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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플랫폼 국가가 시민 위에 군림 못하게 더 큰 시민 필요

플랫폼 국가가 시민 위에 군림 못하게 더 큰 시민 필요
[뉴스]
아일랜드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에서 시민들이 국가의 주요 현안을 토론하고 있는 모습(2016~2018). 숙의민주주의와 시민의회는 민주공화주의의 새로운 제도적 가능성으로 주목받고 있다. 선거만으로는 시민주권이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감시하고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민주공화주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아일랜드는 낙태 합법화와 헌법 개정 등 주요 국가 현안을 시민의회를 통해 논의했으며, 프랑스의 기후시민회의, 벨기에 동벨기에 지역의 상설 시민의회, 독일과 캐나다 등의 시민참여형 숙의제도 역시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글에서는 지난 4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 플랫폼과 인공지능이 결합하며 시민의 삶과 민주주의를 둘러싼 새로운 권력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권력을 시민은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요. 민주공화주의는 어떠한 원리를 통해 이 시대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답을 민주공화주의가 세 번째 확장을 통해 제시한 비지배(non-domination)​의 원리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말하는 비지배는 1997년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이 『공화주의』(Republicanism, 1997)에서 제시한 개념을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이후 30여 년 동안 세계는 빅테크와 인공지능, 초국적 금융자본, 국제적 극우 네트워크, 그리고 다극질서라는 전혀 새로운 현실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새로운 지배가 등장했다면, 비지배의 원리 또한 그 시대에 맞게 확장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정치철학자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일랜드의 정치철학자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입니다. 페팃은 『공화주의』(Republicanism, 1997)를 통해 자유주의가 오랫동안 자유를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 로 이해해 왔다는 점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란 단순히 간섭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권력도 시민을 자의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상태, 곧 비지배(non-domination)​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페팃의 관심은 자유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가 더욱 깊이 고민한 것은 민주주의였습니다.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했다고 해서 시민주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은 언제든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집중될 수 있으며, 시민은 형식적인 주권자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민이 실질적인 주권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권력구조가 필요한가. 권력을 어떻게 시민의 통제 아래 둘 것인가. 페팃은 바로 이 질문을 중심에 놓고 공화주의를 다시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인민의 관점에서』(On the People s Terms, 2012)를 비롯한 연구를 통해 시민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공화주의적 제도 설계를 꾸준히 발전시켜 왔습니다. 시민의회와 숙의민주주의, 권력의 분산과 공적 책임성 강화는 모두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제안들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자신이 비판해 온 자유주의가 현실에서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형태로 민주주의를 약화시켜 왔다는 점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Geopolitique.eu 인터뷰, 2024. 6. 20.). 우리가 오늘 다시 페팃의 공화주의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권력을 어떻게 시민의 통제 아래 둘 것인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를 단순한 선거제도가 아니라 시민주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권력구조로 이해하려 했던 그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페팃이『공화주의』에서 비지배를 제시한 이후, 지난 30년 동안 세계는 다시 한 번 크게 변했습니다. 1997년 『공화주의』가 출간될 당시 빅테크는 이제 막 태동하고 있었고, 인공지능은 오늘과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초국적 플랫폼 기업이 국가를 넘어 세계 여론을 움직이고, 거대 기술기업이 국제정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도 아직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일랜드 정치철학자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은 공화주의 (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1997)에서 자유를 비지배(non-domination) 로 새롭게 정의했다. 그는 자유란 단순히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누구의 자의적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는 상태라고 설명하며 현대 공화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빅테크는 세계경제의 핵심 권력이 되었고, 인공지능은 산업과 교육, 행정은 물론 전쟁의 양상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국가는 첨단기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빅테크를 규제하는 동시에 육성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트럼프 2기를 전후하여 빅테크 올리가르키가 극우세력과 결합하면서 민주주의의 공론장과 정치과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페팃의 공화주의가 낡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문제의식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더욱 확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국민주권이 민주공화주의의 첫 번째 확장이었다면, 인간의 존엄은 두 번째 확장이었습니다. 이제 민주공화주의는 시민의 통제를 벗어난 초국적 금융자본과 빅테크, 인공지능과 국제적 극우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자유와 주권을 지켜낼 새로운 원리와 제도를 모색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말하는 비지배(non-domination)​는 바로 그 새로운 시대가 민주공화주의에 던지는 질문이며, 동시에 민주공화주의가 스스로 찾아야 할 다음 단계의 답입니다. ■ 자유는 왜 비지배(non-domination) 여야 하는가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은 『공화주의』(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1997)에서 자유주의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유는 서구사회가 절대왕정과 전제권력에 맞서 오랜 세월에 걸쳐 어렵게 획득한 가장 소중한 정치적 성과이며, 민주주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페팃은 무엇을 문제 삼았던 것일까요. 그가 비판한 것은 자유 자체가 아니라 자유를 이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근대 자유주의는 오랫동안 자유를 비간섭(non-interference)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을수록 자유는 확대되고, 개인의 선택과 시장의 자율성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자유관은 절대권력으로부터 시민을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자유주의는 새로운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문제로 더욱 좁게 이해했습니다. 규제는 완화되어야 하고, 국가는 시장에서 물러나야 하며, 경쟁은 사회 발전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장과 자본의 힘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졌습니다. 그 결과는 역설적이었습니다. 국가의 간섭은 줄어들었지만 시민은 거대 기업과 금융자본, 독점적 시장권력 앞에서 오히려 더욱 취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공동체는 약화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노동과 일상은 거대한 경제권력에 점차 종속되어 갔습니다. 자유는 확대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모든 시민의 자유가 아니라 강자의 자유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공화주의』에서 페팃이 신자유주의 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비판한 자유주의의 현실적 모습은 당시 미국과 영국 사회를 지배하던 신자유주의 질서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후속 연구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페팃은 『인민의 관점에서』(On the People s Terms: A Republican Theory and Model of Democracy, 2012)에서 비지배를 민주주의의 제도적 원리로 더욱 발전시켰고,「신자유주의와 신공화주의」(Neo-Liberalism and Neo-Republicanism, 2019)에서는 신공화주의를 최근 정책 영역을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 이라고 직접 규정했습니다. 또한 2024년 「공화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Republicanism?) 인터뷰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비간섭으로만 이해함으로써 평등과 공공성을 약화시켰으며, 공화주의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유의 이론이라고 다시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공화주의』에서 제시한 선한 주인 밑의 노예 라는 비유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온화하여 간섭하지 않는다면 노예는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선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주인이 마음만 바꾸면 그 자유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간섭이 없다고 해서 지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페팃은 자유를 다시 정의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단순히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시민이 국가뿐 아니라 시장과 자본, 사회적 권력 등 어떠한 자의적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 누구에게도 임의로 지배받지 않는 상태가 자유입니다. 그는 이러한 자유를 비지배(non-domination)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책의 제목을 『공화주의』라고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시민의 자유를 온전히 지켜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보장하려면 권력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집중되거나 사유화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견제하고 통제하는 정치질서가 필요합니다. 자유의 문제는 결국 권력의 문제이며, 권력의 문제는 다시 공화주의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페팃이 말한 비지배는 반권력의 구호도, 국가를 약화시키자는 주장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민주권 위에 성립한 권력이 다시 시민을 자의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민주공화주의의 핵심 원리였습니다. 자유를 폐기하려는 이론이 아니라, 자유를 더욱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자유의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 필립 페팃의 비지배(non-domination) 이론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표-1) 필립 페팃의 비지배(non-domination) 이론의 전개와 확장(1997~2024)*표의 근거: 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필립 페팃, 1997.On the People s Terms: A Republican Theory and Model of Democracy, 2012.The Globalized Republican Ideal,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 2016.Europes: Geopolitique 인터뷰(2024.6.20).Prospect Magazine Just Freedom: Philip Pettit and the Republican Idea of Liberty . 페팃의 공화주의는 한 사람의 문제의식만으로 완성된 이론이 아닙니다. 고전 공화주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하려는 여러 정치철학자들의 연구가 축적되면서 오늘날의 신공화주의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퀜틴 스키너는 공화주의 자유 개념의 역사적 계보를 복원했고, 프랭크 러벳은 이를 현대 정치이론으로 더욱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표 2) 신공화주의 발전에 기여한 주요 연구자들.퀜틴 스키너,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Liberty Before Liberalism, 1998); 필립 페팃, 공화주의 (1997), 인민의 관점에서 (2012);프랭크 러벳, 신공화주의: 공화주의 정치철학 비판 (A General Theory of Domination and Justice, 2010) 및 관련 연구를 종합하여 작성. 이러한 연구의 흐름을 보면 비지배(non-domination)는 하나의 철학적 개념에 머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의 개념에서 출발한 비지배는 민주주의와 헌정질서, 시민참여와 국제질서에 이르기까지 적용 범위를 꾸준히 넓혀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공지능과 빅테크, 초국적 금융자본과 플랫폼 권력이 시민의 삶과 민주주의를 새롭게 규정하는 현실은 페팃이 처음 마주했던 시대와는 또 다른 과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공화주의는 이러한 새로운 권력 앞에서 비지배의 원리를 어떻게 확장해야 할까요. 이제 그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 누가 권력을 갖는가 에서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가 로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이 제시한 비지배(non-domination)의 개념은 현대 정치철학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자유를 단순히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누구의 자의적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는 상태로 재정의함으로써,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새롭게 연결했기 때문입니다. 비지배는 정치철학의 영역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 이론과 헌정주의 연구, 공공정책과 시민참여, 숙의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며 현대 민주공화주의를 이해하는 핵심 원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무엇보다 페팃의 가장 큰 공헌은 자유를 다시 권력의 문제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입니다. 근대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페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했습니다. 국가의 권력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인간은 정말 자유로워졌는가. 시민은 국가의 지배에서는 벗어났을지 모르지만, 기업과 금융자본, 사회적 위계와 다양한 권력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자의적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은 민주주의의 관심을 단순히 누가 권력을 갖는가 에서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가 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권력이 시민의 감시와 견제 아래 공공선을 위해 행사되도록 만드는 정치질서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화주의』(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1997)는 현대 민주공화주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페팃은 자유주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유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공화주의를 다시 불러냈고, 시민주권이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공화주의는 그 권력이 시민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원리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공화주의』가 출간된 지 거의 30년이 흐르는 동안 세계는 다시 한 번 거대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인터넷은 인공지능으로 발전했고, 플랫폼 기업은 국가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으며, 데이터는 새로운 권력이 되었습니다. 글로벌 금융자본과 초국적 기업은 국가의 정책뿐 아니라 시민의 일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권력은 더 이상 국가만이 아닙니다. 거대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을 것인지를 결정하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판단을 대신하기 시작했으며, 데이터는 소비와 행동, 정치적 선택까지 예측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권력은 더욱 복잡해졌고, 더욱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1997년 페팃이 제시했던 비지배만으로 오늘의 자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페팃의 공화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출발점이 곧 종착점은 아닙니다. 페팃이 자유를 국가의 간섭 여부가 아니라 자의적 지배의 문제로 확장했다면, 오늘 우리의 과제는 그 자의적 지배의 범위를 다시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민주공화주의는 국가권력뿐 아니라 초국적 금융자본과 빅테크, 플랫폼과 알고리즘, 인공지능, 그리고 국제적으로 연결된 극우 네트워크까지 시민의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돌이켜 보면 민주공화주의는 언제나 시대가 만들어 낸 새로운 지배에 맞서 스스로를 확장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국민주권의 확립이 첫 번째 확장이었다면 인간의 존엄과 보편적 인권의 확립은 두 번째 확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페팃이 제시한 비지배는 세 번째 확장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빅테크, 초국적 자본이 인간의 자유를 새롭게 규정하는 오늘날 민주공화주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야 할까요. 이제 우리는 그 새로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 새로운 지배의 시대, 민주공화주의는 다시 진화해야 한다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이 『공화주의』(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1997)에서 자유를 비지배(non-domination)로 재정의한 것은 현대 민주공화주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단순히 국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누구의 자의적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는 상태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국가권력뿐 아니라 시장과 자본, 사회적 권력까지 민주공화주의의 성찰 대상으로 확장한 중요한 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의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지배를 발견하며 스스로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국민주권의 확립이 첫 번째 확장이었다면 인간의 존엄과 보편적 인권의 확립은 두 번째 확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페팃이 제시한 비지배는 민주공화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세 번째 확장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공화주의』가 출간된 1997년 이후 세계는 인공지능과 초연결사회, 데이터경제와 플랫폼경제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당시 인터넷은 이제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기술이었지만,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은 인간의 삶과 경제, 정치와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의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 권력의 중심 역시 국가만이 아니라 플랫폼과 데이터,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권력의 성격 자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과거 권력은 군대와 경찰, 행정조직처럼 눈에 보이는 국가권력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권력은 추천 알고리즘과 검색 결과, 데이터 분석과 생성형 인공지능처럼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시민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플랫폼이 설계한 정보환경 속에서 사고하고 소비하며 정치적 판단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국가와 플랫폼의 관계입니다. 과거 국가와 기업은 비교적 분리된 권력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국가와 거대 플랫폼, 인공지능 산업, 금융자본이 서로 긴밀하게 결합하는 새로운 권력구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산업정책과 안보정책, 데이터정책과 인공지능정책은 하나의 국가전략으로 통합되기 시작했고, 국가와 시장의 관계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습니다. 대한민국 역시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최근 정부는 반도체와 피지컬 AI, 인공지능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구축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AI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며, 세계적인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반드시 고민해야 할 국가적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는 여기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국가의 역량이 커질수록, 기업의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그리고 인공지능과 데이터가 국가발전의 핵심 자원이 될수록 시민의 자유는 어떻게 지켜질 것인가. 국가와 기업이 공동으로 구축하는 거대한 생산체계와 데이터체계는 누구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민주공화주의가 직면한 새로운 과제가 있습니다. 페팃이 말했던 자의적 권력 은 결코 과거의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는 그 개념을 더욱 넓은 차원에서 다시 이해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 냈다면 민주공화주의 역시 그 권력을 시민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도록 다시 진화해야 합니다. ■ 민주공화주의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것인가 대한민국 역시 이러한 거대한 전환의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최근 정부는 반도체와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한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을 첨단 제조업과 인공지능에서 찾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세계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략적 선택이며, 미래 세대를 위한 새로운 성장 기반을 구축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시대인식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인터넷 시대의 강자는 플랫폼을 가진 기업이었다. AI 시대의 강자는 생산체계를 가진 국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 , 국가는 생산플랫폼이다. 라고 밝힌 글(페이스북, 2026. 7. 5.)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저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 공감합니다. AI 시대에는 반도체와 데이터, 전력과 첨단 제조업, 디지털 인프라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는 국가는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국가는 더 이상 단순한 규제자가 아니라 국가의 생산체계와 기술혁신을 조직하는 전략적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준비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는 여기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국가가 생산플랫폼이 된다면 그 플랫폼은 누구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국가가 막대한 재정을 운용하고 기업이 천문학적인 투자를 집행하며 인공지능과 데이터가 국가경쟁력의 핵심 자원이 되는 시대라면,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국가권력과 행정권력, 자본권력 역시 시민의 민주적 통제 아래 놓여야 합니다. 필립 페팃은 『공화주의』(Republicanism: A Theory of Freedom and Government, 1997)에서 선한 주인 아래 있는 노예도 자유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자유는 지배자의 선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견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원리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정부라고 해서 감시가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책임 있는 기업이라고 해서 공적 통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없습니다. 국가가 산업을 이끌고 플랫폼을 구축하는 시대가 될수록 민주공화주의는 더욱 강력한 시민적 견제와 참여를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제 선한 주인 뿐 아니라 선한 플랫폼 도 경계해야 합니다. 플랫폼이 기업이든 국가이든 막대한 데이터와 인공지능, 사회의 핵심 인프라를 통제하는 권력이 되는 순간 민주공화주의는 다시 질문합니다. 그 권력은 시민이 통제하고 있는가. 저는 이것이 AI 시대 민주공화주의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대한민국 진보운동의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꾸준히 모색해 온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은 「2028총선은 공유부선거연대와 민치설계의 두 축으로 — 백낙청과 이병권에 화답한다」(2026. 7. 4.)에서 설계 없는 개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고 지적하며, 추첨숙의형 시민의회와 숙의민주주의, 플랫폼과 데이터의 공공성 강화, 디지털 민주주의의 제도화 등을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제안의 세부적인 제도 설계는 앞으로도 다양한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를 헌법 조문에 머무는 원리가 아니라 시민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살아 있는 제도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오늘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대적 과제입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선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민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하며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때 비로소 민주공화정은 살아 움직인다. 인공지능과 빅테크 시대에도 민주공화주의는 시민의 참여와 숙의를 통해 새로운 권력을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시민의회와 숙의민주주의, 국민참여재판과 배심원제의 확대, 플랫폼과 알고리즘의 투명성 확보, 데이터의 공공성 강화와 시민참여형 디지털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정책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거대해진 국가권력과 자본권력, 플랫폼권력이 시민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민주공화주의의 새로운 견제장치입니다. 민주공화주의는 국가를 약하게 만드는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가 요구하는 국가역량을 충분히 갖추되, 그 권력이 시민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견제하고 통제하는 헌정질서입니다. 권력이 커질수록 시민의 통제 역시 함께 커져야 합니다. 더 큰 국가에는 더 큰 시민이 필요합니다. 더 큰 권력에는 더 큰 시민권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 민주공화주의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 맺음말 : 민주공화주의는 다시 진화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인공지능과 산업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변곡점 앞에 서 있습니다. 새로운 국가 전략도, 새로운 성장 동력도 절실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 거대한 권력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견제하는가. 최근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더불어민주당 의원 워크숍에서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The Third Way) 을 언급하며 중도층 확대를 위한 새로운 정치 노선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정치는 100% 수요자 우위의 시장이다. 대중들의 수요에 잘 응답하는 정당이 되어 달라. 고 말했습니다(동아일보, 2026. 7. 4.). 국가 대전환을 추진하려는 정부의 의지 자체는 충분히 평가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가 먼저 묻는 것은 정책의 방향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입니다. 대통령비서실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보좌하고 정부와 국회를 연결하는 기관입니다. 반면 정당의 노선과 정책은 당원과 의원들의 토론과 숙의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정당민주주의의 원칙입니다. 정부와 정당, 국가와 시민사회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긴장과 균형을 유지할 때 민주 공화주의는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정치는 국민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는 과연 시장일까요. 시장은 소비자의 선택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공화국은 시민의 숙의로 유지됩니다. 시장은 수요를 묻지만 민주공화국은 공공선을 묻습니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확인하는 제도라면 공화주의는 그 뜻이 권력으로 사유화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붙잡아 두는 헌정원리입니다. 우리는 소비자가 아니라 시민입니다. 영국의 제3의 길은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가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의 방향으로 이론화했고, 토니 블레어(Tony Blair, 1953~) 정부가 이를 국정 운영의 원리로 구현했습니다. 당시에는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를 조화시키려는 새로운 정치 실험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3의 길은 기대했던 성과를 충분히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블레어 정부는 세 차례 총선에서 승리하며 장기간 집권했지만 영국 사회의 불평등과 공동체의 균열을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노동당은 2010년 총선에서 정권을 보수당에 넘겨주었습니다. 이러한 한계에 대해 샹탈 무페(Chantal Mouffe, 1943~)는 『정치적인 것에 관하여』(On the Political, 2005)에서 제3의 길이 정치적 대안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의 토양을 넓혔다고 비판했습니다.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 1944~)는 『포스트민주주의』(Post-Democracy, 2004)에서 시장과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시대를 경고했고,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1935~)는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A Brief History of Neoliberalism, 2005)에서 블레어 정부가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1925~2013) 시대의 신자유주의를 실질적으로 유지·강화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길 의 이름이 아닙니다. 민주공화주의는 국가 전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변혁의 시대에 국가 대개혁을 추진할 강한 국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는 그보다 먼저, 그리고 끝까지 묻습니다. 그 권력은 시민의 통제 아래 있는가. 오늘 권력은 더 이상 왕관을 쓰지도 않고 군복을 입지도 않습니다. 권력은 플랫폼이 되고, 알고리즘이 되고, 데이터가 되고, 인공지능이 되었습니다. 국가와 빅테크, 금융자본이 결합하는 새로운 시대에 권력은 더욱 거대해지고 있지만, 그것을 견제하는 시민의 힘은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은 필립 페팃(Philip Pettit, 1945~)의 결론이 아니라 그의 문제의식입니다. 새로운 지배가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비지배(non-domination)의 원리를 찾아 민주공화주의를 끊임없이 확장해야 한다는 정신입니다. 이제 민주공화주의가 맞서야 할 대상은 군주의 권력이나 독재자의 권력만이 아닙니다. 국가권력과 빅테크, 금융자본, 인공지능이 결합하는 새로운 권력입니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이 제안한 숙의민주주의와 시민의회는 더 이상 이상적인 정치 실험이 아닙니다. 거대한 권력이 거대한 속도로 이동하는 시대, 시민이 다시 권력의 주인으로 남기 위한 민주공화주의의 새로운 견제장치입니다. 국가의 힘은 개혁을 추진하는 원동력입니다. 시민의 힘은 그 개혁이 공공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마지막 안전장치입니다. 강한 국가와 강한 시민은 서로를 대체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관계입니다. 국민주권을 확립하며 첫 번째 확장을 이루고, 인간존엄을 헌정질서의 중심에 세우며 두 번째 확장을 이루었던 민주공화주의는 이제 비지배라는 세 번째 확장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빅테크가 새로운 권력이 되어가는 시대, 우리는 어떤 민주공화국을 만들어 갈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시민은 그 거대한 권력을 어떻게 견제하며 자유를 지켜낼 것인가. 우리는 소비자가 아니라 시민입니다. 바로 그 시민이 민주공화주의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갈 주인공입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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