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못지 않은 배짱으로 전쟁 반대한 피터 오툴 [사람들] 영국 리즈의 술주정뱅이 아들, 사막의 스타가 되다
피터 오툴(Peter O Toole, 1932~2013)은 잉글랜드 리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마장에서 판돈을 매기던 아일랜드 출신 도박사였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출신 간호사였다. 본인은 훗날 자기가 정말로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고, 리즈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는데, 오툴 스스로 출생증명서가 두 나라에 있다 며 어깨를 으쓱했다. 평생을 스스로 아일랜드 사람이라 우기며 살았으니, 국적조차 취향대로 고른 셈이다.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신문사 사환으로 들어갔다가 해군에서 무전병으로 복무한 뒤 왕립연극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이 시절 함께 공부한 동기들이 앨버트 피니(Albert Finney, 1936~2019), 앨런 베이츠(Alan Bates, 1934~2003), 리처드 해리스(Richard Harris, 1930~2002) 같은 훗날의 명배우들이었으니 그 교실 하나가 영국 연극계 절반을 만든 셈이다.
1962년, 감독 데이비드 린(David Lean, 1908~1991)이 실존 인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 E. Lawrence, 1888~1935)를 다룬 영화에 무명배우 오툴을 캐스팅했다. 푸른 눈에 큰 키,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흰 옷을 휘날리는 그 모습 하나로 오툴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오스카 후보에 무려 여덟 번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레고리 펙, 렉스 해리슨, 말론 브란도 같은 쟁쟁한 배우들에게 번번이 밀렸으니 상복 없는 천재라는 별명이 붙을 만했다. 결국 2002년에야 아카데미는 그에게 공로상을 안겼는데, 오툴은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진짜 상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 며 농담을 던졌다.
1970년의 오툴(위키피디아)
스물두 살, 전쟁에 반대하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왕립연극학교 재학 시절, 오툴은 한국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시위에 앞장섰다. 스타가 되기 훨씬 전, 무명의 연극학도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목소리를 낸 것이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에도 꾸준히 반대했다. 화려한 스크린 뒤편에서 그는 늘 국가의 명령보다 개인의 양심을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배우로서도 그는 얌전한 신사가 아니었다. 술과 기행으로 악명이 높아 병원에서 위장을 거의 다 들어내는 수술까지 받았고, 암까지 이겨냈다. 그런데도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와 오스카 후보에 올랐으니, 몸은 망가져도 오기는 망가지지 않았던 셈이다. 왕이든 귀족이든 성직자든, 오툴이 연기하면 하나같이 위엄보다는 균열이 먼저 보였다. 헨리 2세를 연기하든 돈키호테를 연기하든, 권위 있는 자리에 앉은 인물의 우스꽝스러움을 들추어내는 데 이상하게 소질이 있었다.
오툴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런던의 왕립연극학교(RADA)에서 수학했다.(위키피디아)
상 대신 소신을 택한 남자
생각해 보면 오툴의 삶은 하나의 일관된 농담 같다. 국가가 전쟁에 나가라 하면 거리로 나가 반대했고, 영화계가 상을 주지 않으면 어깨를 으쓱하고 다음 배역을 골랐다. 권위를 향해서는 늘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는 태도로 일관했다. 두려움 없이 웃어넘기는 이 태도야말로, 그가 후대에 남긴 진짜 유산이 아닐까 싶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에서 T. E. 로렌스 역을 맡은 오툴(위키피디아)
지금 한국에 필요한 오툴의 눈빛
2024년 12월 3일,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침묵을 강요받았다. 국가가 명령하면 개인은 따라야 한다는 낡은 논리가 다시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그런데 스물두 살의 무명 연극학도조차 자기 나라와 무관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은, 지금 한국사회에 제법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유명해지기 전에도, 권력자가 아니어도, 개인은 얼마든지 부당한 명령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예술인들 가운데도 정치적 발언을 꺼리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이미지 관리, 팬덤 이탈, 광고계약 같은 현실적 이유가 있겠지만, 오툴처럼 상복이 없는 배우로 살아도 괜찮다는 배짱이 아쉬울 때가 있다. 상을 못 받아도, 밉보여도, 소신대로 할 말은 하고 사는 삶. 그것이 결국 시간이 지나 더 오래 기억되는 법이다. 오스카는 그를 여덟 번이나 외면했지만, 역사는 그를 웃음과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권력에게 상을 받는 것보다, 자기 눈빛을 지키는 쪽이 결국 남는 장사인 셈이다.
런던 코벤트 가든의 세인트 폴 교회에 있는 오툴의 추모 명판(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