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 파헤친 검사가 한국형 파시즘 설계자로 [뉴스] 부정선거를 파헤치던 그 손으로 사회안전법을 만들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한옥신(韓沃信, 1920~1981) 항목의 부제가 굉장히 압축적이다.
정의의 검사에서 한국형 파시즘의 설계자로.
이 두 개의 정체성이 같은 사람 안에 있었다는 것이, 한국현대사의 복잡한 비극 중 하나다. 1958년 그는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직접 현장에서 파헤쳐 무효판결을 끌어냈다. 그런데 1975년의 그는 사회안전법을 만들어 형의 선고 없이 사람을 가둘 수 있는 위헌적 제도를 설계했다. 부정선거의 진실을 캐던 그 손이, 박정희(1917~1979) 유신독재의 법률적 기초를 닦은 것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20년 경남 통영 출생, 검사보 시험으로 시작한 비주류 검사
한옥신은 1920년 경남 통영군 명정리에서 태어나 2년제 통영협성상업강습소를 졸업했다. 전 대법원장 이일규가 보통학교 동기였고,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1917~1995)이 학교 선배였다. 그런데 한옥신은 고등문관시험이나 대학 출신이 아니었다. 1949년 간이검찰청 검사보 임용시험 이라는, 정식 사법시험보다 훨씬 낮은 단계의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됐다.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는 평생 검찰내부 이론가로서 보완했다. 사상범죄론, 국가보안법 해설, 간첩재판 이론 같은 책들을 직접 써서 학력 없는 검사가 이론으로 권력에 접근하려 했다.
세계사 속의 동류, 체제 안의 양심파 가 결국 체제의 도구가 된 사례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궤적의 인물이 떠오른다. 비시 프랑스의 일부 관료들은 초기에 양심적인 판단을 내리다가, 점차 압박에 눌려 체제의 충실한 집행자로 변해갔다. 한옥신의 변화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었다. 1960년 4월혁명 직후, 북에서 간첩으로 남파된 자신의 이종사촌 동생을 신고하지 않은 사실이 발각됐다. 이 약점을 정권이 쥐게 되면서, 그는 이후 정권의 요구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책은 명확히 적었다.
검사로서 큰 약점이 잡혔고 이후 정권의 요구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1955~1959년, 부정선거를 파헤치던 정의의 검사
한옥신의 초기 경력은 놀라울 정도로 떳떳했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 최석채 주필의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에서, 경찰의 조작의혹을 직접 벗기고 불구속 기소했다. 법무부장관의 기소 압박에도 더 이상의 정치적 압력은 없게 해 달라 는 조건을 걸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직접 현장에서 파헤쳤다. 영일을 선거구에서는 새벽 1시 현장에 도착해 증언을 듣고 자유당의 조직적 부정선거를 적발했다. 대법원은 한국 선거사상 최초로 선거 무효를 선고했다. 1960년 3·15부정선거 직후 마산의거를 용공으로 조작하려는 시도에도 맞서 경찰의 보고서가 조작됐음을 밝혀냈다.
사설에 앙심 품고 수십명 난입 윤전기·제작시설 마구 부숴.(매일신문 필화 사건이란? - 매일신문)
1959년 조봉암 사형집행, 양심의 첫 균열
그런데 같은 시기 한옥신은 진보당 조봉암(1898~1959) 사건에 관여하면서 첫 균열이 드러난다. 사형 집행 직전 그는 내무부장관 홍진기에게 발포 고문 경관만이라도 구속하게 해 달라 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봉암의 죽음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정의로운 검사가 권력 핵심의 결정 앞에서는 무력했다.
KBS 인물현대사 – 진보 사형당하다, 조봉암 / KBS 20040213 방송
1964년 인혁당 조작사건, 정의에서 순종으로의 전환
5·16쿠데타 이후 한옥신은 점차 권력의 도구가 됐다. 1964년 인혁당 조작사건의 공소유지를 맡았고, 1965년 군 원로 호소문 사건, 민비연 사건, 한독당 사건을 모두 내란음모로 조작 지휘했다. 1967년 6·8총선에서는 경찰력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도왔다. 그가 1958년에 직접 파헤친 그 부정선거를, 1967년에는 자신이 만드는 위치에 섰다.
2차 인혁당 사건 당시 재판현장 모습 (사진출처 KBS 대구 뉴스)
1968년, 동백림 사건 구원투수, 그리고 두 번 납북된 어부에게 사형구형 지시
1968년 대법원이 동백림 사건을 파기환송하자, 한옥신은 간첩개념 을 확대 해석해 재항소심에서 공소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 그는 단순 월경 납북귀환 어부들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도록 지시했다. 보호조치나 생계대책 없이 형벌권을 남용한 이 결정은, 훗날 수십 건의 납북어부 조작간첩 사건이 양산될 토대를 마련했다.
동백림 사건 피고인들이 선고를 받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5년, 사회안전법, 한국형 파시즘의 법률적 기초
한옥신 반헌법 행위의 정점은 1975년 사회안전법 제정이다. 폭력범죄 우범자를 재판 없이 강제노역 시키는 제도, 사상범죄 전과자에게 형의 선고 없이 보호감호 처분을 할 수 있는 위헌적 법률을 그가 입안했다. 이는 훗날 형제복지원 사건의 법적 토대가 됐다. 책은 단호하게 평가한다.
한옥신은 강제노역, 강제전향, 보호처분 논리를 정립해서 사회안전법, 형제복지원 등 토대 마련.
한옥신(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77년, 유신의 호위무사
유신 이후 대검 공안부장이 된 한옥신은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국민들을 총화저해사범 으로 규정하고 엄단을 독려했다. 헌법적 기본권을 침해하는 긴급조치를 합리화하는 법리를 세웠다. 책은 그를 박정희 유신정권의 호위무사 로 규정한다. 1981년, 그는 사망했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비시 프랑스 관료들의 변절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교훈은, 처음에는 양심적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의 부역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대비가 더 비극적이다. 1958년 부정선거를 파헤치던 그 사람이 1967년 부정선거를 돕고, 1975년 사회안전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한 사람 안의 모순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권력이 약점을 쥐었을 때 양심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한옥신의 생애가 정확히 증언한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한옥신을 떠올렸다. 정의로운 검사도, 약점 하나로 체제의 설계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 약점이 권력에 잡히는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