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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기도만 열심히 하면 나라가 돌아가는 줄 알았던 왕

기도만 열심히 하면 나라가 돌아가는 줄 알았던 왕
[뉴스]
잉글랜드 역사에는 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그 착함 때문에 나라를 통째로 남에게 넘겨준 왕이 한 명 있다. 이름하여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1003경~1066). 맨날 신 앞에 참회한다고 해서 그리 불렸다. 성인으로까지 추대된 인물이니 인격은 나무랄 데가 없었던 모양인데, 문제는 나라 살림이란 것이 인격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가 죽은 지 채 1년도 안 되어 잉글랜드는 다른 나라 임금의 소유가 되었다. 이 조용하고 경건했던 왕이 어쩌다 자기 나라를 남에게 헌납하게 되었을까?   바이외 태피스트리 도입부의 왕좌에 앉은 참회왕 에드워드(위키피디아) 스물다섯 해의 타향살이 에드워드는 무능왕이라는 딱한 별명에다 준비 안된 이 이름에 들어간 애설레드 2세(Æthelred the Unready, 966경~1016)와 노르망디 출신 왕비 엠마(Emma of Normandy, 984경~1052)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어렸을 때 잉글랜드는 덴마크 세력에게 점령당했고, 크누트 대왕(Cnut the Great, 995경~1035)이 왕좌를 차지해버렸다. 어린 왕자는 목숨을 부지하려면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스물다섯 해가 넘도록 남의 나라 밥을 먹으며 자랐다. 이 긴 타향살이가 나중에 잉글랜드 역사를 통째로 바꾸는 씨앗이 된다. 스물다섯 해를 노르망디에서 보낸 사람의 머릿속에 뭐가 가득 찼겠는가. 잉글랜드 귀족들의 얼굴보다 프랑스 노르망디 친구들의 얼굴이 더 익숙했을 것은 뻔한 이치다.   왕관을 쓴 에드워드의 인장 / 잉글랜드인의 왕(위키피디아) 경건함이라는 이름의 무기력 1042년, 크누트 왕조의 대가 끊기면서 에드워드는 얼떨결에 왕좌에 앉는다. 그런데 실권은 이미 잉글랜드 최대 세력가 고드윈(Godwin, Earl of Wessex, 1001경~1053) 백작 손에 있었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딸 에디스(Edith of Wessex, 1025경~1075)와 결혼까지 했지만, 훗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름뿐인 결혼이었다고 한다. 신앙심 때문에 부부관계를 아예 맺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건함으로 치면 성인 반열에 오를 만하지만, 왕으로서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드워드가 재위 기간 내내 몰두한 일은 딱 하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을 새로 짓는 일이었다. 그는 정치 싸움에 끼어드는 대신 기도와 건축에 몰두했고, 실제 권력다툼은 고드윈 가문과 그가 데려온 노르망디 측근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왕이 국정을 챙기지 않고 초월한 듯 살아가면 신하들이 알아서 잘 굴러가게 해줄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힘의 공백은 반드시 누군가로 채워지고, 그 과정은 대개 유혈로 마무리된다.   고드윈의 딸 에디스(Earl Godwin, The Lesser Known Kingmaker - Historic UK) 후계자 자리를 비워둔 죄 가장 치명적인 실책은 따로 있었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 어느 날은 그가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1028경~1087)에게 왕위를 약속했다는 말이 돌았고, 죽기 직전에는 처남이자 실세인 해럴드 고드윈슨(Harold Godwinson, 1022경~1066)에게 왕관을 넘긴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덴마크 쪽 왕족과 노르웨이의 하랄 하르드라다(Harald Hardrada, 1015~1066)까지 저마다 자기가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할 근거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왕좌 하나를 놓고 청구서를 든 사람이 넷이나 되었던 셈이다. 지도자가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좋은 말만 흘리면, 당장은 갈등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청구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서랍 속에 고이 모셔뒀다가 지도자가 죽는 순간 일제히 튀어나온다. 에드워드가 1065년 12월 28일 완공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봉헌식에 참석한 지 채 열흘도 안 되어 세상을 등졌다. 1066년 1월 5일의 일인데, 그가 눈감자마자 잉글랜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제25장면에서 에드워드가 죽음을 맞기 직전 알현하는 해럴드 고드윈슨(위키피디아) 1066년, 세 개의 왕관이 부딪히던 해 해럴드 고드윈슨이 재빨리 왕관을 썼지만, 노르웨이의 하랄 하르드라다가 먼저 침공해 왔다. 해럴드는 급히 북쪽으로 달려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그를 물리쳤다. 그런데 승리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이번에는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남쪽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지친 군대를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강행군한 해럴드는 결국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렇게 앵글로색슨 왕조는 막을 내리고, 잉글랜드는 노르망디 공작의 소유가 되었다. 언어도, 지배층도, 법과 제도도 통째로 뒤바뀐 이른바 노르만 정복이다. 에드워드가 성인으로 추대된 것은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1161년의 일이다. 개인의 경건함이야 후대가 인정할 만했겠지만, 그 경건함이 나라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치적 결단을 회피한 대가로 후손들은 수백 년간 다른 나라 지배층 아래 살아야 했다. 더욱 기가 막힌 아이러니는 에드워드 참회왕이 썼던 왕관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거쳐 현재 찰스 3세 국왕까지 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오는 것이다.  성 에드워드 왕관이라 불린다.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 한번 소실되었다가 찰스 2세가 다시 제작했고, 그 뒤 역대 국왕들이 대관식 때 사용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제26장면에 묘사된, 에드워드가 안장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그의 장례식(왼쪽)(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질문 이 이야기를 오늘의 한국에 그대로 옮겨보면 낯설지 않다. 후계구도든, 권력승계든, 국정운영의 핵심 결정이든 확실히 매듭짓지 않고 이 세력 저 세력에게 각기 다른 언질만 흘리며 자리를 지키는 지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당장은 모두를 달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청구서는 다음 세대, 혹은 그 다음 순간에 한꺼번에 돌아온다. 2024년 12월 3일 밤 갑작스레 선포되었던 비상계엄 사태만 봐도,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즉흥적으로 움직인 결과가 얼마나 큰 혼란을 부르는지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에드워드의 실패에서 배울 점은 이것이다. 지도자 개인의 도덕성이나 신앙심은 훌륭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무능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통치를 가려주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착하고 경건해 보이는 지도자일수록 결단을 미루는 행태가 온화함으로 포장되기 쉽다는 사실. 권력을 넘겨받을 자리를 분명히 하지 않고 모호하게 방치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국가적 위기를 예약해두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사회 역시 지도자의 개인적 이미지와 통치 역량을 분리해서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헤이스팅스 벌판에서 화살에 맞아 쓰러진 것은 해럴드였지만, 그 화살을 부른 것은 몇 년 전 결단을 미룬 에드워드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윌튼 딥틱의 작품에는 에드워드(가운데)가 세례자 요한(오른쪽)과 함께 리처드 2세(앞줄의 소년)를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소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키피디아)   1396년경 월튼 두폭의 작품.  에드워드 참회왕(왼쪽 두 번째)이 세례자 요한(왼쪽 세 번째)과 성 에드먼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리처드 2세(앞의 무릎끓은 소년)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소개하고 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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