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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가난을 숫자로 잡아낸 초콜릿 도련님 시봄 라운트리

가난을 숫자로 잡아낸 초콜릿 도련님 시봄 라운트리
[사회혁신]
사탕 팔아 번 돈으로 가난을 재다 부잣집 아들이 빈민가를 어슬렁거리면 대개 둘 중 하나다. 자선사업 사진 찍으러 왔거나, 소설 소재 구하러 왔거나. 그런데 영국 요크의 초콜릿 재벌 아들은 조금 달랐다. 그는 카메라 대신 설문지를 들고 갔다. 이 사람이 시봄 라운트리(Seebohm Rowntree, 1871~1954)다. 아버지 조셉 라운트리(Joseph Rowntree, 1836~1925)는 코코아와 초콜릿으로 큰 돈을 모은 사업가이자 독실한 퀘이커교도였다. 아들은 화학을 공부하다 학위도 못 마치고 집안사업에 들어갔는데, 일요일마다 노동자 야학에서 가르치는 봉사를 20년 넘게 했다. 그러다 1895년 영국 뉴캐슬의 빈민가를 둘러보고 충격을 받았다. 나라 전체는 부유해지는데 왜 이 골목은 굶고 있나? 퀘이커교도로서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성금을 내고 끝냈을 텐데, 라운트리는 통계를 냈다. 런던 빈민가를 조사하던 찰스 부스(Charles Booth, 1840~1916)에게 자극을 받아 1897년부터 2년 동안 조사원 몇 명을 데리고 요크 시 노동자 가구를 집집마다 조사했다. 그 결과물이 1901년에 나온 『빈곤: 도시생활 연구』다. 사회조사 방법론의 고전이 됐다.   시봄 라운트리(위키피디아) 빈곤선 이라는 발명품 여기서 라운트리가 만든 개념이 지금도 전 세계 복지정책의 뼈대로 쓰인다. 바로 빈곤선 이다. 최소한의 영양을 유지하는 데 드는 식비를 기준으로 삼아, 그 밑으로 떨어지면 빈곤 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막연히 가난해 보인다 가 아니라 숫자로 선을 그은 셈이다. 더 흥미로운 건 그가 가난을 두 갈래로 나눴다는 점이다. 아무리 아껴도 수입자체가 부족해서 굶는 1차 빈곤 과, 수입은 있지만 씀씀이 때문에 결국 궁핍해지는 2차 빈곤 . 당시 상류층은 가난한 사람들을 두고 게을러서 , 술 마셔서 가난하다고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라운트리는 조사표를 들이밀며 말했다. 아니, 대부분은 그냥 임금이 낮아서 그런 거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얘기다. 백 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요즘도 게시판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배가 불러서 라는 댓글을 보면 라운트리가 무덤에서 한숨을 쉴 것 같다.   시봄 라운트리(Benjamin Seebohm Rowntree - Person - National Portrait Gallery) 회사 안에 복지국가를 먼저 지어보다 라운트리는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회사부터 실험대로 썼다. 1896년에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고, 1904년엔 사내 의사를, 뒤이어 치과의사를 뒀다. 1906년엔 연금제도까지 만들었다. 1919년엔 노사협의회도 세웠다. 식당, 도서관, 수영장까지 갖췄으니 요즘 말로 복지가 좋은 회사 의 원조라 할 만하다. 그렇다고 순진한 온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가 잘 먹고 잘 쉬어야 생산성도 오른다고 믿었다. 1918년 저서 『노동의 인간적 필요』에서 임금을 높여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고임금 경제론 을 펼쳤다. 노사갈등이 터지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1919년 철도파업 때도 양쪽을 앉혀놓고 설득했다. 자유당 정치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와 가까이 지내며 정책에도 영향을 줬다.   1919년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위키피디아) 통계가 복지국가를 낳다 평화주의자였던 그가 1차 세계대전 때는 군수부 복지국에서 일했다. 여기서 산업심리학에 눈을 떠 영국기업 최초로 전임 산업심리학자를 채용했다. 이후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 1879~1963)와도 교류하며 그의 구상에 영향을 줬는데, 이 베버리지가 훗날 낸 보고서가 2차 대전 후 영국 복지국가의 설계도가 됐다. 라운트리는 1936년에 요크를 다시 조사하고, 1941년엔 『빈곤과 진보』를 펴내며 평생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1943년의 베버리지(위키피디아) 한국이 곱씹어볼 대목 라운트리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히 우리 이야기로 돌아온다. 한국도 최저생계비니 중위소득이니 하는 선 긋기 를 오래 해왔다. 그런데 정작 그 선 아래 사람들을 두고 노력이 부족해서 라는 말이 여전히 힘을 얻는다. 라운트리가 120년 전에 이미 반박해놓은 논리가 지금도 회식 자리의 단골 소재라니, 진보라는 게 정말 있긴 한 건가 싶기도 하다. 또 하나, 라운트리는 회사가 정부보다 먼저 복지를 실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한국 재벌 대기업들도 사내 복지엔 돈을 아끼지 않는 곳이 많다. 문제는 그 온정이 정규직 담장 안에서만 맴돈다는 점이다. 하청, 파견, 플랫폼 노동자에게는 담장 밖 이야기다. 라운트리식으로 말하면, 회사 담장을 넘어선 구조 를 안 보면 결국 반쪽짜리 복지밖에 안 된다. 무엇보다 라운트리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은 이것이다. 가난은 감정으로 논쟁할 게 아니라 숫자로 논쟁해야 한다는 것. 한국 정치권은 복지예산을 두고 걸핏하면 퍼주기 니 포퓰리즘 이니 하며 감정싸움을 벌인다. 정작 정확한 빈곤선, 정확한 실태조사는 뒷전이다. 초콜릿 팔아 번 돈으로 설문지 들고 다니던 요크의 도련님만큼도 못한 셈이다.   영국 요크에 있는 라운트리 출생지 기념 파란 명판(Plaque to social reformer Benjamin Seebohm Rowntree unveiled at birthplace | York Press)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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