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받고도 사과 안해…내란수괴 전두환의 긴 그림자 [뉴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전두환(1931~2021)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직업군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 앞에 붙는 호칭은 대통령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에는 군사 쿠데타의 주역 으로, 법원 판결에는 군사반란과 내란, 내란목적살인 등의 책임자 로 기록됐다. 한 사람이 이렇게 서로 다른 이름표를 달고 역사에 남은 경우도 드물다.
생도시절 전두환(나무위키)
군인에서 학살범으로
전두환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부 내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 육사 생도들의 5·16군사쿠데타 지지 행진에 관여한 사실도 그의 초기 경력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이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승진을 거듭했고, 육사 11기동기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를 기반으로 군 내부의 인맥을 넓혀갔다.
전두환의 특징은 단순히 야심이 컸다는 데 있지 않았다. 군 내부의 인맥과 정보, 인사를 장악하면서 권력을 준비했다는 데 있었다. 허화평(1937 ~), 허삼수(1936~2022), 허문도(1940~2016) 등이 그의 핵심측근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훗날 12·12와 5공화국 권력장악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59년의 육군 대위 전두환(위키피디아)
12·12에서 광주까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1917~1979)가 술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자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됐다. 그리고 두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1929~2002)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했다. 국가의 군 통수체계가 무너진 순간이었다. 신군부는 이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튿날 광주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됐고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됐다. 5·18민주화운동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국가폭력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당시 누가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발포를 명령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일문서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해서 국가폭력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997년 대법원은 12·12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등의 책임을 인정했다.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살해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 연합뉴스
정의사회 라는 이름의 통제
전두환 정권이 내건 구호는 정의사회 구현 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치적 탄압과 언론 통제가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삼청교육대다. 1980년 7월부터 군과 경찰은 6만여 명을 검거했고, 그 가운데 약 4만 명이 군부대 등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됐다. 이른바 순화교육과 근로봉사, 보호감호 과정에서 54명이 사망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언론사 강제통폐합도 진행됐다. 반면 야간통행금지 해제, 교복자율화, 프로야구 출범 같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생활의 일부가 자유로워졌다는 사실과 정치적 자유가 보장됐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두환은 7년 단임 대통령으로 1988년 물러났지만 후임자는 12·12의 동료였던 노태우(1932~2021)였다.
1981년 전두환과 이순자의 미국 방문 당시 모습 (위키피디아)
결국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하다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을 결정한 것은 권력자의 선의가 아니었다. 국민의 저항이었다. 1987년 1월 박종철(1964~1987)이 경찰의 고문으로 숨졌고, 6월에는 이한열(1966~1987)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전국으로 민주화 요구가 번지면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다.
6월 29일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받아들이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헌법이 개정되고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되찾은 주체는 권력자가 아니라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었다.
이한멸이 최루탄에 피격당한 후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모습(나무위키)
사면은 받았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퇴임 후 전두환은 1995년 구속됐다. 1996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97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거액의 추징금이 확정됐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김영삼(1927~2015) 대통령은 김대중(1924~2009) 대통령 당선인과 협의해 전두환과 노태우를 특별 사면했다. 사면이 죄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형벌의 집행을 면제했을 뿐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후에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2003년 재산명시 과정에서 예금 등을 합쳐 29만1000원가량을 신고하면서 전 재산 29만 원 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후 일가의 재산을 대상으로 추징금 환수가 이어졌다.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조비오(1932~2016) 신부를 거짓말쟁이 라고 비난했다. 이와 관련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고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전두환이 항소심 재판 도중 2021년 11월 23일 사망하면서 형사재판은 종결됐고, 따라서 유죄판결이 확정된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죽는 순간까지 광주에 사과하지 않았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 나란히 선 전두환(오른쪽)과 노태우. ⓒ 오마이뉴스
전두환의 그림자가 오늘 우리에게 묻는 것
전두환의 시대를 단순히 과거의 학살범으로만 기억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첫째, 계엄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에는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활동과 집회·시위 등을 제한하고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려는 내용까지 담겼다. 국회와 시민들의 즉각적인 저항으로 계엄은 약 6시간 만에 해제됐다. 전두환과 윤석열을 같은 인물로 비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전두환은 오랜 기간 군 내부에서 권력을 축적한 뒤 12·12와 5·17을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반면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국회와 시민의 저항으로 짧은 시간 안에 무너졌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헌법의 한계를 넘으려 할 때 위태로워진다.
둘째, 사과 없는 사면은 화해가 아니다. 전두환은 법적 처벌을 받았지만 피해자들에게 진정으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았다.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지 가해자가 요구할 권리가 아니다. 국가폭력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진실규명과 책임인정,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
셋째, 명령을 따랐을 뿐 이라는 말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국가범죄는 한 사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명령하는 사람, 실행하는 사람, 침묵하는 사람, 거짓말로 감싸는 사람들이 함께할 때 국가폭력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공직자의 책임과 시민의 감시가 중요하다.
넷째, 권력의 범죄는 기억해야 한다. 전두환은 2021년 죽었다. 그의 정권도 오래전에 끝났다. 12·12도, 5·18도, 삼청교육대도, 언론통제도 모두 과거의 일이 됐다. 그러나 그때의 책임과 피해자의 상처, 그리고 그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록과 판결에 남았고 피해자들의 삶에도 남았다.
전두환이 2007년 1월 5일 오전 연희동 자택 접견실에서 새해인사차 방문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두환이 (새해 덕담일 뿐인데) 뭐 녹음할 게 있어? 운을 떼자 이 전 시장이 겸연쩍은 듯 웃고 있다(오마이뉴스)
전두환은 정말 갔는가?
전두환은 갔다. 그러나 그의 시대가 남긴 책임과 기억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다. 권력은 무엇으로 정당해지는가. 국가가 저지른 범죄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은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가 끝내 하지 않은 말이 있다. 미안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말의 부재인지도 모른다. 29만 원이라는 숫자 뒤에 웃음만 남아서는 안 된다. 그 뒤에는 광주의 죽음과 고통, 그리고 오랫동안 진실을 요구해 온 피해자들의 삶이 있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죽은 권력자를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시는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 권력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2021년 8월 9일의 전두환 모습.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급격히 인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언론에 노출된 전두환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나무위키)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