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성 위해 다시 김구를 호출한 북한 [뉴스] 1948년 4월 19일 오후 6시 45분, 경기도 여현에 있는 38선상의 백범. 왼쪽이 비서 선우진, 오른쪽이 차남 김신이다.
1948년 북한은 왜 김구를 필요로 했는가
1948년의 북한과 1979년의 북한은 정치적 환경이 전혀 달랐다. 1948년의 김일성은 아직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다. 소련군의 지원 아래 정권을 세웠지만, 당 안에는 소련파·연안파·국내파 등 여러 정치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오늘날과 같은 수령 중심의 유일 체제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북한이 김구를 평양으로 초청한 이유는 그를 존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회담 직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선전매체는 김구를 반동 우두머리”라고 공격했고, 이름마저 ‘김구(金狗)’라고 비하하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남북협상이 추진되면서 태도는 급격히 바뀌었다. 공개된 소련 문서를 보면 북한 지도부는 남북협상을 통일전선 전략의 중요한 계기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남한 민족주의 세력의 대표였던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초청하는 것 자체를 정치적 성과로 평가하였다.
북한이 필요로 했던 것은 김구 개인이 아니라 김구가 지닌 정치적 권위였다. 독립운동의 상징,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징, 남한 민족주의 세력의 상징이라는 역사적 자산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구가 협상에 응하면 북한은 통일전선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협상이 실패하더라도 그 책임을 남측에 돌릴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정치적으로 손해 볼 것이 없는 계산이었다.
북한은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인물들에게는 매우 냉혹했다. 조만식은 연금된 뒤 역사에서 사라졌고, 김두봉은 종파사건 이후 실각하였다.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 지도자들도 차례로 숙청되었으며, 연안파와 소련파 역시 정치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러나 김구는 달랐다. 그는 북한 내부의 정치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공유하는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북한으로서는 그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지워 버리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 권위를 자신들의 역사 속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이러한 점에서 1948년 북한이 원했던 것은 살아 있는 김구의 정치적 협력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31년 뒤 북한이 왜 다시 김구를 역사 속으로 불러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정통성이 필요했던 북한, 다시 호출된 김구
1979년의 북한은 1948년의 북한과 전혀 다른 국가였다. 김일성은 이미 절대 권력을 확립했고, 주체사상은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부상하고 있었으며, 수령 중심의 유일체제는 제도적으로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체제 내부의 안정과는 별개로 북한이 마주한 현실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산업화와 경제발전에서 남한보다 앞서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남한은 고도성장을 이어가며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여 갔고, 북한은 경제력과 국력에서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경제적 우위를 더 이상 내세우기 어려워진 북한은 다른 영역에서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의 정통성이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단순한 공산정권이 아니라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며 민족 정통성을 이어받은 국가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의 상징들은 북한의 역사 속으로 새롭게 편입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다시 호출된 인물이 김구였다.
북한은 김구를 부정하는 대신 새롭게 해석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반공 민족주의 지도자로 남겨 두기보다, 결국에는 김일성을 이해하고 인정한 인물로 재구성하는 편이 자신들의 역사 서술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일성저작집』, 『세카이』 인터뷰, 영화 『위대한 품』은 서로 독립된 자료라기보다 하나의 서사가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79년에는 회고가 등장했고, 1985년에는 그 회고가 국제사회에 소개되었으며, 1986년에는 영화를 통해 시각적 기억으로 고착되었다. 하나의 회고는 서사가 되었고, 서사는 집단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서 ‘과수원’은 더 이상 실제 과수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북한이 구축하려 했던 정통성의 상징이다. 중요한 것은 과수원의 존재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최고 상징인 김구가 그것을 부탁한 인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
이 서사 속에서 김구는 노후를 걱정하는 노인이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망명객이며, 김일성의 인품에 감화된 독립운동가로 그려진다. 반대로 김일성은 그러한 김구를 따뜻하게 품어 주는 관대한 지도자로 묘사된다. 결국 이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남한 민족주의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구조차 결국 김일성을 인정하였다.” 과수원은 바로 그 메시지를 완성하는 상징적 장치였을 것이다.
1946년 9월 16일 마산을 방문해 성호초등학교에서 시국 강연하는 김구.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씨앗이 뿌려지던 때였다.
과수원 의 진위보다 중요한 것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김구는 김일성에게 과수원을 부탁했을까.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이 질문에 단정적인 답을 내리기 어렵다. 두 사람만이 나눈 비공개 대화의 전모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새로운 사료가 발견된다면 지금의 해석 역시 수정될 수 있다. 사실 확인 문제는 언제나 새로운 자료 앞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되는 사료를 종합하면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김구의 과수원’은 1948년 당시의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던 이야기가 31년이 지난 1979년 『김일성저작집』에서 처음 등장하고, 1985년 『세카이』를 거치면서 더욱 구체적인 서사를 갖추었으며, 1986년 영화 『위대한 품』에서는 하나의 영상 기억으로 정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정한 방향성을 보여 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야기의 중심은 김구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김일성이 어떤 지도자인가에 맞추어진다. 김구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김일성을 이해하는 인물로, 김일성은 그를 포용하고 이끄는 지도자로 묘사된다.
물론 김구가 고향 황해도를 이야기하며 통일만 된다면 고향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취지의 말을 했을 가능성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다. 일제강점기와 망명생활, 임시정부 활동, 광복 이후의 혼란을 모두 겪은 노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과 정치적 의미를 갖는 ‘북한 귀환’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평양에서의 김구는 은퇴를 준비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조만식과의 면담을 요구했고, 한독당원의 석방을 요청했으며, 연백평야의 농업용수와 전력 공급 문제를 제기했다. 남북협상이 끝난 뒤에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행적을 볼 때, 그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김일성의 품 안에서 노후를 준비한 인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국내 연구자들의 분석도 대체로 이러한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복룡, 도진순, 이완범 등은 이 일화를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과 정통성 구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남북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김규식 비서실장 송남헌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 후일 과장되거나 와전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연구와 증언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이다. 중요한 것은 ‘과수원’의 진위를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왜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반복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북한이 필요로 했던 것은 과수원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김구가 지닌 역사적 권위였다. 그 권위를 김일성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순간, 북한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역사 행간에서 침묵이 웅변으로 변하는 경우
이 글은 ‘김구의 과수원’이 사실이었는가를 증명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1948년 5월 평양에서 김구와 김일성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지금도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여 준다. 1948년 남북협상은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사와 발표문, 회고록, 북한 자료, 소련 문서가 남겨졌다. 그런데 그 방대한 기록 속에서 과수원 은 31년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침묵을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침묵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침묵이 있었기에, 1979년 『김일성저작집』에 처음 등장한 ‘과수원’은 더욱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된다. 이 일화는 1948년의 사건을 직접 증명하는 자료라기보다, 1979년 북한이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서술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에 가깝다.
북한은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지 않았다. 현재의 필요에 따라 다시 해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의 상징인 김구는 새로운 위치에 놓였다. 『김일성저작집』에서는 회고가 되었고, 『세카이』에서는 국제사회에 소개되는 이야기로 확장되었으며, 영화 『위대한 품』에서는 영상으로 기억되는 역사로 자리 잡았다. 하나의 회고는 서사가 되었고, 그 서사는 집단기억으로 정착해 갔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의 목적이 김구를 비난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김구가 지닌 역사적 권위를 자신들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데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살아 있는 김구에게는 정치적 협력이 필요했고,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의 역사적 권위가 필요했다. 북한은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이야기하면서도, 통일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김구를 다시 불러낸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구의 과수원’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 말이 사실이었는가”가 아니다. 오히려 왜 그 말은 31년 동안 기록되지 않았으며, 왜 1979년에야 비로소 등장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과수원이라는 작은 일화보다 권력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다시 서술하며, 어떻게 역사적 정통성을 구축하는가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김구의 과수원’은 단순한 회고담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기억이 선택되고, 재구성되고,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이 글이 추적한 것은 과수원의 존재가 아니라 31년의 침묵 끝에 비로소 만들어진 ‘기억 혹은 웅변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