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걸려 남편의 자취 책으로…전쟁미망인 올윈 그린 [사람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스물한 살 군인
1939년 호주 어느 시골 잡화점. 열일곱 살 소녀 올윈 그린(Olwyn Green, 1923~2019)이 아버지 가게를 보고 있는데, 훤칠한 스물한 살 군인 하나가 들어온다. 살 게 있어서라기보다는 만년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눈만 마주친 채 헤어진다. 흔한 짝사랑으로 끝날 뻔한 이야기가 역사에 남은 이유는, 이 군인의 이름이 찰리 그린(Charles Hercules Green, 1919~1950)이었기 때문이다.
2년 뒤 그리스 전선에서 싸우던 찰리는 우연히 만년필을 보다가 그 소녀를 떠올리고 편지를 쓴다. 다시 2년이 흘러 1943년, 둘은 결혼한다.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인데, 문제는 이 낭만이 시작부터 끝까지 전쟁을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실제로 함께 지낸 시간은 결혼생활 7년 중 채 몇 달이 되지 않는다.
올윈과 찰리 그린의 결혼식 ⓒ 올윈 그린
세계 최연소 대대장, 훈장은 덤이었다
찰리는 호주군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보병대대를 지휘한 인물로 꼽힌다. 2차세계대전 중 북아프리카, 그리스, 시리아를 전전하며 훈장까지 받고 전쟁영웅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제대 후 농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아내가 반대했다. 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농사와 군대뿐이었다는 게 훗날 아내 올윈의 회고인데, 농사를 막았으니 남은 길은 하나였던 셈이다. 1949년 새로 창설된 호주 정규군에 장교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다.
찰리 그린과 딸 안띠아의 즐거운 한때. 1950년 한국전쟁 참전 직전 딸과의 마지막 만남 ⓒ 올윈 그린
가장 안전한 곳 에서 죽다
1950년 9월 28일, 중령 찰리는 3대대를 이끌고 부산에 상륙한다. 영연방군 소속으로 영국군 준장의 지휘를 받으며 북으로 진격한다. 용주 전투, 정주 전투를 거치며 부대는 계속 선두에 섰다. 10월 29일 밤, 48시간 동안 한숨도 못 잔 찰리는 부하에게 왜 자기 막사가 하필 이 자리냐고 묻는다.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서 라는 답이 돌아온다. 몇 시간 뒤 인민군 포탄 파편이 나무에 맞고 튕겨 막사를 뚫고 들어와 잠자고 있던 찰리의 복부를 관통한다. 주변에 병사가 1000명 넘게 있었는데 파편은 정확히 그 한 사람을 찾아갔다. 11월 1일, 찰리는 그렇게 죽는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바로 그날이다. 안전한 자리를 골라줬다는 부하의 배려가 결국 목숨을 빼앗은 이 아이러니는,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계산을 비웃는지 보여준다.
찰스와 올윈,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 당신은 30 청년 나는 90 할머니인데 어쩌지요? ⓒ 올윈 그린
스물일곱 미망인, 역사를 짓다
찰리가 죽었을 때 올윈은 스물일곱, 세 살배기 딸을 안고 있었다. 학교는 열세 살에 그만둔 터라 배운 것도 기술도 없었다. 미국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가 친필 위로편지를 보내고 미국정부가 은성훈장을 추서했지만, 그런 것들이 생계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올윈은 뒤늦게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고 20년 넘게 영어교사로 일한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지 30년이 지난 뒤에야, 그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기 위해 전기를 쓰기 시작한다. 자료조사에만 12년이 걸려 1993년에야 책이 나온다. 이 기록은 훗날 호주 전쟁문학의 성과로 꼽히고, 올윈은 한국전쟁에서 숨진 호주군인 전원의 이름을 이불에 손바느질로 새기는 기획까지 조직한다. 국가가 세운 기념비 하나보다, 과부 한 사람이 30년 걸려 쓴 책과 손바느질 이불 한 채가 더 오래 기억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책표지 ⓒ 올윈 그린
한국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찰리 그린의 이야기가 새삼스러운 건, 남의 전쟁에 국민을 보내는 결정이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어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강압적 요구에 파병 여부를 놓고 정치권이 논쟁을 벌일 때, 정작 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자식이 전선에 서는 일은 드물다. 찰리는 지휘관이었고 부하들과 같은 막사, 같은 위험을 나눴다. 이 단순한 사실 하나가 호주에서 그를 국가적 인물로 만든 이유다.
한국전쟁을 두고도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가 만든 기념사업 이야기만 들어 왔다. 정작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이나 유가족 증언 수집은 국가보다 시민들의 손에서 더디게, 그러나 꾸준히 진행돼 왔다. 찰리의 아내 올윈이 국가의 지원 없이 12년을 혼자 파헤쳐 남긴 기록처럼, 한국의 전쟁 기억 역시 결국 아래로부터 채워져 온 부분이 크다. 누군가는 훈장을 받고 누군가는 잊히는 전쟁의 셈법 속에서, 기록을 남기는 일은 늘 힘없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지만, 그 법정에 증거를 가져다 준 이들은 대개 유족과 시민이지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 대구에서 영국 연방 제27여단장 배질 코드(Basil Coad, 왼쪽) 준장과 함께한 찰리 그린(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