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끌려갔고, 삼남매는 고아가 되었다 [사람들] 1980년 제5공화국 정권 창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 정화라는 미명 아래 삼청교육대 입소생들이 봉 체조를 받고 있다. 1988.10.5. 연합뉴스 자료사진
오수미 대표를 처음부터 ‘삼청교육대 피해자 유족’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은 어쩌면 그를 너무 작게 설명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는 장애인 부모 운동가였고, 발달장애인의 교육권을 외친 활동가였으며, 통합교육을 주장한 학부모였고, 이제는 삼청교육 피해자와 유족의 인권을 위해 거리로 나서는 시민운동가다. 그런데 그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여러 개의 이름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국가는 인간을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그는 그 질문을 자신의 삶으로 배웠다. 그가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대신해 국가에 책임을 묻고 있는 이유도, 장애인 부모 운동을 하면서 장애인의 권리를 외쳤던 이유도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난다. 누구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사회에서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것, 국가와 사회가 약한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상처 입은 사람의 삶을 ‘그때 끝난 사건’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수미 대표의 싸움은 그래서 과거를 향하고 있지만 동시에 현재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국가폭력이 한 사람을 때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무너뜨리고, 아이를 시설로 보내고, 그 아이의 평생에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을 만나게 된다.
그는 1969년생이다. 그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다만 어머니와 친척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오수미가 뒤뚱거리며 걷던 시절, 아버지는 딸이 넘어질까 뒤따라가며 붙잡아주곤 했다. 둘째였던 오수미를 유독 예뻐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집에서 사라졌다. 왜 사라졌는지, 어디로 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아버지는 그의 인생에서 ‘부재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얼마 뒤 어머니마저 집을 떠났다. 오수미와 오빠, 남동생 세 남매만 남았다.
그날 어머니는 오빠가 친구 집에 가서 TV를 보고 있다며 오빠를 찾아오라고 했다. 어린 오수미는 자신이 오빠를 찾아 나가면 어머니가 사라질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오빠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사라져 있었다. 그날 이후 세 남매의 삶은 친척집을 전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친척집에서도 아이들은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알아차렸다. 밥 한 숟가락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도봉유린원 시절의 오수미 대표.
당시 학교를 너무 다니고 싶었던 오빠의 제안으로 저희 세 남매는 파출소를 거쳐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거쳐 도봉산 초입의 도봉유린원에서 생활했어요. 오빠는 매우 영특한 아이였습니다. 동생들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오빠였고, 눈치가 빨라 무엇이든 잘 알아듣는 아이였는데, 은평구에 있던 시립아동보호소에서 지내던 어느 날부터 오빠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아홉 살 오빠가 시설에서 휘두른 폭력 앞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게 영특했던 오빠가 어느 순간부터 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오빠는 왜 나를 몰라보는 것일까. 저는 당시에 오빠가 구타 때문에 그렇게 됐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익숙했던 사람이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죠.”
시립아동보호소에서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삼남매는 다시 시설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도봉유린원이었다. 그의 시설 생활은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자신의 시설 생활을 합쳐 11년이라고 기억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11년은 짧지 않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나이부터 사춘기를 지나 청소년기를 마칠 때까지의 시간이다. 친구가 생기고, 학교에 적응하고, 첫사랑을 만나고, 미래를 꿈꾸기 시작하는 시기다. 하지만 그에게 그 11년은 시설이라는 공간 안에서 흘렀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사귀고, 그곳에서 어른이 되어갔다. 시설은 집이 아니었지만 집의 역할을 대신했다. 가족은 없었지만 아이들은 서로를 가족처럼 의지하며 살아갔다. 그렇게 어린 오수미의 삶에는 ‘시설’이라는 단어가 너무 오래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는 총무라는 직책의 관리자가 폭력을 휘둘렀고, 그 폭력은 선배들을 통해 다시 내려오기도 했다. 특히 동생이 많이 맞았으며, 총무의 폭력은 한 대만 맞아도 기절할 정도로 가혹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설을 둘러싼 또 하나의 변화가 찾아왔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의 도시 환경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서울 시내의 고아원 등 사회복지시설을 외곽이나 지방으로 이전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정책이 추진됐다. 당시 시설들은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시설, 이른바 혐오시설로 취급됐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었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한 정책은 아니었다. 국제행사를 준비하면서 서울을 정비하는 동안, 서울에 살고 있던 아이들은 서울 밖으로 밀려날 처지가 됐다. 도봉유린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설의 용인 이전이 결정됐다. 그에게 그것은 단순한 주소 이전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그에게 서울은 비록 가족이 없는 도시였지만 자신이 살아온 곳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었다. 시설은 떠날 수 있었지만, 서울은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그 무렵 뜻밖에 어머니가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찾아왔다. 그는 그 만남을 통해 어머니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됐다. 그래서 그는 시설을 따라 용인으로 가는 대신 엄마에게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한 소녀의 선택이었다. 시설의 보호와 엄마라는 불확실한 세계 사이에서 그는 엄마를 택한 것이다.
당시 고아원을 바라보던 국가와 사회의 시선을 새겨봐야 한다. ‘너희가 사는 곳은 이 도시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은 서울을 더럽힌 것도 아니었다. 국제행사를 방해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부모가 없거나 부모와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시설에 살고 있었을 뿐이다. 이번에는 부모가 아니라 국가가 그들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디로 갔던 것일까. 왜 가족은 해체됐던 것일까. 왜 자신과 오빠와 남동생은 어린 나이에 시설에 들어가야 했던 것일까. 그 질문의 답은 결국 삼청교육대라는 국가폭력으로 이어졌다. 아버지가 국가에 의해 끌려갔고, 가족이 해체됐으며, 아이들이 시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다시 도시정책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한 사람의 삶에서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수미 대표(사진 중앙 한창민 의원의 왼쪽)를 비롯한 삼청교육 피해자.유족회 회원들이 진실화해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벌이고 있다.
가족의 해체를 경험했지만 동시에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훗날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됐다.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요구했다. 통합교육을 외쳤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삼청교육대 피해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 소녀가 지금 국가 앞에 서 있다. 그는 이제 국가에 질문한다. 왜 아이들이 부모의 폭력이나 국가의 폭력 때문에 시설로 가야 했는가. 왜 시설에서 폭력을 당한 아이들의 삶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는가. 왜 국가폭력으로 가족이 해체된 사람들의 삶을 국가는 책임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싸워야 하는가. 어린 시절의 그가 엄마를 찾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일이었다. 오늘의 그가 국가에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일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한 여성의 성장기가 아니다. 한 아이가 시설에서 보낸 11년의 기록만도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한 아이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왜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피해자들이 해야 합니까.” 열일곱 살 소녀가 엄마를 찾아 나섰던 그날부터, 어쩌면 오수미의 긴 시민운동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 남매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괜찮았다는 뜻이 아니다. 시설에서 나오는 순간 아이들은 다시 사회와 마주해야 했다. 가족도 없고, 경제적 기반도 없고, 부모의 보호도 없는 상태에서 성인이 되어야 했다. 오빠와 동생은 몇 년 전 사망했다. 더구나 그는 훗날 아버지의 행방을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을 다시 해석하게 된다.
2023년 2월 14일,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통보가 왔다. 아버지 오광수 씨가 삼청교육대 명단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오수미는 그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아버지 오광수 씨는 1942년생이다. 기록상 1980년 8월 4일 파주 25사단 삼청교육대에 입소했고, 순화교육을 받은 뒤 근로봉사를 거쳐 1981년 1월 출소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아버지가 사라진 것으로 남았다. 아버지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가족은 알지 못했다.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무려 4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통보서를 받아든 그는 통곡했다. 아버지가 왜 사라졌는지, 가족이 왜 해체됐는지, 자신의 어린 시절에 왜 그런 공백이 생겼는지를 비로소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은 바로 이런 모습으로 남기도 한다. 가해자가 총을 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건 기록에 이름 하나 남기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국가폭력의 가장 무서운 점은 폭력이 끝난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울고만 있지 않았다.
1980년 8월 국보위의 사회악 일소 조치로 검거되어 삼청교육대에 입소한 이들이 통나무를 뛰어 건너는 훈련을 받고 있다. 1988.10.6. 연합뉴스 자료사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아버지의 기록을 확인한 그는 조사관에게 자신의 이야기만 털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쏟아냈다. 지금 삼청 피해자와 자녀들은 다 어디서 뭐 한 대요?, 억울하지 않대요?, 이런 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조용히 있을 수 있나요?” 그 질문은 오수미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꾸었다. 아버지를 찾으러 들어갔던 사람이 삼청교육 피해자 전체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 피해자 단체를 찾아다녔고, 활동가들을 만났으며, 피해자와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2023년 삼청교육 피해자유족회를 결성했다. 이때부터 오수미의 삶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단순히 피해자의 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딸이자 피해자들의 동료가 되기로 한 것이다.
저는 아버지의 삼청교육 피해 사실을 알기 훨씬 전부터 장애인 부모운동을 해왔습니다. 큰아들이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으면서 장애인 부모 운동에 뛰어들었죠. 이후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대문지회장, 서울지부 부대표, 전국통합교육학부모협의회 대표 등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2016년에는 서울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을 요구하며 삭발하고 42일간이나 투쟁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정치적 퍼포먼스가 아니었어요.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자녀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놓은 것이었죠. 2017년 강서 특수학교 설립 논란 때도 장애아 부모들과 함께 현장에서 특수학교 설립을 호소했습니다. 2018년에는 전국통합교육학부모협의회 활동을 통해 장애학생이 비장애학생과 함께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했죠. 저에게 장애인운동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아이를 키우는 문제였죠. 그래서 거리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차별받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장애인 부모운동 10년은 일종의 훈련이었다. 그는 삼청교육 피해자운동에 뛰어든 것이 어쩌면 그동안 장애인 인권운동을 해온 경험과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두 운동은 대상이 달랐다. 하나는 장애인의 권리였고, 다른 하나는 국가폭력 피해자의 권리였다. 그러나 그가 바라본 핵심은 같았다. 인간의 존엄이었다. 장애인은 장애 때문에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국가폭력 피해자는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다는 낙인 때문에 평생 죄인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잘못 때문에 시설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국가는 자신의 폭력으로 피해를 입힌 사람을 ‘과거의 사건’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가 삼청교육 피해자들에게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보상’이 아닌 인권이었다.
그가 삼청교육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피해자들 스스로 가해자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피해자는 내가 잘못해서 갔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가서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두고 저런 사람은 삼청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슬픈 일이라고 했다. 당시 어떤 행실을 했든 국가가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당신이 당한 폭력은 당신의 잘못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당신의 존엄은 국가가 빼앗아갈 수 없다.” 그것이 오수미 대표가 말하는 인권의 출발점이다. 그가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말이 있다. ‘삼청교육대 부활.’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인터넷에서는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오수미에게 그 말은 단순한 인터넷 댓글이 아니다. 그 말은 피해자들의 삶을 다시 한 번 짓밟는 언어였다. 삼청교육 피해자를 흉악범 집단으로 묶어버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전국통합교육학부모협의회 출범 기자회견에 참석한 회원들
그리고 2026년 8월 7일. 오수미 대표에게 또 하나의 역사적인 장면이 찾아왔다. 제3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이재명 대통령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70여 명의 피해자들이 오찬에 참석했다. 대통령은 흰 장미를 피해자들에게 한 송이씩 전달했다. 흰 장미는 순수와 평화, 존중, 새로운 출발의 의미를 담았다. 그리고 대통령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향해 사과했다.
해방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국가폭력 사건의 피해자 여러분께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오수미 대표에게 이 말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아버지가 삼청교육 피해자라는 사실을 40년 넘게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 때문에 가족이 무너졌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이해했다. 그런 오수미가 대통령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아주 단순한 답을 했다. 이 일은 국가가 해야 한다.” 그 말에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짊어지고 온 무게가 담겨 있었다. 왜 피해자가 피해자를 찾아야 하는가. 왜 유족이 국가기록을 찾아다녀야 하는가. 왜 자식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증명해야 하는가. 왜 피해자가 국가의 잘못을 국가에 설명해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왜 피해자들이 하고 있는가.
그날, 그는 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가족 이야기도 했다. 아버지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고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이 불과 몇 년 전에 알았다는 이야기. 평생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다는 이야기. 그리고 오빠와 남동생을 먼저 떠나보냈다는 이야기. 청와대라는 공간은 국가 권력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그는 국가가 만든 상처를 국가 앞에 다시 꺼내놓았다. 그 장면은 역설적이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를 데려간 것도 국가였다. 가족이 해체된 뒤 아이들이 시설을 전전했던 것도 그 국가폭력의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오수미 대표가 국가에 책임을 묻기 위해 찾아간 곳 역시 국가의 공간이었다.
대통령은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오수미 대표의 싸움이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과는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피해보상과 배상을 강하게 요구해왔다. 아버지가 40년 넘게 돌아오지 않았다면 40년 동안 피해가 이어진 것 아니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오수미의 요구를 돈으로만 해석하면 그의 활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피해자의 명예회복이다. 그리고 역사적 기억이다. 그리고 교육이다. 그리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다.
시민운동가는 언제 만들어지는가. 어떤 사람은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배우며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노동현장에서 시작하며 누군가는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시민운동가가 된다. 그는 달랐다. 아이를 키우면서 시작했다. 자신의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을 보면서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거리로 나갔다. 그에게 운동은 직업이 아닌, 생활이었다. 그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투쟁과 일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돌보고, 피해자에게 전화를 받고, 집회에 참석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정부기관을 찾아가는 모든 일이 하나의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전형적인 시민운동가다. 거창한 조직의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출발해 사회적 질문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아버지를 잃은 한 소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한 시대의 이야기가 되었다.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