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의 살인자 아돌프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 [사회혁신] 안경 쓴 소심한 회계원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 선 남자를 보고 사람들은 실망했다. 나치 친위대 중령이었다는 자, 유대인 600만 명의 이송을 실무지휘한 자라면 뭔가 흉포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 유리 부스 안에 앉은 이는 안경을 쓴 왜소한 중년 남자였다. 세금계산서를 검토하다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딱 그런 얼굴이었다.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1906~1962)은 그렇게 역사 앞에 초라하게 서 있었다.
1942년의 아이히만(위키피디아)
열차 시간표를 짜던 남자
아이히만은 독일 서부 도시 솔링겐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자랐다. 학교 성적은 그저 그랬고, 세일즈맨으로 일하다 1932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했다. 재능이랄 게 딱히 없어 보였던 이 남자에게 뜻밖의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행정처리 능력이었다. 유대인을 어느 도시에서 어느 수용소로, 몇 시 열차 몇 호차에 태워 보낼지 짜는 일에서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 밑에서 그는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 의 물류담당자가 되었다. 총을 든 살인자가 아니라, 살인을 시간표대로 굴러가게 만든 사무원이었던 셈이다. 이 점이 두고두고 인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가짜 이름으로 탈출해 이탈리아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숨어들었다. 리카르도 클레멘트 라는 이름으로 자동차 공장에 다니며 15년을 조용히 살았다. 그러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에게 붙잡혀 이스라엘로 압송됐다. 1961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62년 5월 31일 자정 무렵 라믈라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공식 기록에 6월 1일로 적히기도 한다. 시신은 화장돼 지중해 공해 상에 뿌려졌다. 그가 학살에 가담한 이들 대부분이 화장로에서 사라졌던 것과 묘하게 겹치는 결말이다.
1940년의 하이드리히(위키피디아)
악의 평범성 , 그리고 스탬프 수집가
이 재판을 참관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이 광경에서 뜻밖의 개념 하나를 끄집어냈다. 바로 악의 평범성 이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유대인이 밉지 않았다고, 자신은 그저 상부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관료였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직급 승진과 업무실적, 상관의 평가에 더 신경 쓰는 전형적인 출세지향형 공무원이었다. 우표를 수집하듯 자기 경력을 관리하던 남자가, 알고 보니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학살기계의 톱니바퀴였다. 아렌트는 이를 두고 악이 반드시 뿔 달린 괴물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고, 오히려 생각하기를 그만둔 평범한 사람의 얼굴로 온다고 진단했다. 이 진단이 지금까지도 불편한 이유는, 우리 주변 어딘가에도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이라는 얼굴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1933년의 아렌트(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
한국 현대사에도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 이라는 항변은 낯설지 않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총을 쏜 이들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고문실을 관리하던 이들도, 가장 최근에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에 가담한 군경 지휘부도 결국 같은 논리를 반복했다. 조직의 명령체계 안에서 개인의 판단은 늘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규정상 어쩔 수 없었다 는 말이 채운다. 아이히만 재판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겨눴다는 데 있다. 국제법은 이 재판 이후 상부의 명령 을 전쟁범죄와 반인도범죄의 면책사유로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세웠다. 명령을 수행한 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는 이 원칙은, 지금 한국에서 진행 중인 내란 관련 수사와 재판에도 그대로 확실하게 적용돼야 할 잣대다.
또 하나 새겨야 할 대목은 시효의 문제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끝난 지 15년이 지나서까지 아이히만을 추적했고, 결국 법정에 세웠다. 한국에서도 반민특위가 친일청산에 실패한 이래, 과거사 청산은 늘 시간이 지났으니 그만 덮자 는 압력과 싸워야 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아이히만이 15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평온하게 자동차 공장을 다녔다고 해서 그의 책임이 희석되지 않았듯, 가해자가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은 결국 정의를 이기지 못한다.
아이히만은 재판 내내 자신이 그저 성실한 공무원이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건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가 성실했다는 사실자체가 아니라, 무엇에 성실했는가를 단 한 번도 스스로 묻지 않았다는 데 있다. 명령을 실행하기 전에 잠깐 멈춰 생각하는 능력, 그 사소해 보이는 습관 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6백만 명의 목숨을 갈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아무 생각 없이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는 누군가가, 훗날 이 이야기를 자기 얘기로 읽게 될지도 모른다.
1961년 재판을 받는 아이히만(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