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사형 서명한 대법관이… 판결문 처음 본다 [뉴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한환진(韓桓鎭, 1916~2008) 항목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2002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였다. 기자가 1975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보여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심판사가 재판을 주도했는데, 판결문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8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사형 판결문에, 한환진 본인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27년이 지나서야 자신이 서명한 종이를 처음 본다는 그 발언에, 피해자 임구호는 솔직함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고 했다.
한환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16년 평안남도 평원 출생, 의사 아버지보다 변호사 외숙부를 선택하다
한환진은 1916년 2월 2일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아버지는 평생 단 한 번 최고급 한식을 사줬지만, 변호사인 외숙부는 백화점 옥상 서양요릿집에서 황홀한 맛의 서양 요리 를 자주 사줬다. 이 작은 경험이 그를 법률가의 길로 이끌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1935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 교토제국대학을 졸업, 1942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창씨명은 미모토 미츠시게(箕本光茂)였다. 흥미롭게도 그는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한환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기억상실 을 가장한 책임회피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이 떠오른다. 나치 전범들 중 일부는 전후 재판에서 그런 명령을 내린 기억이 없다 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서류에 직접 서명했음에도 그 행위와 자신을 분리시키는 심리적 기제다. 한환진의 (사형)판결문을 직접 본 것은 처음 이라는 발언이 정확히 이 패턴이다. 그는 심지어 국정원과거사위원회의 질의에 판결문 원본에 담당 법관이 직접 서명 날인하는 것이므로 그 말은 상식에 어긋나며 있을 수도 없다 고 스스로 모순된 해명을 내놓았다.
한환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55년, 서민호 보석을 막은 대법관 대리
한환진의 반헌법 행위는 일찍부터 시작됐다. 1952년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을 조사하던 국회의원 서민호가 자신을 저격한 군인을 정당방위로 사살한 사건에서, 부산지법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1955년 8월, 대법관 대리 한환진이 주심을 맡은 대법원 합의부는 대구고법의 보석허가 결정을 뒤집어 보석은 부당하다 고 결정했다. 이승만(1875~1965) 정권이 정치적으로 가장 눈엣가시였던 인물의 자유를 그는 이렇게 막았다.
나무위키
1973년, 유신헌법 선전요원에서 대법원판사로
한환진의 변신은 1969년부터 시작됐다. 변호사 신분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 위촉된 그는 박정희(1917~1979)의 3선 개헌과 유신헌법에 따른 각종 선거를 적극 홍보했다. 1973년 조선일보 좌담회에서 그는 부정선거 문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주민의 주권의식과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는 식의 정권옹호 발언만 늘어놓았다. 그 보상은 빠르게 찾아왔다. 같은 해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을 내린 대법원판사 9명이 재임명에서 탈락하는 와중에, 한환진은 신규 임명된 6명 중 유일한 재야변호사로 대법원판사가 됐다.
한환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73년, 납북어부에게 간첩 판례 를 만들어주다
한환진의 가장 결정적인 반헌법 행위는 1973년 신평옥 간첩사건 판결이다. 1968년부터 대법원은 일관되게 납북귀환어부가 북한 실정을 진술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협박에 의해 강요된 행위로 무죄 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1973년 9월, 주심 한환진은 1심·2심 무죄였던 신평옥 사건을 파기하며 어로저지선 부근에서 조업하면 납치될 수 있다는 미필적 예측 이 인정돼야 한다 고 판시했다. 이 판례가 납북어부 간첩죄 처벌을 당연시하는 길을 열었다.
그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신평옥과 함께 납북됐던 동림호 선원들이 곶감 빼 먹듯 줄줄이 처벌받았다. 김성학, 이청일은 1973년 다시 끌려가 고문으로 간첩혐의를 추가로 받았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이후, 2023년 광주고법은 신평옥과 선원 5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50년 만이었다. 신평옥은 법정에서 형법 교재에 기재된 73도1684, 이제는 바로 잡아주세요 라고 호소했다. 검찰조차 현재 검찰의 일원으로서 깊이 사과한다 고 했다. 한환진은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광주 동구 광주고법 법정동에서 납북어부 신평옥(84)씨가 반공법 위반 등 혐의에 대해 50여년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뒤 소회를 밝히고 있다. 2023.9.7. 연합뉴스
1975년 4월 8일, 인혁당재건위 8명의 사형, 18시간만의 집행
한환진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은 1975년 인혁당재건위·민청학련 사건이다. 대법원전원합의체는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 사형을 확정했고, 18시간 뒤 사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 로 선포했다. 대법원판사 가운데 이일규(1921~2008)만이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냈다. 한환진을 포함한 나머지 전원은 다수의견에 가담했다.
인혁당 사형 유족에 대해 20억~33억원씩 국가배상 판결이 난 가운데 여정남씨 조카 여상화씨와 하재완씨 부인 이영교(왼쪽부터)씨 등 유족들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2007.8.21. 연합뉴스
1974~1976년, 장준하, 김동길, 최철교, 문인간첩단까지
한환진이 관여한 다른 사건들의 목록도 길다. 1974년 장준하(1918~1975)에게 징역 15년 확정, 1975년 연세대 교수 김동길(1928~2022)에게 징역 15년 확정, 같은 해 일본 관련 최철교 삼형제 간첩조작사건 사형 확정(2019년 재심무죄), 1976년 문인간첩단사건 상고기각(2011~2018년 순차 재심무죄). 그가 대법원판사로서 담당한 긴급조치위반 사건 상고심은 무려 50건에 달했다.
한환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나치전범들의 기억상실 전략은 가장 비겁한 책임회피로 평가된다. 직접 서명한 서류 앞에서 본 적이 없다 고 말하는 것은,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책임의 무게를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한환진의 그 말을 떠올렸다.
(사형) 판결문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사형 판결문 앞에서도, 책임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