회담’을 포기해야 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파장은 심각했다. 박정희는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의지처였던 미국으로부터 비난과 압박이 쏟아졌다. ‘돈줄’이었던 일본도 외면했다. 악화한 국내 여론의 눈치를 보던 일본 자민당을 입막음해야 했고, 그래서 오히려 거액의 정치자금을 다나카 수상에게 찔러줘야 했다. 김대중 납치 살해 시도 사건은 그동안 유신의 겁박으로 숨죽이던 ‘재야 민주화 운동권’과 기만적인 남북 위장 평화 공작에 기대를 걸었던 시민을 깨우고, 정권의 눈치를 살피던 야당을 움직이게 했다. 무엇보다 대학가를 끓어오르게 했다. 철벽과도 같았던 유신체제에 작지만, 심각한 균열을 냈다. 이번에도 시작은 서울대 문리대였다. 당시 학생 운동권은 1년 전 위수령 때 주력이 대부분 체포되거나 군대로 끌려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서울대 운동권의 배후 지도부였던 심재권(문리대,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 조영래(사법연수원생), 장기표(법대), 김근태(상대), 이신범(법대) 등이 또 다른 조작 사건인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수배 중이었다. 남아 있는 이들은 1974년 학기 초 ‘유신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을 준비하기 위해 ‘잠수’를 탄 상태였다. 유신과의 대결에 대한 공감대가 커도, 이를 조직하고 활성화해,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유신체제에 타격을 가할 역량이 부족했다. 문리대 학생들이 터트린 유신 후 첫 시위의 디데이는 10월 2일. 유신 선포 후 1년째 되는 달이었다. 시작은 참으로 옹색했다. 문리대 정문 근처엔 150여 명의 학생만 있었다. 교문 밖에는 그보다 많은 시위 진압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다. 진행도 신통찮았다. 학생들은 몇 차례 구호가 끝나자, 더 준비한 게 없었던지 뻘쭘해졌다. 경찰은 태연했다. 하는 꼴을 보자니 시위는 곧 시들해지리라 낙관하고 있었고, 학생들은 낙담하고 있었다. 그때 시위에 다시 불을 붙이고, 요원의 불길로 확산시킨 건 서울대 ‘문화패’였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 유신반대 집회에  뿌려진 시국 선언문. 사진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들해진 시위에 기름을 부은 이는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을 이끌던 임진택이었다. 사진은 시대의 소리꾼 임진택의 최근 모습.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뒤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문리대 연극반을 이끌던 임진택이었다. 6개월여 동안 손학규 선배, 박형규 목사 일로 자책하고 있던 그였다. 임진택은 연단에 오르자마자 경찰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경찰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같은 구호를 두세 번 외치다 보니 싱거워졌다. 기승전결에 따르면 경찰을 향해 무언가 경고해야 했다. 그 역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뒷말이 흘러나왔다. 도리가 없었다. ‘물러가지 않으면….’ 그러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니, 이을 말이 없었다. 응징하겠다고 하자니 소도 웃을 일이고, 그렇다고 우리가 물러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몇 차례 마른침을 삼켰다. 빈정거리던 경찰도, 따라 외치던 학생들도 긴장했다. 3~4초가 흘렀을까, 임진택에게는 그 시간이 서너 시간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배짱 좋은 임진택이었지만 입안이 타들어 갔다. 그러나 연극 무대에서 닳고 닳은 임진택이었다. 그 입심과 임기응변 아니 공연예술 용어로는 ‘애드립’은 서울대를 넘어 대학가에서 유명했다. ‘에라 모르겠다,’ 임진택은 본능에 맡겼고, 나오는 대로 질렀다. 조금 있다가 물러가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순간 정문 이쪽과 저쪽 양쪽에서 폭소가 터졌다. 이 재담 한 마디는 학생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을 한 방에 날려 버렸고, 위험천만한 시위를 한번 붙어볼 만한 겨루기로 바꿔 버렸다. ‘유신 철폐’라는 금단의 구호가 바로 동숭동 일대를 흔들었다. 위축돼 주변에서 얼쩡대던 학생들이 가담하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곧 500여 명으로 늘었다. 교문 진출을 위해 일진일퇴를 하던 학생들은 교내를 돌며 시위를 이어갔고, 교문 앞에 주저앉아 연좌시위를 하며 박정희와 유신 성토대회를 벌였다. 저녁이 되자 강당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희대의 농성이 시작됐다. 농성을 이끈 건 문리대 연극 패였다. 학교 당국의 불허로 공연하지 못한 김지하 작 을 관객과 함께 즉석에서 공연하는 등 박정희와 유신체제에 대해 그동안 하지 못한 말과 조롱과 비판을 쏟아냈다. 강당은 그야말로 한바탕 마당극이었다. 유신의 동토에 생긴 작은 ‘해방구’였다. 사실 여기에도 원전이 있었다. 9년 전 6·3항쟁 당시 김지하의 주도로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4·19학생혁명기념탑 아래 가마니를 깔고 진행한 단식 농성은 매일 즉흥적으로 제작하거나 기획한 부속 행사가 만발했다. 대표적인 게 풍자극 이었다. 정문 밖과 안으로 쌍방향 확성기를 설치한 방송반은 선언문, 결의문, 성토문 등 각종 선동 문건을 계속 읽어대고 매일 밤낮으로 풍자니, 화형이니 성토니 하며 한두 가지씩 이벤트를 마련했다. 촌극도 하고 징과 장구, 꽹과리 등의 풍물도 등장했다. 누군가 말했다. ‘예술제로군!’”(김지하 회고록) 김지하가 농성하며 지은 은 박정희를 조선의 연산군에 빗댄 것으로, 1973년 10·2 농성 때 즉석 공연한 김지하 대본 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단식 농성은 100시간 계속됐고, 그동안 전 국민의 이목이 농성장으로 쏠렸고, 각 대학의 동조 단식 혹은 농성으로 확대됐다. 결국 6월 3일 대회전과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 선포로 이어졌다. 해학과 풍자와 놀이가 어우러진 농성은 신의 한 수였다. 경찰의 예상과 달리 이 농성은 질기게 이어졌고, 동토 한 구석을 녹이는 모닥불이 되었고, 그 불씨는 인근 다른 서울대 캠퍼스로 날아가 불길을 지폈다. 4일에는 법과대학생 200여 명이 교내 ‘정의의 종’ 앞에 모여 유신 철폐를 촉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뒤 가두로 진출했다. 5일에는 상대 학생 300여 명이 교정에 모여 ‘반 유신’ 시위를 한 뒤 그 의지를 알리는 차원에서 15일까지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이어 서울 시내 대학가로 번졌다. 10월 6일과 10월 10일 이화여대와 숙명여대가 가을 축제를 취소하기로 결의했다. 11월엔 지방 대학으로도 확산했다. 5일 200여 명이 시가행진을 벌인 경북대를 시작으로 부산, 광주, 대전의 대학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에서 투석과 최루탄의 공방전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시위 외에도 동맹휴학, 시험 거부, 검은 리본 달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유신 철폐’ 여론을 확산시키고, 시민사회의 동참을 끌어냈다. 11월 30일 발행한 문리대 학보 권두언은 학생과 시민들에게 선택과 결단을 촉구했다. 기나긴 어둠의 연속이다. ~이제 우리는 歷史(역사)의 단순한 증언자로부터 그 소용돌이에 던져진 歷史(역사)의 主體(주체)가 되고 있다. 이 大地(대지)의 아들로 歷史(역사)의 創造者(창조자)가 될 것인가? 방황하며 도피하는 異邦人(이방인)으로 끝날 것인가? (중략)” 12월에는 고교생까지 학교에서 뛰어나왔다. 경기고와 대광고 학생들은 1일 교문 밖 진출을 시도했다. 5일에는 광주일고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고, 8일에는 신일고생 120명이 4·19 묘지까지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문교부는 황급히 조기 겨울방학을 실시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정보기관과 경찰을 닦달했다. 경찰은 시위 관련자들에 대한 무차별 검거에 들어갔다. 2일, 4일, 5일의 서울대학교 시위와 관련해서만 학생 215명을 연행하여 23명을 구속했고, 9명을 불구속 입건, 61명을 25일간 구류 조치했다. 정권에 등이 떠밀린 학교 당국은 23명을 제적하고, 18명에겐 자퇴를 압박했으며, 56명에겐 무기정학에 때렸다. 유신의 철벽에 균열을 낸 10.2 시위였다. 당시 문리대 연극 패의 풍자와 놀이는 유신의 총과 칼 그리고 군홧발에 주눅 든 양심을 일으켜 세웠고, 자유와 정의를 향한 학생들의 열망을 되살렸다. 이 ‘문화적 저항’은 훗날 박근혜를 탄핵하고 윤석열의 계엄을 저지한, 전혀 새로운 형식의 이른바 ‘K-저항’의 뿌리가 되었다. 10·2 시위는 전국의 학생들에 이어 교수 사회를 깨웠고, 재야와 정치권을 흔들었다. 한신대 김정준 학장 등 교수 10명은 삭발로 학생 시위에 지지를 표시했고, 이화여대 교무위원회는 정보기관원의 학내 횡포 근절과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를 정권에 촉구했다. 12월 13일 전국 대학 총학장 회의는 ‘학생 시위의 책임은 정부에 있다’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유신의 동토에서 깨어난 재야인사들이 11월 5일  서울 종로구 YMCA에서 시국 간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가운데 양복 입은 이가 김재준 목사, 그 왼쪽이 함석헌 선생, 지학순 주교, 소설가 이호철, 오른쪽 맨 앞 김지하, 계훈제, 법정, 천관우. 사진출처: 동아일보   시민사회는 11월 5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15인 연서로 시국 선언을 발표하는 것으로 그동안의 침묵에서 깨어났다. 12월 4일에는 장준하 주도 아래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발기인대회가 열렸고, 12월 24일에는 함석헌, 장준하, 지학순, 법정, 김재준, 김동길, 천관우 등 각계 인사 30명이 모여 운동본부를 발족했다. 개헌 청원 서명은 시작한 지 불과 10일 만에 30만 명을 넘었다. 1973년 말 불과 1년 만에 유신체제는 요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유신 철폐’, ‘박정희 정권 타도’의 저항에 직면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는 군, 중앙정보부와 경찰 그리고 검찰과 사법부가 있었다. 저항 세력 박멸을 위한 총동원 체제가 유신이었다. 유신헌법에는 국가 공권력, 물리력을 멋대로 동원하고 사용할 장치가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망나니 칼이 긴급조치였다. 그리하여 폭풍 전야와도 같은 시민사회와 유신 정권의 대치는, 김지하가 ‘차라리 죽음이라 하자’고 했던 1974년 1월로 넘어가고 있었다.  2017년 5월 경남 진주창작탈춤한마당에서 공연한 소리굿 아구2 공연 장면. 소리굿 아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변주로 공연되고 있다. 사진출처: 유튜브 강원영상콘텐츠 갈무리 김민기도 ‘손학규 노트’ 사건 이후 자책 속에서 긴 시간 칩거했다. 감시는 더 심해져, 나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으려는 모색은 그해 말까지 계속됐다. 12월 서울대 문화운동 패의 일원이었던 음대생 이종구 졸업 발표회가 있었다. 발표회가 끝나고 문화운동의 ‘대학생 교주’들이 모여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김민기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10·2 시위 때 확인된 ‘문화의 힘’을 재현할 새로운 형식의 판 혹은 마당을 만드는 일이었다. ‘소리굿 아구’가 그것이었다. 연극반의 임진택과 가면극연구회의 채희완 등 서울대 문화운동 패의 역량을 결집한 이 공연은 1970년대 중후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 전선의 선봉 혹은 문선대 역할을 했던 ‘마당극’의 효시가 된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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