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전체에 묵직한 질문 던지는 영화 ‘하제’ [사회혁신] 오동진 영화평론가
다큐멘터리는 질문하는 영화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고, 왜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해결하거나 극복해 나갈 것이냐고 묻는 영화다. 궁극적으로는 당신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결국 다큐멘터리는 삶과 우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들이다.
자연주의의 미학과 위대함 담은 전작
2026년 제18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황윤 감독의 는 작은 우물에서 큰 바다로 나아가는 작법을 보인다. 일상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척, 사실은 한 마을 공동체가 겪었던 생사의 문제, 그리고 우리가 같이 성취해야 할 생존의 문제로 다가서게 한다. 다큐멘터리는 크게 시네마베리떼와 다이렉트 시네마로 나뉜다고 할 때, 는 감독의 정치·사회적 시선이 많이 개입돼 있다는 측면에서 분명 베리떼식 작품인 건 맞지만 여기에 서정적 에세이의 느낌, 심지어 픽션의 작법도 간간이 끼어들고 있는 만큼 하이브리드형의 새로운 다큐로 보인다. 그건 감독인 황윤 스스로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일 것이다. 황윤의 영화 인생, 감독 인생도 다분히 점층적이다. 그는 (2008)나 (2015)처럼 동물권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환경과 생태, 인권과 사회정의에 대한 주제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 정점이 2023년 작 였다.
수라는 한자로 ‘繡羅’라 쓴다. 수 놓을 수에 비단 라이다.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의미겠다. ‘수라’는 전라북도 군산시 새만금 간척 사업 지구에 있는 수라갯벌을 말한다. 새만금이 개발되면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갯벌이다. 갯벌의 상당 부분이 말라붙고 황무지로 변해 버렸지만, 여전히 철새들이 도래하는 곳이다. 저어새와 도요새, 검은머리갈매기들이 군무를 추며 출몰하는 곳이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황혼의 새 떼 장면이 연출된다. 그런 ‘극한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곳이고 이것이 계속해서 존재했으면 하고 소망하게 되는 곳이다. 게다가 저어새 등은 멸종위기 조류이다. 황윤의 전작 는 얼핏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이라는 환경보호단체의 행적을 뒤쫓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수라갯벌의 본질을 포착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다큐 는 그렇게 자연주의의 미학과 위대함을 그려 나간 작품이다. 세상 만물은 있는 그대로일 때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전한다. 그것을 지키려는 싸움은 어쩌면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환경과 생태를 지키는 일은 그것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가 바로 였다.
새만금을 깊숙이 파먹은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
이때부터 황윤은 사회적 다큐가 흔히 취하는 거친 표현(촬영)을 지양하고 자연 다큐의 순수하고 영롱한 스타일을 대폭 늘리기 시작한다. 롱테이크와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늘어난다.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작가들이 표범 같은 맹수의 모습을 찍기 위해 밤낮을 스나이퍼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리듯 황윤의 는 갯벌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었다. 황윤은 를 통해, 삶과 자연에 대한, 끈기와 인내의 미학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내가 대상을 바꿨지만, 나중엔 대상이 나를 바꾼다.
황윤 감독
이번 신작 는 의 속편 격 작품이다. 역시 공간은 새만금이다. 새만금 남쪽의 하제마을 이야기다. 이 다큐를 보면서 섬찟 놀라게 되는 건 새만금 개발의 한 축이 미국 공군기지 때문임을 새삼 깨닫게 되어서다. 이 지역에 배치된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은 현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따라 확장을 서둘러 왔다. 현재는 거의 마무리 중이다. 군산의 미군 비행부대는 대(對)중국 견제용이고 동북아 역내 전력(戰力)의 신속 대응과 배치를 위한 것이다. 군산은 중국 본토(산둥반도나 베이징)와 가장 가깝고 미-중 간 첨예한 이슈인 남중국해, 대만해협에서의 무력 충돌 시 이를 선제적으로 공격하기에 좋은 곳이다. 군산이란 곳이 일상생활에서도 (한미) 주둔군 지위 협정(SOFA)에 따라 가장 심한 타격을 받는 지역이라는 의미다. SOFA 및 한미 간 연합토지관리계획 협정에 따르면 미군 기지가 탄약고를 설치할 경우, 안전지역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토지 공여를 요청한다. 결국 새만금 사업이란 것에는 ‘간척’이 가지는 경제적 의미도 있지만 군산 미군 기지의 제2 활주로를 만들어 대중국 전초기지를 만들려는 군사⸱외교적 문제가 깊게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주민들이 쫓겨나간 마을을 샅샅이 뒤진 인고의 8년
특이한 것은 다큐 가 이 같은 정치⸱외교⸱군사적인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 공군기지 이슈는 다큐 에서 ‘병풍처럼’ 둘러쳐진 문제이다. 그보다 더 주목한 것은 하제 마을 공동체의 문제이다. 과거 600여 가구 규모의 어촌 마을이었던 하제는 2002년 정부에 의한 토지강제수용이 결정된 후 2009년부터 철거가 시작됐다. 감독 황윤이 이 마을과 미 공군 이슈에 접근한 2017년에는 이미 하제에 단 두 가구만이 남아 있었다. 황윤의 카메라는 자신의 가게인 왕림슈퍼를 지키며 끝까지 마을에 남으려 했던 전진현이란 인물에게 향하기 시작한다. 그녀를 인터뷰하고 마을 주변을 뒤지면서 감독 황윤은 하제가 일본 강점기 불이흥업주식회사라는 농민 수탈 회사의 본거지로서 심각하게 착취당했던 곳이라는 사실을 얘기하기도 한다.
의 특징은 인고의 미학에 있다. 황윤은 8년 전에 이 일을 시작해 지치기도 했을 터이지만 카메라를 놓지 않고 하제의 모든 것을 쫓아다녔다. 영화를 8년 찍는다는 건, 촬영에 드는 물리적인 노동도 노동이고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생계유지의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세상이든 다큐든, 영국 사회주의 감독 켄 로치의 말마따나, 결국 ‘빵과 장미’의 문제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지만, 장미만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 영화는 다큐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다큐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는 그 변증법을 이루어 낸 작품이다.
천연기념물과 문화제로 살아남은 600년 수령 팽나무
하제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600년 수령의 팽나무.
하제 마을 한 가운데에 600년간 마을의 역사를 굽어보고 지켜내 온 팽나무 이야기로 옮겨 오면서 다큐 는 구체성의 활화산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이제 하제의 문제는 팽나무의 문제이자 팽나무의 문제는 하제의 문제가 된다. 주목하게 되는 건 이 팽나무 이슈가 초기 단계에는 감독 본인의 자의식 같은 즉자적 문제에 머물렀으나 8년의 제작 기간을 거치며 ‘하제 팽나무 지킴이 모임’같은 대자적 차원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생태환경 이슈가 어떻게 정치⸱사회⸱군사적 어젠다로 바뀌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흐름에서 한국의 대표작가인 황석영은 600년 된 팽나무를 소재로 한 소설 『할매』를 출간한다. 다큐 의 카메라가 ‘팽팽문화제’로 초점을 옮겨가게 되는 계기이다. 그 같은 주고받기의 노력 끝에 팽나무는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공식 지정된다. 2024년 10월의 일이다. 다큐멘터리 가 마을 하제를 지키는 데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600년 나무를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팽나무를 통해 하제를 알렸고 하제의 어젠다를 공식화해 냈다. 그것은 또 다른 위대한 성취이다.
촬영감독 김정근
다큐멘터리는 질문의 영화이다. 동시에 다큐멘터리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영화이다. 8년간 한 마을의 붕괴를 기록해 낸 다큐멘터리 는 이제 새로운 공동체의 재건을 기록하는 또 다른 일지를 써나갈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는 것이다. 는 사회와 정치권에 보내는 경종의 울림이 큰 작품이다. 특히 개혁을 수치로만 생각하는 일부 행정가들에게 자신들이 사실은 반동의 행보를 걷고 있음을 자각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세상은 입으로 하는 정치가 바꾸지 않는다. 묵묵하게 실천하는 자가 바꾼다. 다큐멘터리 가 그런 존재다. 다큐 후반부 감독 황윤과 촬영감독 김정근이 담아낸 마을 하제의 해안 풍광, 갯벌의 자연미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성찰과 사색을 이끈다. 이 영화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인 12일과 15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메가박스 주상영관에서 두 번 더 상영된다. 일반 개봉은 영화제가 끝난 후 배급과정을 거쳐 올해 연말 혹은 내년 상반기에 이루어질 예정이다.오동진 ohdjin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