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신 대통령제 로 나라 망친 적도기니 응게마 [뉴스] 낙방생의 한풀이
적도기니(Equatorial Guinea)는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면한 작은 나라다. 이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ías Nguema, 1924~1979)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공무원 시험에 세 번 떨어졌다. 네 번째 도전에서 식민당국의 도움과 특혜 속에 합격해 식민 행정기관에서 일했고, 법정 통역관 등을 거쳤다. 1961년에는 스페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의 집권 25주년을 기념하는 대표단의 대변인으로 마드리드까지 갔다.
시험에 세 번 떨어진 사람이 훗날 지식인을 적으로 돌리고 교육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는 묘한 역설을 만든다. 다만 그의 독재가 개인적인 ‘낙방 한풀이’였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1968년의 마시아스 응게마(위키피디아)
마지막 자유선거, 그리고 ‘유일한 기적’
1968년 9월, 스페인령 기니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응게마는 결선투표에서 보니파시오 온도 에두(Bonifacio Ondó Edú, 1922~1969)를 꺾었고, 적도기니가 10월 12일 독립하면서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이 선거는 오늘날까지 적도기니에서 실시된 사실상 유일한 자유경쟁 선거로 평가된다. 그러나 자유선거는 곧 사라졌다.
응게마는 1970년 1당제를 만들었고, 1971년에는 헌법의 주요조항을 폐기하며 대통령에게 정부와 국가기관의 권한을 집중시켰다. 1972년에는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됐다. 1973년에는 종신 대통령제를 포함한 새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공식적으로 99%의 찬성을 얻었다. 하지만 국제사법위원회가 당시 재판을 관찰한 보고서에서 지적했듯 반대운동의 자유나 독립적인 선거감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1975년 응게마가 스스로 붙인 이름은 ‘유일한 기적(Unique Miracle)’이었다. 정권은 응게마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구호까지 내걸었다. 기적이라 불리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일은 위험했다. 질문이 반역이 되고, 반역은 총살로 이어졌다.
보니파시오 온도 에두 1968년(위키피디아)
나라를 낙제시킨 11년
응게마 정권은 지식인을 체계적으로 탄압했다. 1973년에는 ‘지식인(intellectual)’이라는 단어의 사용까지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6년 사이 약 75명의 교사와 교육관계자가 처형됐고, 수백 명의 교사가 해고되면서 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1975년에는 사교육을 금지하는 법령으로 가톨릭 학교까지 폐쇄됐다.
교육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언론과 종교도 억압했고, 외국으로 도망가는 사람을 막기 위해 배를 파괴하거나 출항을 통제했다. 국가재정과 행정은 사실상 마비됐다. 미국국무부 자료는 당시 정권이 국가안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정부기능을 방치했고, 전기·수도·도로·교통·보건시설이 붕괴했다고 기록한다.
1975년 성탄절에는 수도 말라보의 축구경기장에서 정치범 150명 이상이 공개적으로 처형됐다. 미국의회 자료와 당시 보도에 따르면 총살이 진행되는 동안 확성기에서는 메리 홉킨(Mary Hopkin. 1950~ )의 노래 ‘Those Were the Days’가 흘러나왔다.
희생자 규모는 자료마다 차이가 크다. 약 5만 명이 살해됐다는 추산이 있는가 하면 더 많은 수치를 제시하는 자료도 있다. 수십만 명에 불과했던 당시 인구 가운데 10만 명 이상, 많게는 15만 명 정도가 국외로 탈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미국 국무부와 국제 인권단체들은 사망하거나 망명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최대 3분의 1에 이른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당시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이 나라를 나치가 처음 세운 강제수용소에 빗대어 아프리카의 다하우 라 부르기도 했다.
1968년 10월 12일 당시 스페인 장관 마누엘 프라가(Manuel Fraga)가 새로운 적도 기니 대통령 마시아스 응게마와 함께 스페인 기니의 독립에 서명했다(위키피디아)
조카가 삼촌의 간판을 갈다
1979년 8월 3일, 마시아스의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Teodoro Obiang Nguema Mbasogo, 1942~)가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당시 오비앙은 군사경찰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고, 악명 높은 블랙비치 교도소를 관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응게마는 정변 뒤 도망쳤다가 그해 8월 18일 붙잡혔다. 군사재판은 그에게 대량학살, 대량살해, 공금횡령, 반역 등의 혐의를 적용했다. 같은 해 9월 29일 사형이 선고됐고 그날 바로 처형됐다. 적도기니 병사들이 주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처형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래서 실제 총살은 고용된 모로코군 병사들이 집행했다.
오비앙은 자신이 일으킨 군사정변을 ‘자유의 정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비앙은 1979년부터 권력을 장악했고 1982년 정식 대통령이 됐다. 2026년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으니 47년째 권좌에 있는 셈이다. 1990년대 중반 석유가 대량으로 개발되면서 국가의 재정은 크게 늘었지만, 정치권력은 여전히 오비앙 가문을 중심으로 집중돼 있다. 그의 아들 테오도로 응게마 오비앙 망게(Teodoro Nguema Obiang Mangue, 1968- )는 2016년부터 제1부통령을 맡고 있다.
삼촌을 몰아낸 조카가 삼촌의 체제를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지만, 권력을 한 가문에 집중시키는 구조는 이어졌다. 간판은 바뀌었는데 가게 주인은 바뀌지 않은 셈이다.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 마시아스 응게마의 조카이자 그에 대한 쿠데타의 지도자(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응게마
응게마가 종신 대통령이 된 1972년,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는 독재자 박정희(1917~1979)가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두 독재정권의 폭력과 규모를 같은 저울에 올릴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권력자가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제도를 바꾸고, 그 제도에 다시 국민의 동의를 묻는다는 점이다.
응게마는 1972년 종신 대통령이 된 뒤 1973년 그 체제를 담은 헌법을 국민투표로 승인받았다. 투표라는 형식은 있었지만 자유로운 선택의 조건은 없었다. 절차가 존재한다고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가 1979년 10월 26일 술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은 응게마가 처형된 9월 29일로부터 불과 27일 뒤였다.
1969년 1,000페세타 지폐에 그려진 마시아스 응게마(위키피디아)
입을 막는 손
응게마의 사례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 ‘지식인’이라는 말조차 권력의 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교육받은 사람을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면 결국 사회가 가진 지식과 기억부터 사라진다.
지난 윤석열 정권에서도 연예인, 언론인, 학자, 시민사회의 비판과 풍자를 ‘거짓’이나 ‘적대행위’로 몰아붙이거나 소송과 압박으로 입을 막으려했던 윤석열의 시도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1979년 쿠데타로 통치가 종식된 후 체포되는 적도기니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의 모습. 정신 이상이 확실시되었으며 대마초와 환각제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던 응게마는 자국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최대 8만 명을 살해했다. 그는 몇 달 뒤 처형되었다(https://www.reddit.com/r/HistoryPorn/comments/1ag2byc/equatorial_guinean_dictator_francisco_macias/)
군을 쥔 사람에게 권력을 맡길 것인가?
응게마를 쓰러뜨린 것은 선거가 아니라 군사정변이었다. 그리고 그 정변의 주역은 그의 조카였다.
2024년 12월 3일 밤 한국에서도 군 병력이 국회로 들어섰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에 맞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국회는 계엄해제를 요구했다.
적도기니의 역사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군대가 대통령 개인에게 충성하는 조직이 될 것인가, 아니면 헌법과 국민에게 충성하는 조직이 될 것인가.
오비앙은 삼촌을 처벌했다. 그러나 독재의 구조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이것은 독재청산의 오래된 함정이다. 한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과 권력의 작동방식을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상을 기록하고, 책임의 사슬을 밝히고, 제도를 고치고, 피해자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ias Nguema (1924-1979) | BlackPast.org)
재판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응게마는 재판을 받았고 처형됐다. 그러나 재판이 짧은 응징으로 끝나면 역사가 얻는 것은 많지 않다. 누가 명령했는가. 누가 집행했는가. 누가 침묵했는가.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남기는 것이 재판의 또 다른 쓸모다.
공무원 시험에 세 번 떨어진 한 사람이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사람의 실패가 독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독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실패한 사람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쥐여 주고, 그 권력을 견제할 제도를 없애버리는 사회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시험을 받아야 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권력이다. 권력은 정기적으로 낙방해야 한다. 그래야 한 사람의 낙방이 나라 전체의 낙제로 번지지 않는다.
조카 이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의 쿠데타 군에 체포된 후 사형을 앞둔 마시아스 응게마(Francisco Macías Nguema. Kim był prezydent Gwinei Równikowej, dyktator i ludobójca - rp.pl)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