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던 안중근, 유해마저 외롭게 둘 순 없다 [사람들]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입니다. 그동안 안중근 의거가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열광적인 찬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평안도 장사, 두 눈 부릅뜨고 /염소새끼 죽이듯 나라 원수 죽였다네 /안 죽고 이 기쁜 소식 들었으니 /국화 철에 덩실덩실 춤 노래 즐기네 라는 김택영의 시가 당시의 일반적 반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각국에서는 모두 놀라며, 조선에도 아직 사람이 있다 면서도, 겉으로 통쾌하다 칭송을 못하고 깊숙한 방에서 저마다 술을 따르며 모두 경하 하였다고 했습니다. 통감부의 눈치를 보던 당시 국내의 언론과 대한제국의 정부 및 천주교회는 안 의사를 부정했어요. 해외열강과 언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안중근은 매우 외로운 존재였어요.
안중근 의사. 시기 및 장소 미상
이름조차 파악 못했던 국내 언론, 그를 ‘행흉자’라 지칭
당시 통감부 경시총감은 통감에게 했던 보고에서, 대한매일신보사, 유생, 배일단체, 기타 혈기의 청년들 가운데는 이토 공의 조난을 기뻐하고 그 중에는 한국의 사기가 아직 쇠하지 않았다고 교만히 말하는 자 있다 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청년회원 등은 (안중근을) 지사라 하고 애국열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비밀히 칭찬하는 자가 많다 는 내용도 있었지요.
그러나 국내 언론들은 보도통제를 의식하여, 처음에 안중근을 행흉자(行凶者) 로 표기했습니다. 은 더 나아가 공판 과정에서의 안중근의 발언을 폭언 으로 기술했어요. 10월 28일자에서 첫 보도를 한 는 안중근을 이등암살자 라고 불렀다가, 30일에는 ‘평양인 은치안’라고 썼습니다. 이 비로소 같은 날 비로소 안응칠이라고 했어요.
안 의사 부인과 두 자녀.
국상 버금가는 추모행사로 이토를 기린 황실과 정부
총리대신 이완용 등 대신들은 의거 당일 범인 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는 긴급히 제1차 조문 칙사단을 파견했는데요. 이완용, 윤덕영, 조민희, 유길준 등 각계 대표가 이토의 유해가 일본으로 출발하던 대련항으로 급히 배를 타고 가서, 이미 대련항을 떠난 운구 함선에 겨우 올라타 조의를 표하고 돌아왔습니다.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과 태황제 고종은 각각 통감부를 친히 찾아 조문하였고, 이토에게 문충공(文忠公) 시호를 내렸어요. 칙령으로 3일간 음주가무 금지령을 선포하였고, 제2차 조문 사죄단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유족에게 조의금 10만 원(현재 가치 약 15억 원)을 전달했어요. 정부 주최로 장충단에서 이토 추도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학생들을 동원했습니다.
일진회는 1909년 12월 4일 「한일합방성명서」를 발표했는데요. 조선을 위해 수고를 다하고 동양 평화를 위해 힘쓴 이토 백작의 은혜를 잊고, 하얼빈에서 그를 저격하여 일본 국민의 여론을 악화시키고 분노를 일으켰다. 이제 조선의 정치는 국내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양국 간의 병합만이 조선이 소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했습니다.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 안중근의 행위는 살인”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의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그는 안중근 의사의 행위를 신앙적·도덕적 죄악이자 살인 행위 로 규정했습니다. 일본 통감부에 천주교회가 이번 사건과 무관함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였고, 한국인 신자들에게 정치적 활동이나 국권 회복 운동에 참여하지 말도록 강요했어요.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
안중근은 사형선고 후 뮈텔 주교에게 종부성사를 위해 빌렘 신부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주교가 거절했지만 빌렘 신부는 여순에 도착, 감옥에서 종부성사를 거행하고 3월 10일에는 최후의 미사를 집전했어요. 그로 말미암아 빌렘 신부는 주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부로서 모든 활동을 정지하는 2개월 성무정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빌렘 신부와 안중근의 형제들,
진짜 민심은 해외 한인사회의 환호와 추도를 통해 나타나
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는 안중근이 순국하자, 성대한 추도회를 개최하고 안중근 기념비 건립을 추진했어요. 안 의사의 사형은 우리 동포를 위한 영광이자 잠자는 국민에게 귀감이다.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인 것은 작은 일이나, 안 의사의 결심은 건국 이래의 대사(大事)이다. 조선이 독립하는 날에는 일대 기념비를 건설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의거 소식을 접하자 축하 집회를 열어 안중근을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했어요. 그러자 일본 총영사관은 한인 지도자들을 미국 이민당국에 고발하여, 추방 공작을 진행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와이지방총회는 압제에 대한 투쟁 임을 강조하면서도 공개적인 암살 지지가 아니며 평화를 원한다 는 복합적이고 신중한 입장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어요.
의거에는 관심 없고 일본과의 관계만 의식했던 주변국들
청나라 정부는 사건이 하얼빈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청일 간 외교 분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매우 극진한 외교적 의례를 취했어요. 언론들은 대체로 안중근이 선택한 수단의 실효성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어요. 러시아의 경우에도 안중근을 하얼빈역에 들여보낸 책임은 일본에 있다면서도 러일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의거에 대해서는 평가절하 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토를 평화적이고 진취적 인물이었다면서, 그의 사망을 매우 특별한 불행으로 평가했고 언론의 관심은 한국인 ‘안중근’과 ‘의거’가 아니라, 이토의 사망이었어요. 어리석은 범죄이고 최고의 정치적 실수로 간주하면서. 안중근의 이름을 ‘인찬 안간(Inchan Angan)’으로 쓰면서 ‘암살범’, ‘살인자’ 등으로 표현하며 범죄 행위로 규정했습니다.
조선에 강경 대응 요구한 일본 언론
일본 언론은 이토 히로부미를 칭송하며 깊은 상실감과 슬픔을 표시했어요. 한편 안중근은 미친개 , 무뢰한 등으로 매도를 가했습니다. 아울러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정부를 향해 항일 의병 세력의 완전한 소탕, 기독교 세력의 탄압 그리고 대한제국의 조속한 강제 합병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강경책으로 전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수뇌부는 1909년 4월 초에 이미 한국 병합에 대한 이토의 동의를 받은 상태였어요. 이 방침은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공식 결정되었으나, 다만 시기를 확정하지 않고 막연히 ‘적당한 시기에 조선의 병합을 단행할 것’이라고만 규정했습니다. 결국 국제적 여건이 충족되자, 1910년 6월 3일 내각 회의에서 「병합 후 조선에 대한 통치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분노를 표출하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모습을 보였어요. 통감부 시기 의병 순국자 수만 해도, 전사 및 순국 의병 수는 총 1만 7779명이었습니다. 부상자와 포로를 더하면 피해 인원은 훨씬 늘어나지요. 여기에는 민간인 희생자는 제외되었습니다.
동상 건립과 서훈에 10년 이상 걸렸던 대한민국
1945년 12월 장충단에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중근 선생 동상 건립 기금 및 장충단 재건 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총회는 박문사(博文寺)에 있는 이토의 동상을 부수고 그 자리에 안중근 동상을 건립하기로 결의했지만 실현되지 못했어요. 해방 후 안중근에 관한 첫 기념식은 1946년 3월 26일 서울운동장에서 순국 36주기 추도회로 진행되었습니다.
1955년에 다시 동상을 서울역 광장에 건립하기로 하여 1957년 기공식까지 거행했으나, 1959년에야 남산 기슭 왜성대 옛터에서 제막식이 거행되었어요. 건국훈장은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던 1962년에 수여되었지요. 1963년에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었고, 1995년에 생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59년 안중근 의사 동상 제막식.
해방이 되었음에도 안중근 기념사업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이승만은 당시에도 감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독립에 도움은 커녕 해악이 된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1949년에 건국훈장을 스스로에게 수여했으며, 1956년 남산에 25m의 거대한 동상을 세웠는데 4.19혁명 이후에 끌어내려졌습니다.
1993년 김수환 추기경 안 의사 살인죄 규정은 잘못”
천주교 측에서는 1947년 3월 26일에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최초로 순국 37주년 연미사를 거행하였어요. 1979년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안중근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가 열렸고, 198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서거 70주기 추모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거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천주교 전체를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려웠어요.
그런데 1993년 안중근 의사 추도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추기경이 강론을 통해, 과거 교회가 안 의사를 단순한 살인죄로 단죄했던 것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내린 잘못된 판단이자 부당한 조치 였음을 인정했습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한 숭고한 행위 였다고 평가했어요. 이로써 안 의사의 천주교 평신도 신분과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
지금 효창공원에는 1946년 7월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삼의사 의 유해를 일본에서 봉환하여 안장할 당시, 함께 만들어졌던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습니다. 언젠가 유해를 반드시 찾아와 고국에 모시겠다는 의지를 담아 조성한 것인데요. 그 염원을 담아 2005년 제16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전격 합의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중국이 남북한의 합의를 전제로 공동 발굴에만 협조하겠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남북 어느 한쪽의 단독 요청을 받아들일 경우, 외교적 마찰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남북의 합의에 따라 2006년 6월 남북 공동조사단이 현지를 방문해 조사를 벌였음에도, 정확한 매장 위치를 찾지 못해 실패로 끝났습니다.
1910년 9월 10일 안 의사 묘를 다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사.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그 후에도 여러 움직임이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 없이 명분에만 매달리는 느낌을 준 것이 사실이었는데요. 그런데 최근 강덕상사료연구원이 발굴한 일본과 만주의 당시 신문자료를 통해 무덤의 위치가 훨씬 정밀하게 제시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간 합의와 중국의 협조를 통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시도해 보는 것이 좋겠어요.주진오 한국현재사 formch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