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날린 3000 안타 장훈… 피폭자·약자 목소리 전해 [사람들] 거인구단 소속이던 1977년 한큐와의 일본 시리즈 대전에서 19타수 7인타를 쳐 수위타자를 기록했던 장훈. 아사히신문 9월 11일
지난 9일 86세로 타계한 재일동포 야구선수 장훈(존칭 생략)에 대한 일본 아사히신문 추모 사설에 붙인 지바상과대학 노동사회학자요 평론가 쯔네미 요헤이 교수의 논평 첫 문장이다.
‘카쯔!’(카쓰)는 한자 갈(할, 喝!)의 일본어 발음으로 이런, 정신차려!”, ‘압빠레!’는 잘했어!” 또는 장하다!” 정도의 뜻인데, 실제로는 둘 다 좀 더 거칠고 직설적인 뉘앙스를 지닌 말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모두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勲)가 생전에 자주 쓰던 말이다.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하리모토 이사오의 이름은 ‘장훈’(張勲, 1940년 6월~2026년 9월 9일)이다. 그는 한창 시절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일본 프로야구 황금시대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쯔네미 교수의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눈물 나는 사설이었다. 아사히신문 사설을 읽고 운 것은 실로 오랜만, 아니 처음이 아닐까.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의 부고를 듣고, 수많은 추도기사들이 나왔으나, 내가 보기엔 이 아사히신문 사설이 MVP, 아니 3관왕이 아닐까 한다. 야구에서의 공적, 피폭자・자이니치(재일) 코리안으로서의 경험, 그리고 삶(삶의 자세), 이 세 가지를 정중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압빠레!”
지금 60~70대 한국인 상당수의 청소년기에 ‘차별을 이겨낸 영웅’이었던 장훈을, 그를 알고 이해하는 세대의 일본인은 어떻게 추모할까. 조금 늦었지만, 쯔네미 교수의 논평과 그가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아사시힌문 11일 ‘사설’, 그리고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 대한 그의 발언을 통해 그 진실의 단면을 엿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차례로 소개한다.
사회학자 쇼와시대의 대스타이자 산 증인” 추모
쯔네미 교수의 논평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는 장훈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모르고 있었노라고 실토하고는 반성했다”고 썼다. 장훈이 4세 때 오른손잡이였던 그의 오른손이 모닥불 속에 빠져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 3분의 2를 잃는 큰 상처를 입은 사실은 몰랐다고 했다. 그리고 재일 한국인 2세로 차별을 받았고, 5세 때 히로시마 원폭을 만난 것은 알고 있었으나, 당시 11세였던 누나가 (원폭 피해 직후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 것도 그는 몰랐다.
그래도 야구를 계속해, 일본 프로야구에서 오직 그 한 사람만 3000 안타를 넘겼다. 엄청난 인생이다. 아니 ‘엄청난’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솔직하게 쓰겠다. 만년의 (장훈이 자주 쓴) ‘카쯔!’라는 말에서 꼰대 느낌을 가졌던 적도 있다. ‘압빠레!’에서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갖기도 했다. 문제발언도 있었다. 실제로 ‘젊은 꼰대’로서 (내가) 언론과 ‘꼰대’에 대해 얘기할 때 하리모토 선생은 늘 화제가 됐다. 나 자신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해야 하나’하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것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만한 고난과 부조리를 겪어내고도 야구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냈고,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피폭자로서, 재일 코리안으로서 목소리 내기 힘든 사람들의 얘기를 그는 계속했다.”
쯔네미 교수는 그 ‘카쯔!’도 ‘압빠레!’도 그런 삶에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단순 완고한 ‘오야지(아재) 개그’는 아니었다면서 그 준엄함 뒤에는 야구에 대한, 선수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썼다.
그는 자신은 장훈에 비하면 144분의 1(군사전략 시뮬레이션용 모형의 비율)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재감을 지닌 자지만, ‘가쯔!’도 ‘압빠레!’도 이미 TV나 라디오에 출연할 때 마음대로 쓰고 있다며 미력하지만 무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꼰대’로서 (장훈의) 전승자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며 이렇게 논평을 마무리했다.
쇼와(시대, 1926~1989년)의 대스타가 또 한 사람 세상을 떠났다. 동시에 전쟁도, 원폭도, 재일 코리안 차별도, 고도 성장도, 프로야구 황금시대도 알고 있는 살아 있는 증인이 한 사람 세상을 떠났다. 나아가 마찰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언하는 ‘입바른 사람’도 떠나갔다.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님, 진심으로 압빠레를. 합장”
도에이 구단 소속 시절의 장훈.
아사히신문 9월 11일 사설
3천 안타의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 서거-부조리를 넘어 약자를 얘기하다”
프로야구 최대인 통산 3085 안타를 기록한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이 타계했다. 국민적 스포츠의 스타로서 걸출한 성적을 남긴 한편으로,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를 체현한 존재이기도 했다. 히로시마 피폭 체험을 토대로 평화와 비핵을 호소하고, 재일 한국인 2세로 자란 처지와 생각을 말했다. 그 말은 조용하지만 날카로왔다.
도에이, 교진(거인), 롯데(구단) 등에서 실전 23년간 7차례 수위 타자였다. 통산 타율, 안타, 타점도 역대 상위였다. 319 도루와 합쳐 종합력(종합적인 성적)은 압도적이었다. 양 다리를 넓게 벌리고 침착하게 좌우 광각으로 나눠 쳐내는 센스가 탁월했으며, 퍼시픽 리그(센트럴 리그와 함께 일본 프로야구 양대 리그)에서 서로 전성기에 치열하게 경쟁했던 노무라 가쯔야 선생이 천재적”이라고 (그를) 평한 것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그 화려한 실적은 표층(겉으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4세 때 오른손잡이였던 그의 오른손이 모닥불 속에 빠져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의 3분의 2를 잃었고, 남은 세 손가락도 안쪽으로 굽었다. 야구에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던지는 것은 왼손으로 대체해 극복했으나 타격은 좌타자의 축이 되는 오른팔만으로 스윙을 포함해 하루 2000번은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고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의지가 원동력이었다.
은퇴 뒤 오래 출연했던 일요일 아침 TV프로에서는 물의를 빚은 발언도 많았지만, 젊은 선수들에게 ‘카쯔!’라고 외친 잣대는 자신을 향해 타협하지 않은 프로 의식이었을 것이다.
소수자의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다른 일면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은퇴 뒤의 일이다.
한국에서 이주한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홀로 아이들을 키운 어머니는 일본어를 잘 몰랐다. 자이니치(재일) 2세로서 당해야 했던 차별과 부조리를 야구와 함께 극복했다.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초창기의 한국야구에 조언자 역할을 했고, 인적 교류 등의 가교 역할도 했다. 조선반도와 관련해 분단의 원인을 만든 일본에게는 통일의 중개역이 돼 달라”고도 했다. 때로는 한국에 쓴 소리를 하기도 했다.
출신을 숨기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은 재일사회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피폭 체험을 얘기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5세 때 폭심지에서 2.5km 떨어진 자택에서 어머니가 (그를) 감싸안아 목숨을 구했다. 11세 누나는 전신 화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향해 그런 사실을)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환갑이 지나 원폭이 어디에 떨어졌는지도 모르는 젊은이들 얘기를 듣고 나서다. 히로시마를 방문했던 당시(2016년 5월)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사죄하진 않았으나, 행동은 보여 주었다”, (핵폐기 운동은) 한 걸음만으로는 부족하다. 10걸음 20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장애를 극복하고 얻은 영예에 자만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계속 대변해 왔다. 그 메시지를 다시한번 받아들이고 싶다.
아사히신문이 2015년 원폭 70주년에 실시한 앙케이트 조사 때 전쟁은 안돼!! 라고 쓴 장훈. 아사히신문 9월 10일
누나 목숨 앗아간 미국 용서할 수 없다”
* 장훈은 다른 기사에서 자신이 원폭 피해와 관련한 가족사에 대해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에 원폭이 떨어졌는지도 모르는 젊은 세대의 얘기를 듣고, ‘그런 비참한 일을 두 번 다시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는 원폭 투하 60여년 만에야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을 처음 찾아갔고, 그때 전시돼 있던 불에 탄 소녀의 옷을 손에 쥐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면서, 피폭 뒤 숨진 누나를 생각하며 뜨거웠을 것, 아팠을 것”이라고 했다.
피폭 뒤 특히 힘들었던 일을 몇 가지 선택지로 제시한 질문에 그는 ‘가족의 피폭사’, ‘차별과 편견’, ‘주변의 몰이해와 무관심’ 3가지를 들었다.
장훈은 2016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찾은 것을 두고 피폭자로서 정말 안도했다”면서도, 오바마가 원폭 사망자 위령비에 헌화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좋았다(잘됐다) 따위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지금도 미국을 원망하고 있으며,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과 한국에게 다른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
장훈의 이 말이 재일동포(한국인)와 일본인에게 지니는 의미는 다르다. 일본은 미국의 원폭투하 원인을 만든 침략자요 전쟁범죄국이었으나, 장훈 가족 등 당시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사망했다는 최대 3만 명에 이른다는 재일조선인들은 침략자의 피식민지 주민으로 일제에 강제동원당했거나 식민지 수탈과 억압에 따른 빈곤과 기아를 면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하층 노동자로 일하다가 피폭당한 다중적 피해자였다. 원폭 투하로 누나를 비참하게 죽음으로 내몬 미국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한 장훈 등 재일동포 피해자들의 얘기를 일본 우익은 미국의 비인간적 잔혹성과 전쟁 및 원폭 투하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면서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호도하고 감추는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자를 분명히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70년에 피폭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만들고도 조선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의 공원 내 건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히로시마 시는 공원 내에 기념비가 너무 많다는 등의 이유로 조선인 피해자 위령비 건립 부지 허가를 내 주지 않았고, 조선인 위령비는 공원 바깥에 따로 세워졌다. 이것이 차별이라는 여론이 일자 히로시마 시는 30년 가까이 지난 1999년에야 조선인 위령비를 공원 안쪽으로 이전했다.
쯔네미 교수가 얘기한 ‘쇼와 시대’라는 것도 일본 우익에게는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되새기고 그것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싶은 번영과 자긍의 시절일 수 있지만, 그 피해자들에게는 비참과 굴욕과 원한의 시절이었다.한승동 에디터 sudohaan@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