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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백정의 인권회복 이끈 천석꾼 양반의 결단

백정의 인권회복 이끈 천석꾼 양반의 결단
[사람들]
[일러두기] 지난 100년간의 민족사에서 그 생애를 온전히 기려야 할 인물들이 적지 않다. 백촌 강상호 선생도 그런 이들 중 한 분이라고 본다. 경상남도와 진주 지방에서나 좀 알려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들 강인수 선생이 연세 90세에 요즈음 건강도 좋지 않다. 그의 남은 꿈은 단 하나다. 선친의 그 특별한 삶에 관하여, 자신의 기억과 가지고 있는 자료들이 흡족하게 담긴 책을 만들어 어르신의 영전에 올리는 것이다. 그 같은 작업이 매우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해 형평사 운동을 중심으로 한 백촌의 삶을 정리해 본다. 백정은 사람인가 1923년 4월 초. 경상도 진주의 한 공원에서 양반집 아들들이 백정(白丁)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은 백정마을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띤 백정 하나를 끌고 나왔다. 그리고 개를 잡으라고 시켰다. 거절했다. 그에 격분하여 집단폭행을 했고, 백정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일제의 경찰은 이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독립운동가 백촌 강상호(1887~1957)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만일 그가 그 사건에 대하여 충격을 받기는 커녕, 별 생각 없이 지나쳤다면, 조선의 백정들은 그 악랄한 규범의 굴레를 쓴 채 짐승만도 못한 시간을 더 길게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한다. 상투머리에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표시를 해야만 한다. 여자 백정들은 반드시 검정색 물을 들인 치마를 입어야 한다. -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다. 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다. -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고, 거적떼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보다 높은 곳에 봉분을 짓지 못한다. 백정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도 말을 높여야 한다.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 양인(良人.평민)이 쓰는 생활언어를 쓰면 안된다. 조선백정이 지켜야 하는 규범들, 야만의 율법이었다.   백촌 강상호 선생.  백정도 사람이다 1923년 4월 24일, 마침내 경상도 진주에서 백정해방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공원살인사건’이 계기였다. 강상호가 주동하였다. 100년 전 일제 치하에서, 이처럼 혁명적인 계급투쟁이, 천석꾼으로 양반이면서 존경받는 지식인의 결단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삽시간에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다. 나도 백정이다!”, 하며 커밍아웃한 인구가 40만명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형평운동이다. 형평운동과 백정의 역사 고기를 저울에 달아서 파는 일이 백정들의 생업이다. 형평사는 저울대(衡)와 같이 평등(平)한 세상(社)을 만들자는 계급투쟁단체였다. 5인의 발기인으로 출범했다. 양반출신 강상호 신현수(1893~1961) 천석구(생몰연도 미상), 백정출신 장지필(1882~1958)과 이학찬(생몰연도 미상)이라는 인물이 그들이었다. 장지필은 진주에서 청년기를 보낼 때, 일본인 지주의 도움으로 메이지대학에 유학했다. 조선인 유학생 가운데 가장 특출했다. 귀국하여 총독부에 취직하려고 절차를 밟는 동안, 자신의 호적에 ‘도한 (屠漢:가축 도살자)이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미안해서” 취업을 포기하고 백정해방운동에 헌신했다. 백정은 조선왕조 초반에 등장하여 500년 동안 깊고 아픈 유린과 모욕을 받으며 살았다. 고려의 지식인들 가운데 왕조가 멸망했을 때, 새 왕조의 권력행사에 복종하지 않은 부류가 있었다. 가장 거세게 저항했던 무리를 백정이라는 특수계급으로 분류하고, 거주지를 포함, 일상생활 전반을 비인간화하였다. 형평운동이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존엄한 존재로 대우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핵심은 백정들의 인권을 양인들과 똑같이 정상화하자는 것이었다. 형평사주지문(衡平社主旨文)과 노예해방선언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根本)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그러므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本社)의 주지(主旨)이니라. 금아(今我) 우리 조선의 백정(白丁)은 여하한 지위와 압박에 처하여 있는가. 비(卑)하며, 빈(貧)하며, 열(劣)하며, 약(弱)하며, 천(賤)하며, 굴(屈)하는 자 누구인가. 희(噫)라! 우리 백정이 아닌가. 애정으로 상호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공동의 존영(尊營)을 기하고자, 이에 사십만이 단결하여 본사의 목적된 바, 그 주지를 선명히 표방하고자 하노라. 1923년 4월 24일. 조선 경남 진주 형평사 발기인 일동 윗글은 전문을 반으로 줄인 것이다. 상식인들은 미국의 노예해방선언문을 떠올릴 것이다. 실은,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은 노예들과 타협할 마음도 없었고,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전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도를 구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노예해방 없이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해야만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링컨이 했던 말들이다. 형평사 주지문은 바로 이 관점에서 링컨의 노예해방선언과 차이가 크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다.” 이 문장이 사상적 기반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대통령 1인의 권력행사(행정명령)로 이루어진 문서행위였지만, 형평사 주지문은 40만 백정의 조직적 운동의 선언문이고 출사표였다. 이는 인류역사를 통틀어 천부인권사상의 가장 극적인 실천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흑인노예를 해방시켰으며,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선언하다가 백인우월주의자의 총에 맞았다. 링컨은 암살자 덕분에 영웅이 되었다. 버락 오바마는 링컨을 가장 존경한다. 미국인들의 오바마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The Black Lincoln’이다.   경남문화예술회관 광장에 세워져 있는 형평운동 기념탑. 반형평운동(反衡平運動) 형평사의 운동목표는 당연히 혁명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운동이 모든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백정을 천시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다. 그들은 형평사 모임이 있을 때 습격하여 폭력을 행사했다. 그 드센 저항 앞에서도 강상호는 초지일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말이 좀 통하는 소수인사들도 손을 잡지는 않았다. 백정과 평민 간의 계급충돌이었다. 우리가(양반이) 어떻게 백정과 평등하게 지낸다는 말이오.” 모두들 이 마음이었다. 형평운동이 시작된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24개 마을의 농민들 2000여 명이 형평사를 해산시키려고 뭉쳤다. 백정들의 차별철폐운동과 이를 돕는 지역의 양반 지식인들을 몰아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백정들의 조직을 압박하기 위하여 우육불매동맹(牛肉不買同盟)을 맺고, 형평운동을 후원한 조선노동공제회에 대한 배척을 결의했다. 반대파 수백 명이 진주 중심가에 모여 ‘형평사 공격’, ‘새백정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라고 쓴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강상호의 집에 돌을 던지면서 ‘새백정 강상호’를 지속적으로 외쳤다. 장독이 박살났고, 집안 식구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새백정’이란, 형평운동 주도세력인 양반 지식인들에게 이제부터는 당신들도 백정이오!”, 라고 하는 말이었다. 시위대는 소를 끌고 와서, 새백정 강상호야, 소 잡아라!”, 하며 소리쳤다. 형평운동의 성과 – 나도 백정이다!”, 40만 백정의 커밍아웃 그러나 생각해보라! 형평사가 창립된 이후, 나도 백정!”이라고 커밍아웃한 인구가 40만 명이었다. 강상호 등 주도세력의 의지와 백정들의 해방염원이 합쳐진 기세를 농부와 상인들 수백 명이 꺽을 수는 없었다. 압도적이고 거대한 물결, 즉 시대정신이었다. 똑같은 상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끼리는 전후좌우에 있는 이웃들 모두가 바로 ‘나’다. 그래서 동병상련(同病相憐) 공동체보다 더 강력한 연대조직은 세상에 없는 법이다. 이처럼 강력한 물리적, 화학적 결속 위에 서 있는 리더는 그 정도의 반작용에 멈칫거리고, ‘새 백정’ 따위의 멸칭에 위축되지 않는다. 형평운동은 그래서 요원의 들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백인백색의 개성과 이해관계가 바탕에 깔린 채 돌아간다. 강상호는 동지들과 더불어 양반과 지식인의 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평등세상을 외쳤다. 다정했던 이웃들이 강상호가 백정 두목이다!”, 지탄했다. 그는 그 저주를 에너지 삼아 전진했다. 그렇게 12년을 더 달렸다. 백촌은 실은 자비롭고 다정한 어른이었다. 거부(巨富)였다. 국채보상운동, 민족학교 설립(봉양학교와 일신여고:현 진주여고)을 통한 교육운동, 독립운동으로 쌓인 경력과 명예, 그리고 목숨까지 투입하여 형평사업에 몰두하였다. 특히 눈에 띄는 점 하나는, 국채보상운동 경남대표를 맡았을 때, 그의 나이가 겨우 20살이었다는 점이다. 이같은 활약상에 상응하는 보람과 기쁨도 컸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위한 자발적 헌신과 희생은 누구든 그 맛 때문에 하는 것이다. 놀라운 성과들 1930년대 초, 관청의 호적과 학적부에 표기된 백정 신분 표시가 공식 철폐되었다. 그에 따라 백정의 자녀들이 공립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학생선발 할 때 신분차별도 없어졌다. 당연히 백정에 대한 모욕적 호칭과 차별대우도 폐지되었다. 백정에서 양인이 되었으니, 형평사가 정상적인 삶에 필요한 계몽활동과 교양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전국의 지사에서 강습회와 연설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여 차별과 무시에 대응하는 역량을 길러줬다. 신문과 잡지의 구독을 권장했다. 뿐만 아니라,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만든다”는 목표로 상호부조의 단체를 만들어 운영했다. 형평사는 1935년 해산될 때까지, 일제 치하에서 최장기간 존속한 사회운동 기관이었다. 신분제 해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노선투쟁:돈과 철학의 결투 실은 1920년대 후반쯤부터는 형평운동의 노선투쟁 조짐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권운동의 취지는 점점 옅어지고, 먹고 사는 문제를 중시하는 노선이 득세했다. 그 과정에서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눠졌다. 일제의 경찰이 개입하여 장지필을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는 등 급진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형평운동세력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다. 결국, 1930년대에 들어서는 급진파(인권운동 노선)가 제거되면서, 형평사는 온건파 주도로 변질되었다. 1935년 4월, 마침내 ‘공존공영’(共存共榮)을 내세우며, 일제는 형평사를 해산했다. 이름도 대동사(大同社)로 개칭했다. 친일이익단체로 전락한 것이다. 돈이 혁명을 도살한 것이다. 거기까지였다. 강상호는 큰 상처를 받았다. 모든 것을 갈아넣은 형평사가 무너지자 자신도 절망하고 무너졌다.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 누옥(陋屋)은 형평운동에 모든 걸 쏟아부은 천석꾼 혁명가에게 남은 유일한 ‘소유’였다. 무서운 가난 그의 은거생활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이어졌다. 친구 인촌 김성수(동아일보 설립자)에게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백촌은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서 초대 진주 지국장이었다. 위대한 혁명가였지만 부실한 가장이었던 그가 가족을 위하여 마지막 도리를 한 것이다. 서한은 인촌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백촌이 도움을 청한 것은 인촌이 곧 세상을 하직할 무렵이었다. 그 얼마 후, 인촌은 1955년, 백촌은 1957년에 세상을 떠났다. 강상호 선생이 작고했을 때, 부인은 고인을 앞에 두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끼니꺼리도 남겨놓지 않고 죽으면, 나는 새끼들 하고 어떻게 살란 말입니꺼?” 유족이 겪은 가난은 참혹했다. 백촌의 아들 강인수(1938~ ) 선생의 자전적 기록을 보면, ‘무서운 가난’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가난이 단순히 경제적 궁핍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찢어지게 가난했다’, 또는 ‘흥부네집 보다 더 힘들었다 , 등의 표현으로 족하지 않을까. ‘가난이 무서웠다’, 또는 ‘무서운 가난’은, 총칼로 무장한 적과 맨손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 또는 COVID19 같은 팬데믹 앞에서 처자식, 부모형제는 물론 자신조차 지킬 수 없을 때 느끼는 절망과 공포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백촌의 유족에게 가난은 임박한 죽음의 아가리였다. 40만 백정들이 치른 장례식 ‘진주시가 생긴 이래로 가장 큰 장례식’이었다. 전국의 백정들이 상주가 되어 9일장을 치렀다. 형평장(衡平葬)이었다. 다리 성하고, 교통비 걱정 없는 이 땅의 백정들은 다 찾아와서 건(巾)을 쓰고 통곡하며 절을 올렸다. 조문객이 인산인해였다. 마치 국장 같았다. 그 엄청난 공공행사 같은 장례식이 끝났을 때, 유족들은 비석 하나 제대로 세울 돈이 없었고, 묘지터로 쓸 땅 한 평이 없었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천석꾼 양반 지식인, 독립운동가 혁명가 백촌 강상호 선생의 인생서사에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백촌의 장례식에서 백정 출신 제자 이복수(생몰연도 미상)는 장문의 추도사를 남겼다. 일부를 인용한다. 오, 위대한 선생님! 오직 선생님만은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시고, 자기의 신분 명예를 포기하고 전재산을 희사해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해방 계급타파를 위해 선봉에 서 주셨습니다.” 그는 추도사를 마치고 긴 시간 엎드려 오열했다. 천석꾼의 극빈, 그 뜻 백촌 강상호 선생은 긴 가뭄과 큰 홍수로 도탄에 빠진 지역주민들이 굶어죽을 처지가 되었을 때 부모님과 상의하여 곡간을 열어 자비를 베풀었다. 주민들은 백촌의 모친을 기리는 시덕불망비(施德不忘碑)를 세웠다. 어르신의 은덕이 높고 넓음을 돌에 새겨 백세에 전하리라” 이렇게 적혀 있다. 그 다음 해에는 가가호호에 부과되는 호세(戶稅. 주민세) 10년치를 대납해주었다. 오늘의 부자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실로 뭉클한 역사다. 백촌 강상호 선생의 특별한 아들 강인수(1938~ )에 대해 쓰면서 긴 글을 마치려 한다. 내 아버지가 국채보상운동, 민족교육운동, 독립운동, 형평운동을 했기 때문에 양반들로부터 받은 증오, 일제로부터 받은 옥고와 탄압, 광복 후 이른 바 건국지사로 성공한 친일파 실세가 아버지를 빨갱이로 몰아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연루시켜 죽이려고 했던 일, 그로 인하여 천대받은 유족의 삶, 무서운 가난, 진학포기, 어깨 너머로 보아야 했던 소외감과 열등의식 등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아들은 금년에 88살이다. 선생은 학비를 낼 수 없어 고교에 진학하지 못할 뻔했다. 진주농고 교장이 아버지의 제자였다. 그 인연으로 고졸자가 되었다. 공군에 입대했다. 항공기정비 주특기로 복무했다. 영어를 잘하여 미국 전문가들과 협력할 일이 많았다. 그 부대가 훗날 삼성항공에 인수되어 임원으로 은퇴했다. 인생은 이렇게 작은 우연들이 모여서 필연을 이룬다. ‘必立 강인수’! ‘必立’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호다. 카톨릭 세례명이 Philip이었다. ’필립’은 단순한 음차(音借)가 아니다. 그 어떤 ‘무서운 가난 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드시(必) 일어서야(立) 한다. 칼바람 삭풍한파의 북만주벌판, 그 한가운데 포위된 채 서 있는 외로운 독립군이었다. 이순신의 울돌목처럼 물살이 휘돌며 소용돌이치는 험한 바다를 건너가는 조각배였다. 그 특별한 이름에 스스로 담은 의지로, 진정으로 위대한 아버지를 둔 아들의 운명으로 살아남았다. 맺으면서 거듭 말하지만, 형평운동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민족이나 이념을 뛰어넘는 인류의 영원한 정신, 인간 사랑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이다. 형평운동은 단순히 계급투쟁이 아니었다. 이는 교육운동, 인간성회복운동, 그리고 근본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양반, 평민, 어린 애들까지 남녀노소 동포들이 일제와 합세하여 짓밟고 모욕해도 되는 백정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진정한 해방이란 무엇인가. 가장 낮은 존재들의 천부인권을 되찾아주는 운동 아닌가. 일제 치하, 1923년 4월! 경상도 진주의 형평운동은 위대한 철학운동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내내, 현대사회의 소외계층이 떠올랐다. 노약자, 극빈자, 장애인, 실직자,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취업준비생까지. 불리는 이름은 다르고, 처지 또한 제각각이지만, 이들은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위치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고단한 일상의 주인들이다. 정치든 경제든 그 어느 산업이든, 승자독식의 야만적인 규칙에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혁명하지 않으면 세상은 거칠고 위태롭고 통제불능의 야단법석, 아비규환의 치명적, 공멸적 천길벼랑에 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이 글은 격월간 와의 협의로 이 잡지 7·8월호에 동시 게재됩니다. 오세훈 씨알의소리 편집위원 goodbridg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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