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는 헝클어졌어도 인류의 스승으로, 아인슈타인 [사람들] 말이 늦은 아이, 지각하는 학생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독일 울름에서 태어났다. 말문이 늦게 트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지만, 수학 낙제생이었다는 소문은 거짓이다. 그는 일찍부터 수학에 능했고, 외우기만 시키는 교육을 못 견뎠다. 다만 지각하는 일이 잦았던 것은 사실이다.
대학을 마치고도 교수가 될 길이 열리지 않자 1902년 스위스 베른의 연방특허청에 들어갔다. 직급은 3급 기술심사관이었다. 세상을 뒤집을 사람이 남의 발명품 서류를 검토하며 월급을 받았다.
1947년의 아인슈타인(위키피디아)
특허청 책상에서 뒤집은 세계
1905년, 그는 논문 네 편으로 물리학의 판도를 바꿨다. 빛의 알갱이 성질을 설명하고, 물속 꽃가루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까닭을 밝히고,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나타낸 유명한 식도 이때 나왔다. 아이작 뉴턴(1643~1727)이 사과 한 알로 세상을 흔들었다면, 아인슈타인은 특허청 책상에서 그 일을 해냈다. 요즘 연구비 심사였다면 성과가 불확실하다며 탈락했을지도 모른다.
1915년에는 중력을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영국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1882~1944)이 1919년 일식관측으로 예측을 뒷받침하자 그는 세계적 명사가 됐다. 그러나 1921년도 노벨물리학상은 이듬해에야 수여됐고, 수상사유에서도 상대성이론은 빠졌다. 빛의 광전효과를 설명한 공로가 인정됐다. 천재도 심사위원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그도 틀릴 때가 있었다. 양자이론의 확률적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긴 그는 1926년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썼다. 하지만 자연은 아인슈타인의 취향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위대한 과학자는 위대한 질문을 남기지만, 그 질문의 답까지 독점하지는 못한다.
1921년 빈에서 아인슈타인(위키피디아)
폭탄을 경고한 사람, 평화를 외친 사람
1932년 12월 미국으로 연구여행을 떠난 아인슈타인은 이듬해 1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독일총리가 되자 귀국하지 않았다. 벨기에와 영국을 거쳐 1933년 10월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자리를 잡았다. 나치가 내쫓은 학자를 미국은 품었다.
1939년 8월, 그는 동료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 1898~1964)의 요청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했다. 나치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 가능성을 경고하며 미국의 대응을 촉구한 것이다. 훗날 그는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원자폭탄 개발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0년 미국육군 정보기관이 보안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이 떨어진 뒤에는 핵무기통제와 세계평화를 호소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작성한 핵전쟁 방지선언에도 서명했다. 1955년 4월 11일 그가 서명의사를 밝힌 이 선언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7월 9일 발표됐다.
1882년, 3세 때의 아인슈타인(위키피디아)
감시당한 평화주의자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1932년부터 아인슈타인을 조사했다. 관련기록은 1400쪽이 넘었다. 반공주의가 거세던 시절, 세계적 과학자도 의심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1953년 그는 의회 조사위원회의 출석요구를 받은 뉴욕의 교사 윌리엄 프라우엔글라스(William Frauenglass)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식인은 부당한 조사에 협조하지 말아야 하며, 감옥과 생계 파탄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6월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지식인의 양심이 권력의 요구보다 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인종차별에도 침묵하지 않았다. 1946년 가수이자 배우인 폴 로브슨(Paul Robeson, 1898~1976)과 함께 미국의 린치 종식운동을 이끌었다. 1951년에는 정부가 흑인 인권운동가 W. E. B. 듀보이스(W. E. B. Du Bois, 1868~1963)를 기소하자 변호 측 증인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법원은 그를 부르기도 전에 증거부족으로 사건을 기각했다.
1952년 이스라엘이 대통령직을 제안했을 때는 사람을 다루는 재능과 공직 경험이 부족하다며 사양했다. 며칠 뒤 공식행사에 예복을 갖춰 입고 양말은 신지 않은 채 나타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대통령 자리는 거절했지만, 자기답게 사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3년, 14세의 아인슈타인(위키피디아)
한국이 얻을 시사점
한국의 2026년 정부 연구개발 예산은 35조 5000억 원으로 확정됐다. 2027년 정부안은 39조 5000억 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산의 크기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쓰느냐다.
첫째, 연구자를 키워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성취는 단기실적을 재촉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고용과 처우가 불안정한 젊은 연구자에게 실패할 자유와 오래 탐구할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질문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정답을 외우는 데 능숙한 학생보다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는 학생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엉뚱한 질문을 감점하는 교실에서 창의성을 찾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셋째, 평화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핵무기의 위험을 경고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핵과 군비경쟁의 그늘이 짙은 한반도에서 더욱 절실하다. 안보를 말할 때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영토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인간의 생명이다.
넷째, 색깔론을 경계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조차 정치적 의심의 대상이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로 헌정질서가 흔들리는 사태를 겪은 한국사회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낙인부터 찍는 버릇에서 자유로운지 돌아봐야 한다. 권력이 질문을 두려워하면 민주주의부터 병든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 1912년(위키피디아)
헝클어진 머리보다 중요한 것
아인슈타인이 죽은 뒤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Thomas Harvey, 1912~2007)는 유족의 허락 없이 그의 뇌를 적출했다. 나중에 유족의 동의를 얻어 연구를 이어갔지만, 천재의 비밀을 단번에 밝혀내지는 못했다.
어쩌면 비밀은 뇌의 모양보다 삶의 태도에 있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틀렸을 때는 인정하는 태도 말이다. 그를 감시하던 권력자들의 이름은 역사의 부끄러운 장면에 남았지만, 감시당하던 과학자의 이름은 인류의 스승으로 남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천재의 머리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그가 지키려 했던 양심을 배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1931년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의 아인슈타인(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