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협, ‘퍼주기’와 ‘안 주기’ 넘어 ‘원칙 있는 잘 주기’ [뉴스] 오태규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이사장 대리)
남북 경협은 남북 관계의 기상도라고 할 수 있다. 남북 관계가 좋으면 경협이 활발하게 잘 진행됐고, 남북 관계가 나쁘면 경협도 중단되거나 축소됐다. 현재 남북 경협은 제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론 의 경제적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남북 경협 80년-절망과 기교의 역사』(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조동호 지음, 2025년 9월)는 1945년 해방 이후 남북 관계를 경제 협력이라는 잣대로 정리한 책이다. 저자인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명예교수는 오랜 기간 북한 경제를 연구하며 정책 수립에도 참여해 온 전문가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남북 경협을 단순한 경제 교류를 넘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복원해 냈다. 정치적 관점이 아닌 경제적 관점에서 남북 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한 독보적인 연구서다.
남북 경협 80년 역사는 절망과 기교의 도돌이표
저자는 남북 경협이 해방과 분단 때부터 시작되어 1988년 노태우 정권 때의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본격화한 남북 경협 80년 역사를, 한마디로 절망과 기교의 역사 로 정의했다. 절망과 기교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천재 시인 이상이 한 말이다. 아무 사람이나 시를 안다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보고 절망했고, 절망을 피하려고 기교를 부렸으나 너무 기교를 부리는 바람에 시가 아닌 시를 쓰는 절망을 맛봤다는 뜻이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이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저자는 이 표현을 남북 경협 역사에 대입해, 근본적인 신뢰 회복 없이 정부의 의지만 앞세운 정책은 한낱 ‘기교’에 불과하며 정치·군사적 파고에 좌초되어 결국 ‘절망’을 반복해 왔다고 진단한다. 그런 절망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원칙 있는 잘 주기 로 남북 경협의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장이다.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모두 5장으로 되어 있다. 1장(남북 경협의 이해)에서는 남북 경협의 정의와 의의, 분류와 절차, 북한 정권의 시대별 인식 변화를 살펴본다. 2장(남북 경협의 역사적 흐름)에서는 분단 이후부터 적대 와 협력 을 반복해 온 남북 경제 관계 80년사를 종합 정리한다.
진보보수가 대립해 온 6개 쟁점과 접점
3장(남북 경협의 부문별 평가 1: 교역)과 4장(남북 경협의 부문별 평가 2: 투자)에서는 남북 사이에 실질적으로 이뤄졌던 경제 협력의 사례를 사안별로 나누어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이 부분은 일반 독자에게는 큰 관심이 없겠지만, 실질적으로 경협을 했거나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내용이다.
특히, 정부까지 가세해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남북 경협의 상징 사업인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에 대한 성과와 한계 분석은, 앞으로 남북 경협이 재개될 때 정부 당국자들이 꼭 참고해 봐야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사업이 끝난 뒤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고 검증한 것이기에, 이념과 진영에 휘둘리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
이 책의 백미는 제5장(남북 경협의 주요 쟁점과 대안의 모색)이다. 저자는 남북 경협은 경제 논리보다 정치·사회적 논리가 앞서는 특수성을 가진다는 점을 주시해, 진보와 보수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해 온 쟁점을 분석하고 그 접점을 모색한다. 저자가 고른 쟁점은 모두 6가지다.
투명성 확보한 ‘원칙 있는 잘 주기’가 국익에 기여
첫째, 상호주의를 둘러싼 대립이다. 즉, 상호주의를 엄격하게 할 것인가, 유연하게 할 것인가의 대립이다. 보수는 북한의 실질적인 태도 변화(핵 포기, 도발 중단 등)가 전제되지 않은 지원은 일방적인 시혜에 불과하다고 본다. 진보는 경협을 통해 북한을 개방으로 이끄는 촉진제 로서의 역할을 중시하며, 유연한 상호주의를 강조한다. 여기서 저자는 경협의 선순환을 위해 어느 정도의 비대칭적 양보 가 허용될 수 있는가가 논쟁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2000년 6월15일 평양의 송별 오찬장에서 남과 북 대표들은 ‘작은 통일’을 이루었다. 김대중·김정일·이희호 모두 일어나 손을 잡고 흔들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장면은 ‘6·15남북공동선언’의 상징이 됐다. 저자는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겉모습이 실체를 넘어선 ‘문과기실(文過其實)’로 평가했다. 자료사진
둘째, ‘퍼주기’ 논란이다. 진보는 남북 경협과 지원이 북한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이나 평화비용이기에 퍼주기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보수는 북한 정권의 통치 자금이나 군사력 강화로 전용되는 것 아니냐고 날을 세운다. 저자는 무조건적인 퍼주기 도 문제지만, 전략 없는 안 주기 역시 기회비용을 발생시킨다면서, 투명성을 확보하고 국익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원칙 있는 잘 주기 의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셋째, 정경 분리 대 정경 연계 논란이다. 진보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교류를 연계하지 않는 쪽이고, 보수는 강력하게 연계하자는 쪽이다. 저자는 북한의 핵실험이나 도발 때마다 경협이 중단되면서 기업들이 막대한 피해를 봤던 사례를 통해, 경협의 안정성을 확보하면서도 안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정교한 연계 전략 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두 국가론’은 수용하지 않는 것이 더 이익
넷째, 교역 통계의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여기서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기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통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남북과 제3국(중국 등)이 집계하는 남북 교역 통계가 서로 달라 정책 수립에 혼선을 주니, 경협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향후 전략을 짜는 데 필수적인 기초 자료를 최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북한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너무 저평가되어 있어, 오히려 건설적인 남북 경협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우려한다.
여섯째, 2023년 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식화한 적대적 두 국가론 을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쟁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혼재된 의견이 존재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동안 남북 경협이 민족 내부 거래 라는 특수 관계에 기반해 진행해 왔던 점을 들며, 북한이 남한을 동족이 아닌 외국 으로 대하겠다는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두 국가론 은 수용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수용하지 않는 것이 더 이익 이라고 본다.
이 6대 쟁점은 과거의 실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체크리스트와 같다고 보면 된다.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절망과 기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책 입안자가 추진자들이 점검할 사항들이다.
절망의 논리 기교의 한계 벗어난 새로운 접근 방식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저자는 문재인 정권의 대북정책을, 애는 썼으나 보람이 없었던 ‘노이무공(勞而無功)’으로 평가했다. 자료사진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을 가감 없이 평가한 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각 정권이 펼쳤던 전략들이 왜 지속 가능하지 못했는지 지적한다. 남북경협의 꿈을 강력하게 꾸었던 김대중 정부의 정책은 겉모습이 실체를 넘어선 ‘문과기실(文過其實)’로, 노무현 정부는 지나침이 미치지 못함과 같은 ‘과유불급(過猶不及)’으로 평가한다. 반면 원칙만을 강조하다 구체적 전략 부재로 상황을 악화시킨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너무 꼿꼿해 부러뜨린 ‘교왕과직(矯枉過直)’과 ‘자승자박(自繩自縛)’으로, 문재인 정부의 거창했던 평화 프로세스 역시 애는 썼으나 보람이 없었던 ‘노이무공(勞而無功)’으로 꼬집었다.
그는 결론적으로 남북 경협 정책은 구조적 한계 속에서 기인한 좌절과 이를 우회하려는 시도 사이에서 재귀적 운동만 반복했을 뿐이다. 그러니 어느 정부든 남북 경협을 바라보는 철학은 빈곤했고, 성과는 미흡했다 라고 총괄한다. 그리고 남북 경협이 의미 있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절망의 논리 에 안주하지 않고, 기교의 한계 에 머무르지 않는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과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라고 강조한다.
긴 호흡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한반도와 국제정치 질서의 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하며,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상상력이 남북 경협의 새로운 길을 만들 것이라는 얘기다.오태규 ohtak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