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이 꿈꾼 나라…차별 없고 품격 있는 공동체 [사람들] 1942년 중국 중경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제34회 의원 단체사진. 임시의정원은 임정의 입법기관으로, 좌우 독립운동 세력이 함께 참여해 항일투쟁과 독립국가 건설을 논의했다. 앞줄 왼쪽부터 차리석 박찬익 (미상) 홍진 김구 조완구 김붕준 김원봉.
백범 김구의 생애를 따라온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렀습니다. 감옥과 망명지에서, 임시정부 청사와 쫓기는 배 안에서, 해방된 고국과 삼팔선 너머 북녘에서 그가 평생 세우려 했던 나라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번에는 작은 일화들을 통해 그의 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김구는 평생 하나의 뜻을 품고, 온갖 시련 속에서도 태산처럼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 뜻은 하루하루의 삶에도 한결같이 이어졌습니다.
신분의 벽에 좌절했던 아이가 훗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모습에서, 감옥에서 책을 읽거나 새 양복 한 벌을 입으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에서, 장성한 아들이 노모에게 종아리를 맞는 모습에서, 애국가를 다 부르고도 다시 한번 부르는 노년의 독립운동가에게서 우리는 그가 평생 품었던 나라의 꿈을 만날 수 있습니다.
1.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나라
어린 김구에게 세상은 누구를 차별하거나, 누군가에게서 차별을 당하는 대립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차별을 하는 사람은 존중받았고, 당하는 사람은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존중받는 자리와 업신여김을 받는 자리는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가에 달려있었습니다.
어린아이 창암은 집안 친척이 갓을 썼다는 이유로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한 것을 느꼈습니다. 양반도 아닌 사람이 밤에 몰래 갓을 쓰고 사돈을 만나러 갔다고 봉변을 당하고 갓을 찢겼습니다. 소년은 어째서 저 사람들은 양반이고 자신들은 상민인지 물었습니다. 집안에 진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고,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면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존하는 김구의 사진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진 1906년 황해도 장련 광진학교의 교사·학생 단체 사진. 서른 살 무렵의 김구가 흰 한복을 입고 학생들 뒤에 서 있습니다(원 표시). 배움을 통해 나라를 지킬 사람들을 기르려 했던 젊은 교육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을 절박한 소망을 품었습니다.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공부하여 찾아간 과거장도 공정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돈과 연줄이 시험을 좌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글을 익히고 실력을 쌓으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었습니다.
동학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는 동학에 입교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의 구별로 상처받았던 청년에게 동학의 교리는 절실하게 와 닿았습니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같은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청년기 그의 삶을 움직였습니다. 동학 전투에서 살아남아 피신할 때 고능선 스승에게서 배운 유교의 국가관은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는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인천 감옥에 갇힌 청년 김구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습니다.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된 그는 고문과 질병으로 죽음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그때 감리서의 젊은 관리가 서양 문물을 담은 신서적을 읽어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 덕분에 김구는 감옥 안에서 『태서신사』와 『세계지지』 같은 책을 접했습니다. 이 책들은 서양의 문명과 세계의 사정을 알아야 하며, 일본에 대한 분노만으로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 각오는 나라를 지킬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배우고, 배운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감옥을 벗어난 뒤 그가 교육에 힘을 쏟은 건 이런 각성 때문입니다.
여러 해 뒤 서대문감옥에서 자신의 호를 ‘백범’(白凡)으로 정한 것은 젊은 날의 생각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백정의 ‘백’과 범부의 ‘범’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라를 되찾는 데에는 가장 낮게 대접받는 사람과 평범한 사람들까지 독립의 뜻을 품어야 한다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김구가 나이 40 이전에 이런 호를 만들 걸 보면 그의 국가관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백범의 나라’라는 말은 이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나라의 주인은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 김구처럼 출신의 수모를 느낀 사람,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도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나라가 백범의 나라입니다.
김구는 황해도 여러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학교를 운영하고 교사를 길러내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광진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은 그 시절을 보여줍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입술을 굳게 다문 젊은 교사의 단정함과 다부진 인상이 눈에 띕니다. 수수한 한복을 입은 그는 아이들 뒤에 서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김구가 훗날 높은 문화의 힘을 말했을 때, 그 말속에는 이런 교실의 경험이 있습니다. 배움은 벼슬을 얻거나 남보다 앞서기 위한 수단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교육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고, 무엇이 부당한 것인지 사리를 판별하게 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감옥에서 접한 책들은 의분으로 애국의 꿈을 키웠던 청년의 자아를 넓혀주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힘은 그렇게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2.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나라
김구의 모친 곽낙원의 생신이 다가오자 젊은이들이 돈을 모았습니다. 오랜 세월 아들과 손자들을 위해 고생한 할머니에게 생신상을 차려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입맛에 맞는 음식을 직접 차리겠다며 돈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권총 두 자루를 내놓았습니다. 생신을 축하하려던 돈에 얼마를 더 보태어 마련한 총이었습니다. 이 총을 가지고 가서 왜놈을 쏘아라.”
1934년 중국에서 촬영한 백범 김구의 가족사진. 앞에 앉은 사람은 어머니 곽낙원 여사, 뒷줄은 왼쪽부터 장남 김인, 김구, 차남 김신. 곽 여사는 상해에서 살기가 어려워 1925년 손자들을 데리고 황해도로 돌아와 키우다가 9년 만에 두 손자를 데리고 몰래 중국 가흥으로 건너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던 김구와 재회했다.
곽낙원은 아들이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뒷바라지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많은 사람에게 지도자로 대접받던 신분이었지만, 잘못하면 혼쭐내는 엄한 노모였습니다. 상해에서 살기가 어려워 두 손자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 대신 ‘자네’라고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많은 청년을 거느리고 있으나 체면을 봐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잘못이 있으면 말로 꾸짖되 회초리는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백범은 1947년 서울 용산의 원효사에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웠습니다. 청년들을 모아 건국의 일꾼을 키우기 위해 가르쳤습니다. 교육과정에는 독립운동사와 정치, 경제, 법률, 헌법이 들어 있었습니다. 민족문화와 농촌문제, 협동조합, 여성문제도 있었습니다.
이 교실의 시간표는 김구가 꿈꾼 나라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법과 제도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농촌의 생활을 이해하고 경제를 꾸릴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황해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과 용산에서 청년들을 가르친 일 사이에는 감옥과 망명, 의거와 전쟁이 놓여 있습니다. 그 긴 세월을 지나면서 가르치는 과목은 ‘힘을 기르는 법’에서 ‘나라를 세우는 법’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김구는 자신의 신념을 가진 정치인이었습니다. 양성소의 교육과정에는 공산주의 비판도 있었습니다. 김구는 모든 차이와 갈등을 넘어선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청년들에게 준비시키려 한 일이 지난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앞으로 나라를 세우고 살아갈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소원」에서 김구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강조했습니다. 그가 말한 문화에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적 성취만으로 다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어떤 존재로 기르고, 다른 사람과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지까지 묻게 합니다.
책을 읽고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여유, 자기 생각을 말할 자유, 배울 기회,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마음도 그런 나라의 삶과 관련됩니다. 굶주리고 모욕을 경험하는 곳에서 아름다운 나라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아이가 살아가는 일상에 닿아있어야 합니다.
3. 우리 옷을 입고 살아가는 나라
윤봉길의 거사를 앞두고 김구는 값싼 양복 한 벌을 사 입었습니다. 임정 유지비를 마련하느라 갖고 있던 양복까지 팔고 넝마 같은 장삼(長衫)을 입고 살았던 사람이 새 양복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동안 궁핍한 일상을 견디며 독립의 길을 모색해왔다면, 이제는 침체된 독립운동의 물꼬를 단숨에 돌릴 행동을 준비한 것입니다. 옷을 갈아입는 일이 그 전환을 스스로 다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흐른 뒤 김구는 또 다른 양복을 입게 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상해 한인사회는 중경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언제 상해로 올 것인지 기다렸습니다. 동포들은 오랫동안 중국에서 고생한 이들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하고 고국으로 보내야 할지 생각했습니다. 이종찬 광복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와 동지들이 의논하여 요인들의 양복을 마련했습니다.
김구의 양복은 큰 체격에 맞게 준비했고, 이시영과 조완구의 양복은 그들의 체격에 맞게 작게 준비했습니다. 밤새 흰 셔츠와 내의, 양말을 갖추고 코트와 비단 머플러까지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준비한 옷을 트렁크에 넣어 중경으로 보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 옷을 입고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각자의 체격에 맞는 양복을 입고온 독립운동가들이 상해 홍구공원 무대에 오르자 동포들은 만세를 부르며 감격했습니다.
그렇게 양복을 갖추어 입고 돌아온 김구는 고국에서 다시 두루마기를 입었습니다. 하지 중장을 만나는 자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섰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미군정 관계자들은 김구의 차림에 당황했다고 합니다. 우리 고유의 두루마기를 입은 독립운동가가 군복 차림의 점령군 사령관과 마주하는 모습은 당당함을 느끼게 합니다.
김구에게 해방은 외국 군대의 보호 아래 돌아와 사는 것으로 완성될 수 없었습니다. 한국인이 자기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외국과 협력하고 도움을 받더라도 나라의 앞날을 결정할 권리까지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귀국 뒤 경교장에는 양복을 선물로 가져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백범은 그 선물을 주변의 청년이나 직원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한복을 입었습니다.
경교장 생활을 보좌한 이들은 백범이 낡은 두루마기를 기워 입었다고 합니다. 백범이 입는 한복의 소맷자락과 안감이 닳으면 경교장 식구들이 옷을 꿰매고 다려놓았습니다. 새 옷을 마련하자는 권유에도 백범은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며 입던 옷으로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가 되찾으려 한 나라에는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을 배우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부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와 교류하고 협력하되 우리의 주체로 서는 나라, 지도자의 생활과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4. 겨레가 함께 살아갈 나라
김구가 해방 뒤 돌아온 고국에는 반가운 얼굴과 함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빈자리가 있었습니다. 김구는 환국한 뒤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 유해 봉환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이강훈이 1945년 12월 일본에서 석방돼 귀국하자 김구는 그와 함께 삼의사 유해 봉환을 추진해 다음해 7월 6일에 효창원에 삼의사 유해를 봉환했습니다. 그 옆에는 안중근 의사를 위한 빈 무덤도 마련했습니다.
일제가 효창원에 조성한 골프장 (1921~1924년 촬영 / 1925년 발간). 일제는 1921년 조선 왕실 묘역인 효창원(서울 용산)에 9홀 규모의 골프장을 조성해 총독부 관리와 일본인 유력자의 여가 공간으로 삼았다. 사진은 조선의 어린 소년들이 무거운 골프 가방을 메고 일본인들을 따르는 식민지 수탈의 단면을 보여준다.이 사진은 1925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朝鮮) 에 게재되어 흔히 ‘1925년 사진’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골프장은 부지 협소로 1924년 말 청량리(현 석관동 의릉 터)로 이전했다. 따라서 실제 촬영 시기는 골프장이 운영되던 1921~1924년 사이이다. 골프장 이전 직후 효창원은 일반에 개방되어 공원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능역 내 왕실 무덤들은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되어 1944년 마지막으로 문효세자의 묘마저 옮겨지는 수난을 겪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효창원은 본래 정조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맏아들 문효세자를 묻고, 뒤이어 아들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를 그 곁에 모신 왕실 묘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1921년 이곳에 골프장을 만들었습니다. 총독부 관리와 일본인 사업가, 친일 인사들이 골프를 즐기는 동안 조선의 어린 소년들은 제 몸집만 한 골프 가방을 메고 다녔습니다. 골프장이 사라진 뒤에도 왕실 묘역의 수난은 계속됐습니다. 일제는 골프장을 옮기고 효창원을 공원으로 바꾸면서 왕실 무덤들을 차례로 서삼릉으로 옮겼고, 1944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문효세자의 무덤마저 이장했습니다.
김구는 이렇게 훼손된 땅에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모셨습니다. 1948년에는 이동녕과 차리석의 유해를 중국에서 모셔왔고, 그해 세상을 떠난 조성환도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조성환을 모신 자리는 본래 김구가 자신의 묏자리로 점찍어 두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동지를 모실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자, 자신을 위해 남겨두었던 땅을 기꺼이 내준 것입니다. 효창원에 선열들을 모시는 일은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일이면서, 짓밟힌 민족의 자존과 정기를 다시 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동지들의 유해를 고국에 모신 백범은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과제에 골몰했습니다. 정책은 망명 시절부터 준비해온 것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조소앙이 체계화한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이루어, 나라의 주인이 된 사람들이 실제 삶에서도 고르게 권리를 누리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남녀에게 동등한 선거권을 주고, 토지와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며, 국가가 교육비를 부담하여 가난 때문에 배움을 포기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49년 3월 9일, 건국실천원양성소 제1기 수료 기념사진. 1906년 장련 광진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김구는 해방 뒤에도 새 나라를 세울 인재를 기르는 일에 힘썼다.
할 일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남과 북에는 서로 다른 군대가 들어와 있었고, 국가의 앞날은 외국의 이해관계에 지배됐습니다. 국내의 정치 세력들도 갈라졌습니다. 같은 독립을 바랐던 사람들조차 어떤 정부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놓고 다른 길을 갔습니다.
김구도 그 갈등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웠고, 신탁통치에 반대했으며, 공산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1948년의 평양행은 더욱 무겁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가볍게 건넌 길이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가 아니라, 남과 북이 따로 정부를 세우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나선 길입니다.
그 길에 대한 비판과 우려도 있었습니다. 성과를 얻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고, 상대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백범도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북으로 가는 날 아침에 그는 아들 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사람들은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처럼 ‘지금은 주화(主和)를 할 때’라고 하지만, 나마저 단독정부에 가담하면 민족의 대의와 기개는 어디로 가겠느냐. 김상헌처럼 척화(斥和)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어야 훗날 역사가 우리 민족을 평가할 것 아니겠느냐.”
남북협상은 통일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남과 북에는 각각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가 원한 결과와 실제로 이루어진 역사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그의 노력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해서 그 실패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그의 발길은 귀중합니다. 5천 년을 하나로 살아온 민족이 통일의 시도조차 마다한대서야 말이 될 일인가요?
백범이 암살되기 전날 밤에는 제자들이 찾아와 잠시 외국으로 피신하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백범은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범은 어떻게 되찾은 나라인데 다시 외국으로 나가느냐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 선택을 순교의 결심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다시 떠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그에게 고국을 떠난다는 일이 어떤 무게였을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국에는 청년 시절 가르친 학생들이 있으며, 돌아오지 못한 가족과 동지들의 시간이 있습니다. 갈라진 겨레가 있고,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이 있는 땅입니다.
1949년 6월 26일, 그는 경교장에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랜 세월 일본의 추적을 피해 살아온 사람이 해방된 고국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오늘 우리가 외면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나라에 신분이 미천한 사람도 나라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지, 배울 기회와 생각할 자유가 열려 있는지, 신념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인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생활을 남겨주고 있는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백범을 좌익인지 우익인지, 민족주의자인지 자유주의자인지, 반공주의자인지 통일주의자인지 분류하려 합니다. 그러나 김구는 애초에 그런 좌표계에서 움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김구의 사유 구조에서 이념은 나라를 위한 수단이었고, 나라는 이념보다 앞서는 존재였습니다. 이 설명은 해방 공간에서 좌우 대립을 극복하고 통일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그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는 핵심 열쇠일 것입니다.
그래서 김구는 단순히 민족주의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가 꿈꾼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품격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백범의 나라는 그가 아호에 담은 백정과 범부의 나라이면서도 조상과 역사, 언어와 문화, 기억과 후손이 이어지는 살아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나라가 단순한 정치 구조가 아니라 민족의 삶 자체였던 것입니다.
환국한 백범은 윤봉길 추도식 때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부르고 나서 4절을 다시 한번 부르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들 김신이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부른 후 왜 4절을 또 한 번 부르자고 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백범이 한 대답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목표를 갖고 세상을 살아온 사람인지를 충격적일 만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애국가 4절에는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하세’라는 구절이 있지. 나라 사랑은 편하고 좋을 때만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못 참을 때도 해야 한다. (우리는) 나라 사랑은 변하면 안 된다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감옥에서나 어디서나 모든 고난을 다 이겨낸 것이다.”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