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빠져 에도 노예제 폐지 앞장선 루크리샤 모트 [사람들] 1840년 6월, 영국 런던. 노예제 폐지를 논하겠다며 전 세계 운동가들이 모인 세계 반노예제 대회 가 열렸다. 명분은 거창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노예제는 철폐되어야 한다. 그런데 회의장에 도착한 미국대표단 중 한 사람이 입장을 거부당했다. 이유는 단 하나, 여성이라서였다. 노예의 인권은 논해도 좋지만 여성이 그 논의에 끼는 건 곤란하다는 논리였다. 이 부조리극의 주인공이 바로 루크리샤 모트(Lucretia Mott, 1793~1880)다.
평등을 외치는 회의장에서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한 경험.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닌가. 명분은 늘 거창하고 실천은 늘 누군가를 빼놓는다는 점에서, 역사는 정말 지치지도 않고 같은 농담을 반복한다.
루크리샤 모트(위키피디아)
낸터컷 섬 소녀, 퀘이커교의 평등신앙을 의심 없이 수용
모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낸터컷 섬에서 퀘이커교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퀘이커교는 신 앞에서 남녀가 동등하다고 가르치는 종교였는데, 어린 모트는 이걸 철석같이 믿어 버렸다. 기숙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하던 시절, 같은 일을 하는 남자교사가 자신보다 두 배 많은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분노했다. 종교는 평등을 말하는데 월급봉투는 평등을 모른다는 이 명백한 모순을, 10대 소녀가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1811년 같은 학교 교사였던 제임스 모트(James Mott, 1788~1868)와 결혼했고, 여섯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1818년 무렵부터 퀘이커모임에서 설교를 시작했고, 1821년에는 정식 목회자로 인정받았다. 여성이 공개설교를 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그 물의를 적극적으로 일으키는 쪽을 택했다.
1842년의 제임스와 루크리샤 모트(위키피디아)
노예제 폐지 운동의 중심에 섰다가 여자는 빠져 소리 들어
1833년 모트는 필라델피아 여성 반노예제 협회를 공동 창립했다. 흑인여성과 백인여성이 함께 활동하는,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조직이었다. 노예제 폐지라는 대의 앞에서 인종의 벽은 넘어섰지만, 성별의 벽은 여전히 단단했다. 1840년 런던대회에서 입장이 거부된 사건은 그녀에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쫓겨난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Elizabeth Cady Stanton, 1815~1902)과 의기투합한 그녀는, 돌아가면 우리도 우리 권리를 논하는 자리를 만들자 고 다짐했다.
8년 뒤인 1848년, 그 다짐은 미국 세니커 폴스 여성권리대회로 실현됐다. 독립선언문의 문장을 그대로 빌려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고 선언한 이 대회는 미국 여성참정권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 정작 여성이 투표권을 얻기까지는 그 후로도 72년이 더 걸렸으니, 모트는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880년 11월 폐렴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녀는 아직 멀었다 고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1851년 필라델피아의 노예제 폐지론자들(펜실베이니아 노예제 반대 협회). 왼쪽부터 서 있는 인물은 메리 그루, 에드워드 M. 데이비스, 하워스 웨더럴드, 애비게일 킴버, 밀러 맥킴, 사라 퓨. 왼쪽부터 앉아 있는 인물은 올리버 존슨, 마거릿 존스 벌리, 벤자민 C. 베이컨, 로버트 퍼비스, 모트, 제임스 모트.(위키피디아)
명분 앞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원칙, 한국도 낯설지 않다
여기에서 한국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이라는 시대착오적 카드가 다시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란 건 그 발상의 낡음이었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헌법과 민주주의를 정지시키겠다는 그 모순은, 평등을 논하는 회의장에서 여성을 쫓아낸 1840년 런던의 그 모순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다. 명분의 포장지는 화려한데 그 안의 내용물은 늘 누군가의 배제다.
진보진영 내부의 풍경도 비슷하다. 평등과 연대를 말하면서도 정작 의사결정 테이블에서는 특정 목소리들이 슬그머니 밀려나는 일이 한국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 드물지 않다. 노동, 여성, 청년의 의제는 선거철 구호로는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막상 공천이나 정책결정의 순간에는 뒷전으로 밀리곤 한다. 모트가 겪은 일이 회의장 입장 거부 라는 노골적 형태였다면, 오늘날 한국에서는 검토하겠습니다 라는 정중한 형태로 진화했을 뿐, 본질은 그대로다.
모트가 남긴 진짜 교훈은 사실 단순하다. 배제 당했을 때 조용히 물러나지 않고, 8년이 걸리더라도 자기 자리를 직접 만들었다는 것. 한국의 진보진영이 분열과 자중지란을 겪을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1987년 양김 분열의 교훈도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명분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배제된 사람들이 직접 자기 테이블을 차려야 비로소 역사가 움직인다.
1948년 발행된 미국 기념우표로, 세니커 폴스 회의를 기념하며 여성 발전 100년: 1848–1948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왼쪽부터 엘리자베스 스탠턴, 캐리 채프먼 캐트, 루크리샤 모트(위키피디아)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모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평생 아직 멀었다 는 말을 듣고도 멈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세니커 폴스에서 선언했던 구호가 현실이 되는 데 72년이 걸렸지만, 결국 현실이 됐다. 명분을 앞세워 사람을 배제하는 쪽과, 배제당하고도 끝내 자리를 만들어낸 쪽 가운데 역사가 누구의 손을 들어줬는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루크리샤 모트, 보스턴 공립 도서관(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