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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강탈·한승헌 조작기소…법무장관 33일 천하
[사회혁신]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정치근(鄭致根, 1931~2026) 항목에서 가장 압축적인 장면은 1982년이다.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이라는 당대 최악의 스캔들이 터지자, 정치근은 민심 수습용 개각으로 법무부장관이 됐다. 그러나 단 33일 만에 또 다른 민심수습 개각으로 경질됐다. 스캔들을 수습하기 위해 임명된 사람이, 또 다른 스캔들 수습을 위해 잘려나간 것이다. 정치근의 경력 전체가 이런 식이었다. 권력의 위기마다 소환되고, 권력의 다음 위기마다 소모됐다.                     정치근(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31년 경남 울산 출생, 김영삼의 축구부 1년 후배 정치근은 1931년 1월 15일 경상남도 울산 명촌에서 태어났다. 경남중학교 축구부에서 활동했는데, 그의 경남중 1년 선배가 바로 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이었다. 두 사람의 출생 연도는 4년 차이가 나지만, 학창 시절 기수가 1년 차이만 나게 된 것은 김영삼의 늦깎이 중학 입학과 일제강점기 말기 학제 개편이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정치근은 1957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 기수는 108명이라는 이례적으로 많은 합격자를 냈고, 정기승(1928~ ), 이회창(1935~ ), 배명인(1932~2026), 서동권(1932~2025) 등 법조계 거물들을 무더기로 배출했다. 정치근은 이 화려한 동기 중에서도 가장 먼저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에 오른 인물이었다.   정치근(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위기관리용 인물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이 떠오른다. 정치적 위기마다 소환됐다가 새로운 위기가 닥치면 가차 없이 교체되는 소방수형 관료들이다. 권력은 그들의 능력보다 그들이 위기를 흡수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정치근의 47년 경력이 정확히 이 패턴을 따른다. 1962년 부산일보 강탈, 1964년 법원난입 사건, 1965년 언론인 테러, 1968년 나일론 백 사건,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 매번 권력에 위기가 닥치면 그를 불러냈다. 1962년 부산일보 강탈, 중앙정보부의 법률자문관 정치근의 반헌법 행위 첫 장면은 1962년 부산일보 강탈이다. 박정희 정권이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를 관세법 위반으로 구속한 뒤, 부산일보·부산문화방송·한국문화방송 주식과 부일장학회 토지 10만여 평을 강제 헌납하도록 만든 공작에, 정치근은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파견돼 법률자문을 제공했다. 김지태가 헌납서류에 날인하자 이틀 뒤 풀려났다는 사실이 이 강탈극의 실체를 말해준다.   김지태씨 설립 부일장학회, 5·16 이후 소유권 바뀌어…강탈 논란 - 경향신문 2012.10.22. 1964년 법원난입, 권총 찬 군인 앞에서 영장에 도장을 찍다 1964년 5월 21일 새벽,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진압하려던 공수특전단 장병들이 무장한 채 법원에 난입해 숙직검사였던 정치근에게 구속영장 청구서류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동시에 영장 전담판사 양헌의 집까지 찾아가 협박했다. 정치근은 군사법정 증인으로 출석해 불쾌감을 느꼈다 고 진술했지만, 그 불쾌감이 어떤 저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을 보도한 1964.05.21 동아일보 1965년 언론인 연쇄테러, 범인을 놓친 합동수사본부 1965년 동아일보·동아방송 관계자들과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연쇄테러가 발생했다. 정치근은 합동수사본부에 합류했다. 수사결과 군 방첩부대 특공대 소속 인물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군 당국은 그들을 베트남으로 전출시키고 범행차량까지 빼돌려버렸다. 수사본부장 김일두는 군의 협조거부로 수사가 좌절됐다고 증언했다. 결국 진범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은 영원히 덮였다.   박정희 눈 밖에 난 언론, 폭발물 테러까지 당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1968년 나일론 백 위장 수출,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무릎 꿇다 정치근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수사과장 이용택의 뇌물사건을 수사했다. 압수된 증거가 명백했음에도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이 사건은 1967년 신민당 후보 김재화 조작사건과 연결된 중앙정보부의 조직적 범죄였다. 정치근은 방첩부대의 위세에,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굴복하면서 정치검사로서 검찰과 정치권력의 역학관계를 터득해 갔다 고 책은 평가한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 도중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한국인 2세 문세광의 총탄에 스러지자 전담검사로 수사를 이끌어 문세광에게 사형을 구형한 것이 정치근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다.  1975년 한승헌 구속, 김영삼 긴급조치 기소, 1년 선배를 기소하다 정치근의 반헌법 행위 중 가장 직접적인 인권침해는 1975년이다. 그는 대표적 인권변호사 한승헌을 반공법위반으로 조작기소했고, 제1야당 총재 김영삼을 유신헌법개정 발언으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기소했다. 청소년시절 축구부에서 따르던 경남중 1년 선배를, 검찰의 이름으로 법정에 세운 것이다.   시국사건 100건, 우리 모두의 나라를 꿈꾼 변호사 故한승헌. 아주경제 2022.4.21. 전두환 정권, 정치활동 금지자 선정, 그리고 33일 천하 전두환 정권에서 정치근은 정치풍토쇄신위원으로 정치활동 금지 대상자 선정에 참여했다. 1981년 부산지검장에서 승진 서열을 몇 단계 건너뛰는 파격으로 검찰총장에 임명됐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이철희·장영자 사건 수사를 지휘한 뒤 법무부장관이 됐으나, 33일 만에 또 다른 개각으로 경질됐다.   정치근(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소방수형 관료들은 권력의 신뢰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돼 있다. 권력이 위기를 만들 때마다 소환되고, 권력이 다음 위기를 관리할 때 소모된다. 정치근은 올해 3월 11일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에서 95세 삶을 접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정치근의 47년을 떠올렸다. 부산일보를 강탈하고, 한승헌을 가두고, 김영삼을 기소했던 그 손이, 결국 33일짜리 장관직으로 막을 내렸다. 권력에 충성한 대가가 이렇게 허무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 현대사가 반복해서 보여준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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