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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아랍 독립 거짓 약속…반란 부추긴 아라비아의 로렌스

아랍 독립 거짓 약속…반란 부추긴 아라비아의 로렌스
[국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1888~1935)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개 사막, 낙타, 흰 두건을 두른 영국 청년부터 떠올린다. 데이비드 린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덕분이다. 그런데 정작 이 인물의 삶을 들여다 보면 영웅담보다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제국이 약속을 파는 방식, 그리고 그 약속을 배달한 심부름꾼이 나중에 자기 이름마저 지우고 숨어 살아야 했던 사정을 보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씁쓸해진다.   1918년의 로렌스(위키피디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서 로렌스를 연기한 피터 오툴 웨일스에서 태어난 사생아, 사막의 고고학자가 되다 로렌스는 1888년 웨일스의 작은 마을 트레마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머스 채프먼은 아일랜드의 지주였는데, 본처를 버리고 가정교사와 눈이 맞아 도망친 뒤 성을 로렌스로 바꾸고 새 가정을 꾸렸다. 그러니까 로렌스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짜이름 을 쓰는 집안 출신이었던 셈이다. 이 사람이 훗날 몇 번이나 이름을 바꾸며 신분을 숨기고 다닌 걸 생각하면, 어쩌면 이건 팔자였는지도 모른다. 옥스퍼드에서 역사를 공부한 뒤 그는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경계 근처 카르케미시 유적 발굴에 참여하며 아랍어와 중동의 지리를 익혔다. 이때만 해도 그는 그저 유물 파는 데 관심 많은 학구파 청년이었다.   1916년 사이크스-피코 밀약 주요 내용. 국제 통제 구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의 통제 구역과 영향력을 유지하는 구역을 획정했다. 이코노미스트 홈페이지 갈무리 전쟁이 만든 영웅, 그리고 그 영웅이 나른 거짓 약속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군 정보국은 아랍어에 능통한 이 청년을 이집트 카이로로 불러들인다. 오스만 제국을 흔들기 위해 영국은 아랍인들의 반란을 부추기기로 하는데, 그 중심에 메카의 태수 후세인 빈 알리의 아들 파이살 1세(Faisal I bin Hussein, 1885~1933)가 있었다. 로렌스는 파이살의 연락장교로 붙어 게릴라전을 지휘했고, 1917년에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아카바 항을 기습 함락하는 전공을 세운다. 이 장면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유명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오스만을 몰아내면 독립 왕국을 주겠다 고 약속했지만, 뒤로는 프랑스와 이미 1916년에 중동을 나눠 먹기로 밀약을 맺어 놓은 상태였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라 불리는 이 밀약은 지도 위에 자를 대고 국경선을 그은 것으로 악명 높은데, 오늘날 중동 분쟁의 상당수가 이 선 긋기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렌스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파이살에게 독립을 약속하며 전쟁을 부추긴 처지였으니, 스스로도 두고두고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1912년경 카르케미시 발굴 현장에서의 레너드 울리(왼쪽)와 로렌스(위키피디아) 파리에서의 배신, 그리고 유명해지기 싫었던 유명인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파이살은 아랍 독립을 호소했지만 승전국들은 이미 나눠 먹기로 한 몫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파이살은 잠깐 시리아 왕이 되었다가 프랑스군에 쫓겨났고, 이후 영국의 손을 빌려 이라크 왕좌에 앉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로렌스는 이 배신극의 조연이자 목격자였다. 영화의 기본이 됐던 전쟁 회고담 지혜의 일곱 기둥 으로 유명세를 얻은 로렌스는 정작 그 명성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1922년 영국 공군에 사병으로 위장입대하며 존 흄 로스 라는 가짜 이름을 썼다가 언론에 들통 나 쫓겨났고, 이번엔 육군 전차부대에 T. E. 쇼 라는 이름으로 다시 숨어들었다. 세계적 이름난 인사가 계급도 없는 사병으로 위장해 숨어 지낸 셈이니,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지낸 사람이 신분증을 위조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격이다. 그는 1935년, 오토바이 사고로 마흔여섯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당시 베르사유에서의 파이살 왕자 일행; 왼쪽부터 루스툼 하이다르, 누리 알 사이드, 파이살 왕자(앞쪽), 피사니 대위(뒤쪽), 로렌스, 파이살의 수행원(이름 미상), 하산 카드리 대위(위키피디아) 이게 한국과 무슨 상관인가 로렌스 이야기의 핵심은 사막의 낭만이 아니라 강대국이 약소민족에게 판 약속의 유통기한 이다. 아랍인들은 독립을 믿고 피를 흘렸지만, 그 대가는 자기들 의사와 무관하게 그어진 국경선이었다. 이 구도는 낯설지 않다. 1945년 한반도 역시 우리 손으로 그은 적 없는 38선을 경계로 갈라졌고, 해방을 약속받았던 이들이 정작 분단이라는 청구서를 받아 들었다. 강대국의 회의실에서 결정된 운명을 약소국 민중이 감당해야 했던 구조는 백 년 전 중동이나 팔십 년 전 한반도나 놀랍도록 닮아 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은, 정작 그 밀실 약속을 전달하고 실행한 실무자가 훗날 양심의 가책과 환멸 속에 스스로를 지우려 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정치에서도 지난 2024년 12월 3일 내란의 밤, 로봇처럼 맹목적으로 윤석열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이들이 나중에야 나도 몰랐다 며 발을 빼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러나 로렌스처럼 이름을 바꿔 숨는다고 해서 역사가 그의 역할을 잊지는 않는다. 결국 그의 진짜 이름과 얼굴은 다시 드러났고, 오늘날까지 그의 공과는 계속 재평가되고 있다. 강대국의 밀실 외교에 놀아난 약소민족의 서글픔, 그리고 그 하수인 노릇을 했던 개인의 뒤늦은 죄책감. 이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로렌스 이야기가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남의 손에 그려진 국경선 안에서 살아온 나라일수록, 이 사막에 날아든 청구서를 남의 얘기로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있는 에릭 케닝턴의 로렌스 흉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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