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김민기에게 전통음악의 맛과 멋을 심어준 김구한

김민기에게 전통음악의 맛과 멋을 심어준 김구한
[사람들]
의 공연이 있기까지, 그리고 이후 마당극이 활성화되기까지 김지하, 채희완, 임진택 등 지금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 이외에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생소한 이름, 김구한이다. 김구한은 이종구에 앞서 김민기의 가슴에 우리의 음악적 전통을 새겨넣은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 입학 3년 선배이기도 하고, 미대 동기생이기도 했다. 김구한은 1966년에 국악고등학교의 전신인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를 나와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했다. 양성소는 말이 ‘양성 시설’일 뿐 실제로는 국악 이외에 국어 영어 수학 등 중등 교육과정을 모두 가르쳤다. 전공은 대금. 양성소 시절 그에게 가장 절실했던 건 먹고 사는 문제였다. 그림에 취미도 있고 재주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만화를 그리게 되면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어 양성소를 때려치울 생각도 했다. 그러나 자퇴하면, 그동안 들어간 학비를 모두 토해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학교를 계속 다녀야 했고, 배운 게 국악이었으니 대학 진학 때에도 국악과를 선택했다.   김민기에게 단소를 가르친 김구한은 김민기의 요청으로 문화운동에 발을 들였다. 그는 도예가로서 일가를 이뤘지만 김민기와의 인연으로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에 헌신하는 삶을 살다 2017년 별세했다.   대학 진학 후 다시 생각해 보니 대금을 불어서는 돈 벌기는커녕 먹고 살기 힘들 것 같았다. 1학년 2학기 때 때려치웠다. 그 후 여기저기 떠돌다가 적성도 맞고 돈도 만질 법하다고 생각해 미대 조소과에 다시 입학했다. 그가 김민기를 만난 것은 1968년 종로구 낙원동의 향림미술학원에서였다. 미대 입시 전문학원이었다. 김구한은 통행금지 후 학원 청소를 해주는 조건으로 그곳에서 잠도 자고 공짜로 수강도 하고 있었다. 김민기는 입시를 서너 달 앞두고 입시 그림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했다. 둘은 금방 의기투합했다. 김구한이 보기에 김민기는 영락없는 ‘의식이 깨어 있는 고삐리’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김구한은 김민기에게 단소를 가르쳤다. 둘이 학원에서 지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김민기의 기억으로는 네 달이 채 안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고 둘은 금방 가까워졌다. 다음은 김구한의 회고다. 민기는 그때도 기타를 아주 잘 쳤어요. 그림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저한테 ‘형! 딴다라 했어? 우리 같이 미대 가면 이거 하자’고 하는 거예요. 민기가 말하는 ‘이거’라는 게 노래로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문화 운동이었어요. 당시 나는 우리 사회가 ‘국민교육헌장’이나 외우고, 그대로 살면 되는 줄 알았었거든요. 때리면 맞고 하라고 하면 하고, 그러면 되는 곳 말이죠. 그런데 민기에게는 그런 게 아니었죠.” 대학에 들어간 뒤 김구한은 ‘노래로 세상을 바꿔 보자’라고 했던 민기와의 약속을 따르기도 혹은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잠잘 곳조차 없는 그에게 당장 급한 것은 호구지책이었고,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학교는 ‘3선개헌 반대’다 ‘영구 집권 의혹’이다 하여 그야말로 난리였다. 그 아우성 속에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아 고민 끝에 입대했다. 1972년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민기와 다시 만났다. 그런데 웬걸 민기는 대학가는 물론 사회에서도 알아주는 제법 유명한 가객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노래로 세상을 바꿔보자던 ‘고삐리’ 시절의 이야기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던 김구한을 민기는 가만두지 않았다. 김민기는 마음이 여렸지만, 끈기는 쇠심줄 같았다. 이번에도 다짜고짜 ‘세상을 바꿔보자’라고 설득했다. 그 나지막하면서도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김민기의 요청을 김구한은 뿌리칠 수 없었다. 김민기와 함께 노래도 만들고 연주도 하며 음악 작업을 했다. 장일순 선생도, 김지하도 만났다. 1972년 ‘금관의 예수’ 공연에도 따라다니고, 1974년 ‘아구’ 공연에도 참여했다. 가까운 후배인 김영동(국악 전공의 싱어송라이터 김영동)도 여기에 끌어들였다. (그때는) 지하 형하고 만날 도망 다니는 게 일이었어요. 친한 후배인 영동이도 끌어들여 고생 좀 시켰죠. 도망 다니는 일이 꼭 나쁘지만 않았어요. 문경 탄광촌으로 도망쳤다가 흙을 알게 되고, 도자기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까요.” 말은 안 하지만 그 역시 붙잡혀 고문도 많이 당하고 감옥살이도 징하게 했다. 김민기는 1977년 미대 학장의 배려로 ‘명예’ 졸업장을 받았지만, 김구한은 1980년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한때 ‘재야인사’ 김영삼의 비서로 정치판에 발을 들이기도 했지만, 곧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일본에 있으면서 흙을 굽는 일에 천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도예가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6년 조성우, 장의균, 황석영 등과 ‘우리문화연구소’를 설립하고, 일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작가회의 전시회에 한국 작가의 작품을 선별해 소개했다. 또 독일 제1 공영방송국 도쿄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광주 학살 현장에서 촬영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그해 9월 제작한 다큐멘터리(‘5.18 비디오’) 을 반입해 문국주(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김민기와의 인연으로 그는 뜻하지 않게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에 헌신하는 일꾼의 삶을 살았다.   위르겐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범시민궐기대회에서 게엄군의 만행을 보고하는 한 여성을 촬영하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던 김구한은 힌츠페터가 찍은 기로에선 한국 영상을 국내로 들여와 문국주에게 전달해 그날의 참상을 국민들에게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사진출처: 동아일보       김구한의 도예 대작 즈엄집. 사진출처: 대한민국정책브리핑 말년 그는 도예가로서 한 경지를 이뤘다. 민중화가 주재환은 그를 두고 대한민국의 다빈치”라고 했다. 노동운동가이자 통일민주당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던 신금호는 그의 풍모를 ‘그림 속 달마’에 비교했다. 그는 2017년 세상을 떠났다. 섞이는 걸 꽤나 싫어하는 김민기였지만, 살다 보니 일을 만들고, 일의 성사를 위해 사람을 만나고, 끌어들이고, 조직하는 데 남다른 면모와 자질이 있었다. 는 1974년 5월 이화여대 공연을 거쳐, 10월엔 당시 민중문화운동의 본거지였던 원주에서도 공연했다. 이화여대 공연에선, 공연 직전 임진택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는 바람에, 연출자인 김민기가 대타로 쪽발이 역을 맡아 무대에 올라야 했다. 1974년 7월 13일, 민청학련 사건 선고 공판이 있었다. 문화 운동의 ‘두목’과 ‘한목’이 피고인석에 섰다. 김지하는 민청학련 배후 혐의로 피고인석 앞자리에, 임진택은 수괴 중 한 사람인 유인태를 숨겨준 혐의로 뒷자리에 있었다. 사형 선고가 잇따르는 가운데 김지하도 여지없이 ‘사형’이었다. 구치소로 돌아갈 때 두 사람은 우연히도 같은 호송차에 탔다. 두목이 ‘한목’에게 당부했다. 이제는 문화 운동이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문화 운동을 이어 나가라.” 임진택은 입술을 깨물었다. 임진택이 감방으로 돌아왔을 때, 감방장은 무더기 사형 소식에 저도 싱숭생숭했던가 보다. 오락 시간이 되자 그는 임진택에게 ‘소리 한번 하라’고 했다. 김지하의 당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임진택은 웅얼거리며 ‘소리’를 시작했다. 1972년 김지하가 발표한 담시 가운데 ‘소리 내력’을 판소리 풍으로 즉석에서 작창해 부른 것이었다. 문화 운동의 마당발 임진택이 소리꾼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김지하와의 인연으로 핀소리를 익힌 임진택은 김민기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2019년 3월 1일 명창 임진택이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의 한 대목을 들려주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임진택은 그해 8월 출소한 뒤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두목’의 뜻을 따라 문화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듬해 ‘오둘둘 시위’에서 이번엔 ‘배후’로 몰려 다시 붙들려 갔다.김민기는 연극회나 가면극회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어디에도 가입하지는 않았다. ‘게으르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그랬다지만, 단체나 모임에 소속돼 있는 게 부담스러웠다. 뭔가 조직의 논리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싫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때문에 그는 시국사건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다. 이듬해 ‘오둘둘 사건’은 서울대 운동권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공안 당국은 갓 입학한 1학년생까지도 쓸어갔다. 탈반과 연극반은 현장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오둘둘 시위’를 주도했던 탓에 더 심하게 당했다. 장렬하게 행사를 치른 탈반의 2대 회장 장만철(영화감독 장선우의 옛이름)과 재학생들은 무더기로 체포됐고, 졸업생인 채희완과 임진택은 그 배후로 지목돼 거사 직전 체포됐다. 이후 이듬해 1학기 말까지 서울대에선 시위다운 시위가 한 번도 터지지 않았다. 운동권이 뿌리가 뽑힐 정도로 거덜 난 터여서 조직 복원에 힘써야 했다. 그러나 놀이패는 달랐다. ‘오둘둘 사건’으로 심하게 당하긴 했지만, 학내에서 성가는 높아졌고, 놀이판 수요도 많아졌다. 두 단체는 한 몸으로 움직이며, 행사도 같이하고 일도 함께했다. 탈반 친구들이 걸판지게 ‘마당’을 깔아 놓으면, 연극회 친구들이 그 위에서 한바탕 노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대형 사고를 친다. 1976년 10월 서울대 가을 축제 때였다. 감골마당에서 공연한 을 계기로 벌어진, 이른바 ‘감나무골 사건’(서울대 축제 데모 사건)이었다. 은 본의 아니게 ‘오둘둘 사건’으로 숨죽이고 있던 서울대에, 새로운 대중집회의 공간을 창출하고 시위를 터뜨리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1976년 10월 15일 감나무골에서 허생전이 끝난뒤 학생들이 뒤풀이를 하고 있는 모습. 이어 자연발생적으로 시위가 시작됐다. 사진출처: 주간경향 은 사방이 솥단지에서 타오르는 횃불로 불 밝힌 마당을 무대로 삼았다. 무대와 객석의 구별이 없는 이 마당에서 연기자와 관객은 질펀한 익살과 풍자, 해학과 현실 비판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공연에 이어 막걸리판이 벌어지자, 공연과 이글거리는 불에 달궈진 학생들 사이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구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북이 이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학생들은 정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인근 학생들이 몰려들면서 졸지에 대규모 시위대로 발전했다. 뒤늦게 경찰이 몰려와 정문을 막았지만, 삼삼오오 빠져나온 학생들은 신림동 일대에서 가두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40여 명을 연행해 다그쳤지만, 배후를 찾을 수 없었다. 자연발생 형태의 시위에 배후가 어디 있을까? 단 두 사람을 구속, 제적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허생전을 연출한 이상우의 생전 모습. 극단 연우무대와 차이무를 창단한 이상우는 소리굿 아구에서 시작된 마당놀이 공연에 마당극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올 4월 26일 별세했다.  에서 시작한 마당놀이 공연에 ‘마당극’이라는, 장르의 명칭을 처음 쓴 것은 연극 연출가 이상우(전 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였다. 이상우는 을 연출하면서 ‘마당극’이라는 이름으로 이 연극의 성격을 드러냈다. 이상우는 1977년 서울대 연극회 친구인 정한룡, 김광림 등과 연우무대를 창단했고, 1995년엔 문성근, 송강호, 유오성, 명계남, 강신일, 문소리, 이성민 등 유명 배우들이 거쳐 간 극단 ‘차이무’를 창단했다. 채희완과는 미학과 동기로 한 사람은 탈반을 다른 한 사람은 연극회를 이끌었다. 훗날 채희완은 ‘마당극’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마당극의 연원은 멀리는 제천의식, 고려 팔관회, 조선 후기의 탈춤 등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연희자와 관객이 한 덩어리가 되는 전통연희를 계승한 근대적 개념의 마당극은 가 처음이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