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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곡식은 여무는데, 정치는 여물지 않는다

곡식은 여무는데, 정치는 여물지 않는다
[뉴스]
무척이나 더웠다. 그런데 정작 비는 오지 않았다. 장마는 어물쩍 지나갔고, 여름이면 으레 한두 번은 오던 태풍마저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죄다 일본 쪽으로 빠졌다. 우리를 봐준 것인지 그냥 우리를 지나친 것인지는, 늘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기상청이 지난 3일 내놓은 2026년 여름철 기후특성 을 보면 올여름 전국 평균기온은 25.4도, 평년보다 1.7도 높았다. 1973년 이후 세 번째로 더운 여름이라고 한다. 세 번째라니 조금 안심이 될까. 아니다. 1위와 2위가 각각 지난해와 재작년이다. 이제 더위는 옛날의 어느 해와 겨루지 않는다. 바로 작년과 겨루고 있다. 지난 8월 경남 양산은 42.5도까지 올랐다. 1904년 근대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기온인데, 그 직전 기록도 사흘 전 양산이 세운 것이었다. 기록이 기록을 따라잡느라 바빴던 올 여름이다. 대신 비는 인색했다. 여름철 전국 강수량은 평년의 76%에 그쳤는데, 평년에 못 미친 것은 3년째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름을 비껴간 게 아니라, 비만 비껴간 여름을 버텨내며 살았다. 그래도 절기는 제 할 일을 했다. 24절기라는 말이 새삼 신기한 것이, 입추가 지날 무렵 더위가 한 번 풀썩 꺾이더니 다시 기승을 부렸고, 지난 7일 가을의 세 번째 절기인 백로를 넘기면서는 완연한 가을이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높아졌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찬 공기가 불쑥 끼어드는데, 낮 햇살은 여전히 따갑다. 따가워야 한다. 과일이 물들고 곡식이 여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백로(白露)란 결국 풀잎에 맺힌 흰 이슬이라는 뜻이다. 이슬은 밤이 충분히 차가워져야 맺힌다. 여무는 것들은 전부 밤을 건너온 것들이다. 낮의 볕만으로 익는 것은 세상에 없다. 보름 뒤면 민족 대명절 한가위다.   19세기 러시아 문학 황금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문호, 극작가 안톤 체홉(Anton Chekhov), (나무위키) 체홉의 인물들은 대화하지 않는다 지난 금요일, 학부 시절 몸담았던 극회의 재경 동문 모임에 오랜만에 나갔다. 가을색에 맞춰 자리도 무르익는 동안, 내년 선후배 합동공연 작품이 정해졌다는 소식이 나왔다. 안톤 체홉의 「세 자매」라고 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 한 켠이 설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래 꽂아만 두었던 단편집을 다시 꺼냈다 밤새 책장을 넘겼다. 학부 시절 나는 체홉에 빠져 있었다. 단막극 「곰」(1888)과 「청혼」(1889)을 한 편으로 붙여 「결혼해주세요」라는 제목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린 적도 있다. 몇 달을 대본 붙들고 씨름하다 알아챈 것이 하나 있다. 체홉의 인물들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청혼」의 로모프는 나탈리야에게 청혼하러 온 사람이다. 그런데 끝내 청혼을 하지 못한다. 밭 한 뙈기가 누구 소유냐로 싸우고, 그다음엔 어느 집 사냥개가 더 나은지로 싸우다 기절한다. 정작 그 방에 들어온 단 하나의 이유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더 서늘한 건 마지막 장면이다. 혼사가 겨우 성사된 그 순간에도 두 사람은 다시 개 이야기로 싸우기 시작한다. 「곰」의 스미르노프와 포포바도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은 죽은 남편이 진 빚을 갚으라 하고, 한 사람은 남편을 잃은 제 슬픔을 말한다. 같은 방에 있지만 서로 다른 방에서 말하고 있다. 대사는 분명히 오간다. 목소리도 크다. 그런데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독백이다. 체홉은 그 어긋남을 희극으로 썼다. 웃고 나면 서늘한 것이 남는 희극이다. 내년에 선후배 합동공연으로 올릴 예정인 「세 자매」도 다르지 않다. 프로조로프가의 남매는 막이 바뀌도록 모스크바로 가자 고 말한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가지 않는다. 그 말은 상대에게 건네는 대화가 아니라 혼자 되뇌는 주문에 가깝다. 스물몇 살에는 그게 그저 애틋하기만 했다. 마흔을 훌쩍 넘겨 다시 읽으니 그리 애틋하지가 않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아니 여의도는 풍요를 누리고, 마음을 나누고, 없는 이에게 한 그릇 더 내밀어야 할 계절이다. 그런데 담장 밖은 여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30일 여섯 부처 개각이 발표된 뒤로 정치권은 청문회 정국이다. 오는 15일부터 이틀에 걸쳐 다섯 부처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성평등가족부는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청문회를 여는 날짜를 정하는 일에도 먼저 한바탕 협의가 필요한 모양이다. 무엇을 물을지보다 언제 물을지가 더 어려운 회의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몰랐다.   6개 부처 개각 신임 장관 후보자 프로필 (연합뉴스) 한쪽은 실용 인사라 하고 다른 쪽은 국정 테러라 한다. 두 문장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 맞는지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이 광경을 오래 보고 있으면 체홉의 응접실이 겹친다. 대사는 넘치고 목소리는 더 크다. 그런데 대화는 없다. 두 문장은 서로를 향하지 않는다. 각자의 관객을 향한다. 밭 한 뙈기 소유권으로 몇 시간을 싸우다 정작 그 방에 온 이유는 말하지 못하는 로모프처럼, 우리는 매번 사람의 자격을 캐묻다가 그 부처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묻지 못한 채 청문회를 끝낸다. 검증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사람 하나의 자격을 국민이 따져 묻는 일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몇 안 되는 실질적 권한이다. 다만 그 소란이 끝나고 남는 것이 늘 통과냐 낙마냐 둘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곡식은 백일을 채워야 여문다. 대화도 그렇다. 주고받아야 여문다. 혼잣말은 아무리 오래, 아무리 크게 해도 여물지 않는다. 네팔에서는 아직 희망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네팔. 지난달 말 네팔과 중국 티베트 자치구 접경에서 일어난 대규모 돌발 홍수로 사망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물길 어딘가에 한국인 9명이 있다. 라수와 지역 어퍼트리슐리(UT)-1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연락이 끊긴 이들이다.  정부는 신속대응팀과 해외긴급구호대(KDRT)를 서둘러 보냈다. 그러나 계곡을 타고 쏟아진 물과 진흙이 도로와 교량을 쓸어가 육로가 막혔고, 네팔군은 산세가 험하다는 이유로 우리 구호대의 도보 수색을 한참 뒤에야 허용했다. 헬리콥터와 드론에 기댄 공중 수색만 이어졌다. 발전소 터널에 고립돼 있던 네팔인 셋과 중국인 생존자 한 명을 구조한 것이 그나마 가장 밝은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 결국 네팔 당국은 대응 기조를 수색·구호 에서 재건·복구 로 바꿨다. 행정의 언어로는 단어 하나가 바뀐 것이고, 기다리는 쪽에서는 전부가 바뀐 것이다. 우리 구호대도 9일 수색을 멈추고 귀국 준비에 들어갔다. 같은 날 카트만두의 한 호텔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일방적인 수색 종료와 조기 철수를 멈춰달라고 했다. 회견 도중 울음이 터졌다. 여기서는 독백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독백은 그래도 말하는 사람이 무대 위에 있다는 뜻인데, 이쪽은 부르는 소리만 있고 받는 자리가 비어 있다. 체홉의 인물들은 적어도 같은 방에 함께 있기라도 했다.   9일 네팔 카트만두 시내의 한 호텔에서 대규모 홍수와 산사태 사고로 실종된 남동발전 근로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하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2026.9.9 연합뉴스 이 가을밤, 보름달은 모두에게 똑같이 뜬다 이슬은 밤이 차가워야 맺힌다고 썼다. 하지만 어떤 밤은 그냥 길기만 하다. 아무것도 맺히지 않고, 아침도 오지 않는다. 한가위 보름달은 모두에게 똑같이 뜬다. 똑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상 위에 올릴 것이 있는 집과 기다릴 사람의 자리를 비워둘 수조차 없는 집에, 청문회장 조명 아래와 히말라야 계곡 진흙 위에 같은 달이 뜬다. 백여 년 전 러시아 시골 저택 응접실에서 각자 떠들던 사람들이, 지금은 청문회장에 앉아 있고 뉴스 화면 안에 있고, 어쩌면 이번 한가위 우리 집 밥상에도 앉을 것이다. 서로를 보듬어야 할 계절에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독백 중이다. 체홉은 그것을 희극이라 불렀다. 백 년이 지나도록 고쳐지지 않은 희극을 뭐라 불러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원래는 풍요를 비는 덕담이었다. 요즘은 이 말을 누구에게 건넬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한가위만 같기를 빌기 전에, 한가위를 맞을 수 있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이 가을밤은 유독 더디다. 창을 열어두면 찬 기운이 들어온다. 여물어가는 것들의 냄새가 섞여 있다. 그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조태희 시민기자 jotaehu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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