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로 임금 쏘고도 총리 발탁돼 나라 곳간 채운 관중 [뉴스] 허리띠 쇠고리에 박힌 화살
기원전 685년, 중국 제(齊)나라 임금자리를 두고 형제가 다투던 때다. 도읍으로 달려가던 공자 소백(小白)에게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쏜 이는 관이오(管夷吾, 기원전 720경~645), 흔히 관중(管仲)이라 부르는 사내다. 화살은 허리띠 쇠고리를 때렸고, 소백은 죽은 시늉을 했다. 관이오는 해치웠다 여기고 돌아섰다.
소백은 멀쩡히 먼저 도읍에 들어가 제나라 환공(齊桓公, 기원전 720?~643)이 되었다. 관이오가 모시던 공자 규(糾, ?~기원전 685)는 노나라 손에 죽었고, 관이오는 죄수 신세로 끌려왔다. 임금을 쏜 자의 말로야 뻔한 일이다. 그때 소백의 스승 포숙아(鮑叔牙, ?~기원전 644)가 나섰다. 제나라 하나만 다스릴 요량이면 자신으로 족하나 천하를 노린다면 관이오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환공은 이를 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를 쏜 원수를 총리에 앉혔다.
우씨 사당(武氏祠堂) 석부조의 일부에 나타난 관중(管仲)의 모습 (오른쪽)(위키피디아)
이력서로는 서류 탈락
관이오의 젊은 시절은 변변치 않았다. 사마천(기원전 145경~86경)의 『사기』에 따르면 포숙과 함께 장사하며 몫을 더 챙겼고, 벼슬길에 나가 세 번 쫓겨났으며, 싸움터에서 세 번 달아났다. 요즘 이력서에 이렇게 적었다면 면접은커녕 서류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포숙은 일마다 변명을 해 주었다. 가난해서 그랬고, 때를 못 만나서 그랬고, 늙은 어머니가 계셔서 그랬다는 것이다. 관이오는 훗날 말했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가 여기서 나왔다. 포숙은 제 추천으로 들어온 친구가 윗자리에 앉아도 개의치 않고 그 밑에서 일했다. 자리하나에 목숨을 거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다.
사마천(위키백과)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안다
총리가 된 관이오는 나라살림부터 뜯어고쳤다. 선비, 장인, 상인, 농민을 사는 곳별로 모아 앉히고, 다섯 집씩 묶어 평시에는 행정을, 전시에는 군대를 맡게 했다. 땅의 질에 따라 세금을 달리 매겼고, 소금과 철을 나라가 관리해 재정을 채웠으며, 곡식 값을 헤아려 물가를 다스렸다. 『관자(管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해야 영예와 수치를 안다. 배고픈 사람에게 염치를 설교하기 전에 쌀독부터 채우라는 말이다. 같은 책은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나라를 떠받치는 네 벼리로 꼽고, 이것이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다만 『관자』를 관이오가 직접 쓴 것은 아니다. 후대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엮은 책이다.
관이오의 초상화(위키백과)
윗사람 취향이 물가를 흔든다
한비자(기원전 280경~233)가 전하는 일화가 있다. 환공이 자주색 옷을 즐기자 온 나라가 자주색을 입겠다고 나서서 자줏빛 비단 값이 치솟았다. 걱정하는 임금에게 관이오는 이렇게 일렀다. 자주색 냄새가 싫다고 한마디만 하십시오. 임금이 그렇게 하자 사흘 만에 자주색 옷이 자취를 감췄다. 물가를 잡으려면 대책회의보다 윗사람의 입단속이 먼저라는 이야기다.
한비자(나무위키)
싸우기 전에 따질 것부터 따지다
관이오의 외교는 칼보다 명분이 앞섰다. 기원전 656년 소릉(召陵)에서는 여덟 나라가 모여 초나라를 압박했고, 왕실 제사에 쓸 술거르개용 띠풀(苞茅) 공물을 왜 안 바치느냐고 따져 큰 싸움 없이 약속을 받아냈다. 띠풀 한 단을 앞세워 군대를 끌고 온 셈이니 트집도 이쯤 되면 재주다. 기원전 651년 규구(葵丘)에서는 제후들이 물길을 제멋대로 막지 않기로, 이웃이 곡식을 사러 오는 길을 막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웃끼리 목줄을 쥐지 말자는 약속이다.
공자(기원전 551~479)의 평가는 갈렸다.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꼴이 되었을 것이라며 공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릇이 작다고 흉을 보았다. 칭찬과 타박을 한 입으로 한 셈이다.
공자(위키백과)
유언을 잊은 임금
관이오는 기원전 645년 병석에서 환공에게 당부했다. 아들을 삶아 바친 요리사 역아(易牙), 스스로 거세하고 들어온 시종 수초(豎刁), 부모를 버리고 온 개방(開方)을 곁에 두지 말라고 했다. 제 자식과 제 몸과 제 부모에게도 모진 자들이 임금에게라고 다를 리 없다는 셈법이었다.
환공은 한동안 따르다가 입맛이 아쉬워 다시 불러들였다. 기원전 643년 환공이 죽자 측근들이 아들들을 편 갈라 싸움을 붙였고, 임금의 시신은 두 달 넘게 방치되어 구더기가 문밖까지 기어 나왔다고 한다. 직언하는 이를 잃은 권력의 말로다.
관이오(나무위키)
한국에서 읽는 관이오
첫째는 사람 쓰는 문제다. 환공은 자기를 쏜 사람도 일을 잘하면 썼다. 우리 정치는 능력보다 어느 편인지부터 따지고, 검증은 자격 심사가 아니라 진영 확인이 되기 일쑤다. 인사에서 배울 것은 원수도 쓴다 는 구호가 아니라, 쓰임을 먼저 보는 눈과 이를 믿고 추천하는 포숙아 같은 사람이다.
둘째는 곳간이다. 물가, 전세, 자영업, 가계 빚이 짓누르는 마당에 민생은 구호가 아니라 쌀독의 문제다. 염치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에 지친 사회라면 그것도 곳간만큼 시급하다.
셋째는 측근과 권력이다. 윤석열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재판관 전원일치로 그를 파면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1심은 2026년 2월 19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군을 국회로 보낸 것이 핵심이라 보았다. 환공의 마지막은 비상한 권력이 충성경쟁에 휘말릴 때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 준다. 역아와 수초는 늘 가장 부드러운 얼굴로 다가온다.
넷째는 경계다. 관이오는 군주의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가였지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꿈꾼 사람이 아니다. 소금과 철을 나라가 틀어쥐면 곳간은 찰지 몰라도 백성의 호주머니는 가벼워질 수 있다. 오늘 한국에 필요한 것은 통제의 확대가 아니라 곳간열쇠를 한 사람 주머니에 넣지 않는 일이다. 예산과 세금은 투명하게 드러나야 하고, 열쇠꾸러미는 여럿이 나누어 쥐어야 한다.
2700년 전 제나라는 원수도 쓰고 쌀독도 채웠지만 마지막 인사에서 무너졌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관중묘.중국 산동성 치박시에 있다. 사진에는 관중의 동상과 관중기념관이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http://www.9yly.com/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