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전 오늘, 박정희와 차지철에 총구 돌린 김재규 [뉴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1951~1974)이 쏜 총탄에 대통령 박정희(1917~1979)의 아내 육영수(1925~1974)가 숨졌다고 수사당국은 발표했다. 겨눈 것은 남편이었으나 쓰러진 사람은 아내였다는 것이다. 그 뒤 박정희가 크게 흔들렸다고 곁에 있던 이들은 전한다. 빈자리는 궁정동 안가의 술상이 채웠고, 이름난 가수와 배우가 불려 다녔다는 증언과 소문이 숱하다. 백성은 머리카락과 치마 길이까지 단속당하고 밤 열두 시면 집에 갇혔는데, 안가의 밤에는 통행금지도 눈을 감아 준 모양이다.
1968년의 김재규(위키피디아)
중령 출신 경호실장, 별 셋 정보부장 위에 앉다
차지철(1934~1979)은 육영수가 숨지고 일주일 만에 경호실장에 올랐다. 공수부대 장교로 중령까지 오른 그는 대통령의 몸을 지키라는 자리에서 곧 대통령의 귀와 입까지 지키려 들었다. 비서실과 중앙정보부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었고, 야당 총재 김영삼(1927~2015)의 의원직 제명에 앞장섰으며, 부마항쟁 때는 강경진압을 밀어붙였다. 그가 했다고 전하는 말이 압권이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끄떡없었는데 우리라고 100만~200만 명쯤 못 죽이겠느냐”는 것이다. 폴 포트(Pol Pot, 1925~1998) 정권의 희생자는 대체로 150만~200만 명으로 추정하니, 그는 숫자부터 부풀렸고 교훈은 거꾸로 배웠다. 산수도 도덕도 낙제였던 셈이다.
김재규(1926~1980)는 육군중장으로 군복을 벗은 뒤 국회의원과 건설부장관을 거쳐 1976년 말 중앙정보부장에 올랐다. 박정희와는 같은 구미 쪽 고향에 육사 2기 동기였다. 김재규와 차지철은 군대계급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인데 권력의 계급은 거꾸로 서 있었으니, 별 셋 단 정보부장이 중령출신 경호실장 눈치를 보며 밥맛을 잃었다는 얘기가 돈다.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던 독재자 박정희가 그 월권을 묵인했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KBS 역사저널 그날] 갈등의 폭발, 김재규 vs 차지철 ㅣ KBS 210119 방송
1979년 10월 26일, 총성이 울렸다
그해 10월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쫓겨나고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이 들고 일어났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했고 차지철은 탱크로 밀어버리자고 했다. 이대로 두면 더 많은 젊은이가 죽는다고 김재규가 보았다는 것이 그를 옹호하는 쪽의 풀이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주색을 동반한 궁정동 만찬 자리에서 그의 권총이 박정희와 차지철을 쓰러뜨렸다. 본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되찾는 혁명이라 했고, 비판하는 쪽은 권력다툼의 끝판이라 한다. 어느 쪽이든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에 장관, 정보부장까지 지낸 유신의 핵심 일꾼이 유신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역설은 지워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독재자가 사라진 자리를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1931~2021) 일당이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의 피로 채웠다. 문을 열었더니 더 거친 군인이 들어앉은 꼴이다.
10월 4일|1979년 오늘, 김영삼 총재 「국회의원직 제명동의안」 변칙 통과 | 오늘의 의정사
16일 만의 사형선고, 45년 만의 재심
군법회의는 1979년 12월 4일 첫 공판을 열어 20일에 김재규에 1심 사형을 선고했고, 항소심은 엿새 만에 끝났으며, 대법원 확정 며칠 뒤인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이 집행됐다. 광주가 피로 물들던 때였다. 1980년 대법원은 8대 6으로 갈렸다. 내란목적살인에 반대한 대법관 6명 가운데 5명은 그해 8월 사표를 냈고, 변호인단은 이를 신군부의 압박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재규 유족은 2020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은 2025년 2월 수사과정의 구타와 전기고문 같은 가혹행위를 인정해 재심개시를 결정했고, 대법원이 그해 5월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해 확정했다. 지난 9월 30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기존 유죄판단을 유지해 달라 했고, 선고는 오는 12월 16일이다. 쟁점은 국헌문란의 목적, 곧 이 일이 내란 이었느냐다. 2024년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을 둘러싼 내란 우두머리 혐의재판이 한창인 나라에서 내란이 아니었다 는 변론이 법정에 오르니, 역사는 가끔 짓궂은 연출가 노릇을 한다.
교수대 앞에 선 김재규의 마지막 모습. 재판 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그는 짧게 없다고 답했다. 1979년 12월 20일에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이듬해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경향신문
오늘 우리에게 남긴 숙제
첫째, 경호는 몸을 지키는 일이지 불법을 지키는 일이 아니다. 12·3 계엄 선포 뒤 대통령경호처를 동원해 체포영장 집행을 막은 혐의 등으로 윤석열은 지난 7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1심 재판부는 윤석열이 경호처 공무원들을 사실상 사병처럼 부렸다고 꾸짖었다. 차지철의 후예가 반세기 만에 법정에 선 셈이다. 경호의 한계와 지휘·감독 체계를 법으로 또렷이 못 박아야 한다.
둘째, 숨구멍을 틀어막으면 총구가 열린다. 야당 총재를 국회에서 쫓아내고 항쟁을 총칼로 누르려던 길 끝에 1979년 가을이 있었다. 비판과 선거와 언론이 살아 있어야 권력은 피 흘리지 않고 바뀐다.
셋째, 총으로 연 새벽은 오래 가지 않지만 달라졌다. 거사 뒤에 들어선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학살범 전두환의 신군부였다. 2024년 12월 우리는 달랐다. 시민이 국회로 달려갔고, 국회가 계엄해제를 의결했으며, 헌법재판소가 파면했다. 맨손과 제도가 총보다 셌다. 이 길을 지키는 것이 오늘의 몫이다.
넷째, 졸속의 반대말은 숙고다. 16일 만의 사형선고를 사법부의 부끄러움이라 부르면서도, 우리는 아직 억울한 죽음의 재심 문턱을 높게 두고 있다. 형사재심은 청구인이 숨지면 상속인이 이어받지 못해 살아 있는 동안 개시결정이 확정돼야 한다고 변호인단은 짚는다. 시간은 유족 편이 아니니 법을 고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평가다. 김재규를 영웅으로 떠받들지도, 악당으로만 내치지도 말자. 그는 유신의 부역자이자 유신의 종결자였고, 한 시대를 닫았으나 다음 시대는 열지 못했다. 12월 16일의 김재규 판결문은 감정이 아니라 증거로 읽을 일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 검증하는 모습. 연합뉴스 DB.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