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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세기의 애도…전국민이 하나 된 백범 장례식

세기의 애도…전국민이 하나 된 백범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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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으로 향하는 백범의 장례 행렬.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독립과 민족통 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백범에 대한 국민적 추모와 존경을 보여줬다. 1. 정의를 기억하는 역사의 방식 백범 김구의 장례는 한 위인의 장례를 넘어서 범국민적인 애도의 시간이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흉탄에 쓰러진 뒤 7월 5일 국민장으로 영결하기까지 열흘 동안 전국에서 쏟아진 조사(弔詞)와 추도문, 조가(弔歌), 언론의 사설은 그 수와 품격에서 우리 장례 문화사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백범 장례를 능가하는 조사의 문화는 없습니다. 그 글들은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당시 쏟아져나온 글들은 백범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해방 직후 우리 사회가 민족의 투쟁가를 어떤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집단적 증언이었습니다. 정치인과 종교인, 언론인과 문인, 독립운동가와 학생, 이름 없는 시민들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언어로 백범을 추모했습니다. 문체와 표현은 달랐지만, 그 마음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하나였습니다. 백범은 민족을 위해 생애를 바쳐졌습니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감옥과 망명, 투쟁과 좌절을 견디며 독립운동의 한길을 걸었고, 광복 이후에는 분단을 막기 위해 마지막 힘까지 쏟았습니다. 그가 숨졌을 때 남겨진 재산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모친의 천장(遷葬)과 아들의 결혼에 들어온 돈으로 창암공민학교와 백범학원을 세운 그는 집도 절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끝내 동족의 총탄에 쓰러지자 온 나라에는 울분과 비통함이 번졌습니다.(훗날 국회는 이를 ‘정권 차원의 범죄’라고 규정했습니다.) 범죄에 가담한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진보와 보수, 좌와 우를 막론하고 모두 백범의 죽음을 민족의 비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장례 기간에는 우리 장례문화사 최고 수준의 헌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는 그의 위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의미는 정의 앞에서는 편을 가르지 않고, 옳은 이는 옳게 기리며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에게는 그에 온당한 존경을 바칠 줄 알았던 우리 민족의 양심과 품격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언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백범 장례에 나온 조사들은 우리 민족이 정의와 애국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은 무섭게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같은 인물을 두고도 진영에 따라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역사마저 편 가르기의 대상으로 삼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범 장례에 남겨진 조사들은 단순한 추도사가 아니라 오늘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백범은 생전에 민족정기를 홀대하는 시대의 분위기를 염려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1948년 3월 10일 도산 안창호 서거 10주기를 맞아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의 도산 묘소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애도문」을 바치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선생이여. 옛날에는 조국의 비운이 당도하면 수운(愁雲)이 나라에 미만한 중에 혹은 통곡, 혹은 순사(殉死), 혹은 투쟁 등의 각종 방식으로써 민족의 정기가 표현되더니, 지금에는 조국의 위기를 담소와 환희의 추종으로 맞는 자가 적지 아니하나이다. 바로 보지 못할 이런 현상을 볼 때마다 김구도 일사(一死)로써 그들의 정신을 환기하고자 선생의 뒤를 따르고 싶은 맘이 불현듯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좀 더 분려(奮勵)하는 것이 유효할까 하여 구차히 생명을 연장하고 있나이다.” 이 글을 보면, 백범은 민족의 도덕적 감각이 무너지는 현실을 무척 두려워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민족의 양심이 살아 있기를 끝까지 바랐습니다. 그렇다면 백범이 떠난 뒤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기억했을까요. 백범 앞에 드린 수많은 조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1949년 한국 사회가 그에게 바친 존경과 슬픔, 그리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2. 백범을 보내는 목소리들 백범이 서거한 직후 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은 슬픔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백범의 죽음이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오늘 슬픔의 힘으로 내일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많은 문장의 그 밑바닥에는 분명한 두 가지 정서가 공통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독립운동의 거목을 잃은 비통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끝내 이루지 못한 통일을 후세가 완성해야 한다는 다짐이었습니다. 6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사설 ‘백범 선생을 곡(哭)하노라’를 내보냈고, 조선일보는 일반 기사를 배제하고 지면 전체를 김구 선생 추모 체제로 전환하여 합동 논설 및 추도사 ‘민족의 거성(巨星) 떨어지다 - 백범 김구 선생 서거를 애도함’을 내세웠습니다. 이어 조선일보는 29일 사설 「백범 선생을 애도함」을 통해 그의 죽음을 세 가지 ‘통한’(痛恨)으로 정리했습니다. 조국의 땅에서 동족의 흉탄에 쓰러진 것,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 그리고 나라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그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사설은 슬픔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슬픔을 민족 전체의 다짐으로 이끌었습니다. 선생은 명목(瞑目)할지어다. (…)전민족의 원망이며 역시 선생의 원망이던 통일은 완성될 것이다. (…)어떠한 외세에도 의존치 않는 완전한 독립국가는 불원 성취될 것이다.” 사설은 백범 개인을 애도하기보다, 그의 유업을 이어받겠다는 민족적 맹세를 보였습니다. 장례가 추모의 자리를 넘어 새로운 시대적 약속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임병직 외무장관은 28일 기자회견을 갖고 애도사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애도사에서 민족 최고의 인도자 백범은 30년 동안 천만리를 전전하며 악전고투한 독립공로자”라며 국가의 앞날이 불안한 시기에 그를 잃은 것은 큰 손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도자를 살해하는 행동은 미개인이 하는 것으로 대외적으로 영향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절절한 기록은 장례식장 밖에서도 흘러나왔습니다. 경향신문은 경교장 앞 풍경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경교장 입구 밖 앞엔 ‘애도하자 우리의 위대한 김구 선생의 죽엄을’, ‘잊지 말자 남기신 거룩한 정신을’이라는 글이 붙어 있다. 아침 목포에서 달려온 당원이란 사람은 ‘아! 영영 가셨구나. 이제 누굴 믿고 산단 말이냐’고 외쳤다. 사나이의 울음은 무섭기도 했다.”(경향신문 6월 29일)   1949년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백범의 국민장 영결식이 끝난 뒤, 상여와 운구 행렬이 효창원을 향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언론인 엄도해는 자유신문 6월 29일에서 7월 6일까지 「민족의 거성 백범 선생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7회에 걸쳐 게재한 추모사에서 존경할 만한 분은 많지만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임을 잊을 수 없듯이, 내 심금을 퉁기고 감정 속에 영원히 새겨진 사람은 오직 인간 김구가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썼습니다. 정의는 언제나 기술보다 진정이었고, 정의는 수단보다 솔직하였다. 여기서의 정의는 ‘고지식’이라는 통속적인 문자와 통하는가 싶다. 백범 김구 선생은 과거 자신이 고지식하다는 것을 고백한 가운데 우리는 가장 정의의 인간을 볼 수 있다. (…)선생은 생명을 노리는 악독한 왜와 싸우면서도 동료에 대한 신의는 결백하였다.” (시리즈 ③ 자유신문 1949년 7월 1일) 원세훈 역시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백범에 대한 존경을 조금도 훼손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선생과 나는 잠시 사소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있었으나(…) 이 어른이 반 백년 간이나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분투한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역사상의 유례가 드물 것이다. 작년 남북협상이 개최되었을 때 38선을 넘으면서 38선이 무너지지 않는 한 38선을 끌어안고 쓰러지겠다고 언명한 바 있었는데, 이제 38선이 무너지지 않은 오늘이니 그분의 죽엄은 38선을 안고 돌아간 것이다.” (원세훈 자유신문 6월 30일) 시인 이은상이 국민장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쓴 「조가」는 이러한 시대의 슬픔을 한 편의 노래로 승화시켰습니다. 어혀 여기 발구르며 우는 소리 지금 저기 아우성치며 우는 소리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이 겨레 이 강산이 미친 듯이 우는 소리를 님이여 듣습니까 님이여 듣습니까 이 겨레 나갈 길이 어지럽고 아득해도 님 계시기로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조각 갈린 땅을 이대로 버려두고 천고 한 품으신 채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이은상 작 ‘조가’ 전 4절 중 1,3절) 3. 영결식장의 조사 1949년 7월 5일, 효창공원 영결식장에는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차례로 단상에 올랐습니다. 독립운동의 원로도 있었고, 정부를 대표하는 인사도 있었으며,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서로 달랐고, 백범과의 관계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백범의 삶이 보여준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바로 민족의 무게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초목도 고개를 숙이고, 영결에 목멘 여러 학생, 부녀, 농공상 각계 여러 애국 동포여, 국가 동량을 상실한 우리는 무엇으로 이를 보충하여 조국통일에 이바지하려 하나, 두 가지 길이 있다. 슬픈 마음을 억제하고 백범 선생의 애국정신을 계승하여 제2, 제3의 백범이 나오게 할 것. 비분 억압하고 무지우망을 제거하여 통일사업 달성함으로써 백범 유업이 달성되리라. 백범 선생의 육신은 적으나 백범 선생의 정신은 매장 맙시다.” (7월 5일 오세창 장례위원장) 3천만 동포가 한결같이 숙원하는 저 38선을 물리치고 남북통일의 서광을 보지 못한채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동포가 다같이 애통히 여기지 아니할 수 없는 바입니다. 이 애통한 마음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모든 동포는 조국광복의 각오를 더욱 깊이하고, 더욱 공고히 하여 국가 만년 대계에 다시금 그릇침이 없기를 맹서하며, 그 영전에 한 줄기 뜨거운 눈물로 송사무감의 이별을 삼는 동시에 그 유족과 함께 백범 김구 선생의 영원한 명복을 가슴 깊이 비는 바입니다.” (7월 5일 이승만 대통령) 김규식의 조사는 눈물의 결이 다릅니다. 그는 인간에 울지 않고, 이 강산의 미래를 위하여 울었습니다. 백범과 함께 마지막까지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동지였기에 그의 글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람의 비애가 배어 있습니다. 동지여! 1910년 나라가 없어지자 우리는 생명을 홍모(鴻毛)에 부치고, 국권회복에 제물이 되려 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 거룩한 영결식장에는 동지의 유가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친지와 내외 인사들이 동지의 최후의 걸음을 애도하고 있다. 인간 백범을 우는 것보다 애국자요, 지도자인 동지를 추모하는 것이며, 개인적인 감정의 충동이 아니라 이 강산의 보전과 국가사회의 전도를 걱정하는 것이다. 동지여! 이 땅 이 시간에 동지는 이 민족을 그대로 두고 차마 어이 떠나리오마는, 생과 사의 분별이 유할 뿐이니 동지는 고이 가시라. 동지가 완성을 보지 못한 이 국가 건설과업은 우리가 일층 더 용감히 추진하여 이미 간 동지와 무수한 선열의 영령을 위안하며, 기한과 만난 고초에 허덕이고 신음하는 민족이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획득하도록 더욱 계속 노력할 것을 동지에 영전에서 삼가 서언하노니 동지여 고이 잠드시라.” (7월 5일 민족자주연맹 김규식 주석) 종교계를 대표해 노기남 대주교의 조사는 이렇습니다. 선생께서는 자기 생애를 조국 광복을 위하여 바치신 애국지사임을 3천만이 공인하는 바요, 선생이 당하신 흉변이야말로 국가적 일대 흉사인 것이다. 선생께서 이 땅에 남기신 애국의 정신과 민족의 정기는 영원히 빛나며, 우리들의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이들 조사를 나란히 읽으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독립협회 계열의 원로 오세창,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김규식, 가톨릭 지도자 노기남은 정치적 위치도, 종교도, 삶의 궤적도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백범을 평가하는 언어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하나였습니다. 그 누구도 백범을 특정 정파의 지도자로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 애국자, 통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지도자, 그리고 민족이 함께 기억해야 할 스승으로 추모했습니다.   경교장 응접실의 김구. 1947년 5월 미국 LIFE 사진기자 존 플로레아가 미군정 하 한국 정국을 취재하면서 촬영한 사진이다. 플로레아는 같은 날 김구와 조완구가 경교장 실내와 앞뜰에서 대화하는 모습도 여러 장 남겼다. (John Florea, LIFE Photo Collection.) 4. 전국이 함께 곡(哭)한 날 1949년 7월 5일 국민장은 서울만의 장례가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대한민국 곳곳이 함께 울었던 날이었습니다. 백범의 영구가 효창공원으로 향하는 동안 서울 시민들은 거리마다 늘어서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그러나 애도는 수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각 지방에서는 추도식과 추도회가 잇달아 열렸고, 관공서와 학교, 사회단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백범의 서거를 애도했습니다. 당시 신문들은 전국에서 이어진 추도 소식을 앞다퉈 보도했습니다. 광주와 목포, 여수, 영산포, 순천, 함평, 장성, 고흥 등 호남 각지에서는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한 추도식이 열렸고, 영남에서도 포항·경주·구포·마산·통영·진주 등지에서 추도회가 이어졌습니다. 지역마다 형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잃었다는 슬픔과 그의 유업을 잇겠다는 다짐만은 같았습니다. 백범은 생전에 특정 지역의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상해와 중경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광복 후에는 서울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애도한 사람들은 지역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이 특정 지방의 역사가 아니라 온 민족의 역사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1949년 7월 6일자 신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전하면서, 국민장이 단순한 국가 의전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참여한 장례였음을 강조했습니다. 시민들은 추도회에 참석했고, 학교에서는 묵념이 이어졌으며, 각종 사회단체들도 추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백범의 죽음은 개인이나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비극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전국에서 이어진 추도의 물결은 하나의 사실을 말해 줍니다. 백범의 장례는 대한민국 전체가 함께 치른 국민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1949년 6월 말~7월 초의 열흘은 해방 이후 우리 사회가 애국과 통일이라는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사람들은 백범 한 사람을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한 시대를 배웅하고 기린 것입니다. 5. 월인천강(月印千江) 백범 국민장에는 수많은 조사와 추도문이 쓰여졌습니다. 그 많은 조사 가운데서도 엄항섭의 조사는 울림이 큽니다. 문장의 빼어남 때문이 아닙니다. 엄항섭은 백범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람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함께했고, 임시정부의 고난도 함께 견뎠으며, 광복 이후 경교장의 마지막 나날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그는 김구에게서 ‘큰 지도자’의 면모만을 본 것이 아니라, 기쁨과 분노, 외로움과 고독, 나약함과 슬픔까지 지켜보았습니다. (……) 선생님은 청춘도 명예도 영화 안락도 다 버리고 만리 해외로 떠다니시며, 오직 일편단심 조국광복만을 위하여 살으셨습니다. 검은 머리로 고국을 떠나셨다가 머리에 백발을 이고 옛 땅을 찾아오시던 그 날, 기쁨이 얼굴에 가득 차고 춤을 추시는 듯 좋아하시던 그 모양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리오, 조국의 강토는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의 조류는 좌우로 분열된 채 동족상잔이 나날이 치열하고, 전도의 광명이 각각으로 희박해 가되, 그럴수록 선생님은 국토 통일과 완전 자주 이것만을 위하여 혀가 닳도록 절규하였고, 나물국 한 그릇에 쓴 김치 한 공기로 국민 최저생활을 몸소 맛보시며 지냈습니다. 선생님의 고난일생, 지성일념이 이러했거늘, 마지막에 원수 아닌 동족의 손에 피를 뿜고 가시다니요, 그래 이것이 선생님에게 바친 최후의 보답입니까. 동포 형제여 ! 가슴을 치며 통곡하십시오.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울고, 울고, 다시 울고, 울음밖에 아무 말도 없습니다. 여기 잠깐 우리들은 ‘월인천강’(月印千江)이란 말을 생각합니다. 다시금 헤아려 보면 선생님은 결코 가시지 않았습니다. 삼천만 동포의 가슴 마다에 계십니다. 몸은 무상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의 낙원으로 가셨을 것이로되, 그 뜻과 정신은 이 민족과 역사 위에 길이길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대 마다에 새싹이 돋고 새엄이 틀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여 고난과중(苦難過重)의 일생을 보내신 선생님이 결코 헛되이 그냥 가실 리 있습니까. 선생님의 거룩한 희생으로 민족의 대통일, 대평화, 자유, 민주에 의한 새 역사의 첫 페이지는 열릴 것입니다.” (1949년 7월 5일 한국독립당 대표 엄항섭) 월인천강(月印千江). 달은 하나이지만 천 개의 강마다 그 모습이 비친다는 뜻입니다. 하늘에는 달이 하나뿐이지만, 강과 호수와 시냇물이 있는 곳마다 달은 각각의 모습으로 비칩니다. 달이 나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달이 수많은 물 위에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백범의 육신은 효창공원에 묻히지만, 그의 정신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백범을 만났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독립을 꿈꾸었던 청년들의 가슴속에, 아이들의 순수한 눈동자 속에, 그리고 앞으로 이 나라를 살아갈 수많은 사람의 양심 속에 하나의 달처럼 살아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백범이 시대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비칠 수 있는 공공의 가치라는 것을 뜻합니다. 1949년 여름, 효창공원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지도자와 종교인, 언론인도 저마다의 언어로 백범을 추모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양한 목소리는 결국 하나의 뜻으로 모였습니다. 민족에게 바친 백범의 삶은 존경스러우며, 그가 끝내 이루지 못한 통일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어가야 할 과제라는 것이었습니다. 6. 수난의 효창원 동아일보 1956년 6월 9일자 신문에 다음과 같은 칠언율시가 게재됩니다. 酸風凄雨孝昌園 (효창원에 쓰라린 바람 일고 처절한 비 내리는데) 痛哭招招七烈魂 (통곡하며 부르노라 7열사의 혼을) 地中枯骨曾奚罪 (땅속에 묻힌 말라버린 뼈가 일찍이 무슨 죄로) 任汝工兵钁下飜 (공병대의 괭이 아래 파 뒤집혀야 하는가) 睠彼南山塔洞園 (저 남산의 탑동원을 돌아보니) 揷天銅像奪人魂 (하늘을 찌르는 동상이 사람의 혼을 빼앗는구나) 獨裁功德今如許 (독재의 공과 덕이 지금은 이렇게 놀아나겠지만) 請看滄桑一瞬飜 (청컨대 보시오, 상전과 벽해가 일순에 뒤집어질 것임을 1956년 5월 이승만 정권은 독립운동가의 묘역이 있는 효창원(효창공원) 부지에 대규모 축구장(효창운동장) 건설을 강행했습니다. 육군 공병대를 동원해 운동장 건설 공사를 하자 독립운동가 묘역 앞 연못이 메워지고 묘역이 크게 훼손됐습니다. 당시 정부는 제2회 아시안컵(1960년) 개최를 빌미로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을 축소하고 백범 등 독립운동가들의 영향력을 지우려는 의도가 컸던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에 전국 유림 최고의 지도자였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은 불도저 앞에 드러누우며 항의했습니다. 위의 한시는 그때 발표한 것입니다. 국회에서도 성토가 이어졌으나, 결국 공사는 강행돼 효창운동장은 지금도 독립운동가 묘역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 후에도 권력에 의해 민족의 성지가 훼손된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로 기록돼 있습니다. 혹시 우리 사회 일각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백안시하고, 위와 같은 조사를 쓰던 언론에서 이제는 은근히 헐뜯는 풍조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요? 조사는 죽은 이를 위한 글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조사는 오히려 산 사람을 비추는 기록이 됩니다. 누구를 어떻게 추모했는지, 결국 그 시대가 무엇을 정의라 여겼고, 무엇을 애국이라 믿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1949년의 추도사는 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지금은 왜 똑같은 사안을 놓고 서로 반목하며 사는가. 조사는 죽은 이를 보내는 글이지만, 역사는 그 조사를 통해 시대를 말합니다. 문장은 살아있습니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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