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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세계사 유례 없는 한국의 성취, 돌연변이의 나라

세계사 유례 없는 한국의 성취, 돌연변이의 나라
[국제]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북한산. 우리 현대사에서 1970, 80년대는 급격한 산업화 시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학생운동의 최전성기이기도 했다. 근대 세계사에서 이 두 가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 결과로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강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부국강병론이 지구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불편한 사실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면 자칫 구름 속을 헤매다 생을 마감할 것 같아 이 글을 쓴다. 때는 1970년대 말. 나는 군대를 갓 제대한 복학생이었다. 복학은 했으나 캠퍼스의 공기는 마치 장례식을 치르는 종합병원 지하실처럼 암울했다. 영구집권을 꿈꾼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그즈음엔 저녁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의 목소리조차 공포에 질려 마지못해 하는 듯 들렸다. 10월의 늦은 저녁 청와대 인근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고 이튿날 모든 매체에 ‘박정희 유고’ 뉴스가 떴다. 일부는 울었고, 일부는 환호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사람이 앞으로 이 나라가 어찌 될지 깊은 탄식과 함께 걱정에 잠겼다. 인생의 변곡점이 된 1979년 유신체제 종말 1979년은 내 생애에 몇 안 되는 분수령 같은 변곡점이다. 그 이전까지 나는 학생운동권에 발을 반쯤 걸치고 살았는데 1979년을 기점으로 정치사회의 변화에 온몸을 던지기로 작정한다. 그 주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당연히 박정희의 유신독재였다. 그러나 단순히 독재와 맞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기에 나는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했다. 역사의 모든 사건은 배후에 필연적인 동기와 사정이 있었을까? 그해에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혁명이 일어났다. 두 나라 모두 한국에서 동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였지만 그 뉴스는 곧바로 내 심장을 거세게 두들겼다. 내게는 이란의 팔레비나 니카라과의 소모사 모두 박정희와 다를 바 없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 모두 미국이 있었다. 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세계질서와 그 아래 번성하는 제3세계 독재자들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단계   위키백과 대안 모색 위해 천착한 제국주의론과 종속이론 복학하여 1982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졸업장을 따기 위한 최소한의 공부 시간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 학습 써클 운영과 사회과학 학습에 몰두했다. 당시에 나의 관심을 독차지했던 것은 제국주의론과 종속이론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두 이론에 모순이 없었다. 이란과 니카라과는 그 두터운 장막을 뚫고 스스로를 해방시킨 희귀한 사례였다. 공부를 할수록 나의 갈증은 커져만 갔고 나는 졸업 무렵 공부를 끝내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나의 유학은 무슨 학위를 따서 강단에 서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저 막강한 제국주의 장막을 뚫고 스스로 해방할 수 있을지 그 방법론을 찾아내고 가능하다면 해외에서나마 현실 운동의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2년이 채 안 되는 미국 체류 기간은 오로지 해방의 방법론을 찾는 데 쓰였다.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사례와 문헌을 조사했고, 당시 미국에 있었던 제3세계 관련 집회와 시위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사회주의 혁명론은 그러한 모색의 하나였을 뿐이지 나는 당시에 무슨 주의자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길을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관심이나 성향에 근거해 말한다면 ‘제3세계주의자 (third worldist)’ 라고나 해야 할까? 그러나 그러한 명칭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에서 나는 다시 한번 ‘종속이론’을 면밀히 검토했다. 이론에 오류는 없었으나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예외 사례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바로 조국 대한민국이었다. 종속이론에 의하면 독자적 발전이 불가능한데 한국은 이론을 비웃듯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해서 나온 이론이 ‘종속적 발전론’이었다. 특수한 국제 정세와 안정적인 국제 분업 구조 아래에서는 종속 상태에서도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종속이론의 선구자 사미르 아민.  위키백과 ‘종속적 발전론’과 비폭력적 ‘공동체 운동론’ 돌연변이 대한민국을 종속적 발전이라는 타협적 용어로 정리한 뒤 나는 제3세계가 철옹성 같은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자기 발로 설 수 있을지 파고들었다. 일단 사회주의 이념을 건 폭력혁명의 길은 인민들에게 너무도 큰 희생과 피해를 강요했다. 설사 혁명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혁명보다 더 힘들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도 정도로 갔을 때의 일이지 대부분은 중도에 이리저리 왜곡되고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혁명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니카라과가 그랬다. 그리고 또 하나 문제가 있었다. 동기의 순수성을 떠나 폭력은 언제나 폭력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혁명을 통해 새로운 폭력적 체제를 만들었다면 혁명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 나는 급격한 변화가 아닌 비폭력적 방법에 의한 독자적 발전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례가 있었다. 주로 지역과 공동체에서 발견되었다. 나는 이를 정리하여 1991년 옥중에서 지역경제에 근거한 주민자치를 골자로 하는 ‘공동체 운동론’을 발표했다( 1992년 사회평론사). 이는 동구권 몰락 이후 혼돈에 빠진 우리 운동권에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 외에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을 붙잡아 갖은 고문 끝에 ‘골수 공산주의자’로 기소해 무기징역을 때린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관건은 ‘자주’와 ‘독립’ 반면, 한국은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이후 정치적으로 여전히 파시즘 체제가 압도적인 환경에서도 발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길거리와 여의도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산업현장에서는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듯 생산과 수출에 몰두했다. 게다가 우리는 휴전 중이 아닌가! 외부에서 보면 거의 미친 나라 수준이었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이 하나의 사회에서 국가적 규모로 이루어지는 것은 인류사에서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팍스 로마나’도 ‘팍스 아메리카나’도 모두 전쟁이 끝난 다음의 일이었다. 재미있게도 길거리에서 데모하는 학생의 아버지는 산업 전선의 일꾼이기 십상이었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저녁 밥상을 마주하면 영락없는 부자지간이지만, 낮 동안 일하는 현장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 나라에서 살고 싶어했고, 자식은 민주화가 되어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고 싶었다. 그리고 이 둘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두 가지를 다 이루었다. 이를 두고 세계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온갖 학설과 주장이 난무한다. 한국인의 특별한 DNA(유전자)를 말하는 이도 있고, 지정학적인 특별함 또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아래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누가 무슨 주장을 하든 원인의 일부이기는 하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젊은 시절부터 화두였던 한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바로 ‘자주’와 ‘독립’이다. 모든 걸 바꿔버린 디지털 문화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 가운데 독립은 했지만 자주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주권을 양보하는 대가로 독립을 쟁취한 경우도 있고, 독립 후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자주권을 스스로 포기한 경우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생 독립국은 이전 식민 모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는 1970년대 이후 국제 분업 형태로 고착되어 제3세계가 항구적으로 서구 선진 제국의 하청 회사처럼 기능하게 된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한 이 구조는 개별 국가의 노력으로 절대 변동될 수 없는 듯 보였다. 신생 독립국의 모든 사회적·문화적 지향점과 기준은 식민 모국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라디오에서 아메리칸 팝송을 들어야 했고, 극장에 가면 부러움 잔뜩 머금은 채 할리우드 영화를 봐야 했다. 2000년대 들어 K팝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가사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영어를 들으며 식민지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나는 내 몸에 각인된 미국 팝 멜로디를 지우려고 몇 년 동안 의도적으로 팝송을 외면하기도 했다. 그런데... 디지털 문화가 모든 걸 바꿔버렸다. 과거에 공부했던 사회과학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종속 상태에서 발전을 거듭하더니 식민모국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1970년대 대학을 다니던 시기였다. 대학 캠퍼스에서도 서양 사람 흉내내기가 유행이어서 나는 아직 생활한복이 등장하기 전인데도 곧잘 한복을 입고 등교하곤 했다. 일종의 저항이었다. 우리가 식민지를 겪지 않았다면 우리 전통 의복이 어떤 형태로건 현대적으로 변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주변의 반응은 냉담을 넘어 ‘웬 또라이?’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방탄소년단이 한복을 입고 무대에 서면 전 세계인이 흉내를 낸다. 이 현상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라면 이런 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인종과 국경, 전통과 관습을 싹 무시하고 오로지 감각과 욕망에 의해 그 즉시 소비하는 방식으로 문화가 전파된다. 반세기 넘게 세계 음악시장을 쥐락펴락했던 미국 그래미가 방탄소년단의 불참 선언 한 마디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대이다.   K팝의 선구적 그룹 방탄소년단 (BTS). 나무위키    K팝이 세계인을 사로잡은 3가지 요소 그러면 콘텐츠만 좋다면 어떤 나라의 누구라도 글로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비서구 국가 가운데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심지어 막강한 제조업 능력을 지닌 유럽과 일본도 그런 영향력을 가진 적이 없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국력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만 문화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어 왔다. 물론 대한민국은 순수 경제력으로도 세계 10대 강국에 든다. 하지만 문화적 영향력만큼은 국력을 훨씬 넘는 글로벌 파워를 가지고 있다. 나는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K팝의 어떤 요소가 그렇게 세계인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해 세 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가 오리지널 팝에 대한 식상함이다. 물론 이를 보완하는 다양한 음악이 서구 음악시장에 흘러 들어온 건 사실이지만 K팝만큼의 위력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전에 흘러 들어온 다른 음악들은 세계적으로 유행해도 서구 음악시장 구조에서 유행했다. 하지만 K팝은 독자적인 생태계를 만들어 유행시켰기 때문에 서구 음악 회사가 딴지를 걸어도 거뜬히 살아남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리지널 팝의 전파와 제국주의 세계 지배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대부분의 비서구 사회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서구 팝을 들어왔기에 귀에 익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배 문화에 대한 열등감 혹은 주눅 듦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한국은 같은 식민지를 겪은 나라로서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두 번째로 나는 이것이 결정적이라고 보는데, K팝은 겸손하다는 것이다. 세계적 슈퍼스타라면 무언가 잘난체하고 마음껏 나대도 괜찮다고 여길 법도 한데 K팝 스타들은 그런 게 없다. 전 세계가 우러러 보는 톱 스타의 위치에 올라도 결코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이 지점이 서구의 슈퍼스타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겸양의 미덕이겠으나 마음껏 뽐내고 자랑해야 하는 공연 세계에서는 경이로운 일이다. 세 번째로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와 무대 밖에서의 행위가 세계 젊은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그동안의 서구 수퍼스타들은 ‘올곧고 바른 청년’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들은 가사 내용도 무대 밖에서의 행위도 올바름 그 자체이다. 이는 세대를 넘어 전 연령층이 골고루 지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소외된 약자들의 상처와 무기력을 치유하고 팬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주는 행위를 보면 단군 할아버지가 설파한 ‘홍익인간’의 이념을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력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내것에만 집착한 북한, 대세 장악 뒤 내것 챙긴 한국 이제 다시 종속이론으로 돌아가 보자. 학자들이 아무리 종속이론이 더 이상 현실 세계에 적용되지 않는 낡은 이론이라고 주장해도 종속 상태에 있는 비서구 사회의 현실이 존재하는 한 함부로 폐기할 이론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종속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 사례이다. 이 예외로 인해 종속이론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가난한 나라가 왜 가난한지는 종속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한데, 그 나라가 가난을 떨쳐내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설명할 수가 없다. 이는 ‘관계론’을 적용하면 해결이 가능하다. 해당 나라가 가지고 있는 여러 관계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조건만 잘 맞으면 종속관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경우로 심지어 마지막 선진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관계’도 있지만, 한국인의 특수한 ‘자질’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흐름’을 읽는 눈과 ‘정체성 유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다. 수단과 방법을 불문하고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힘 없으면 어느 순간에라도 없어질 수 있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내 것만 애지중지하다가 남의 업신여김을 받느니, 비록 남의 것이지만 과감하게 틀어쥐고 대세를 장악한 뒤 우리 것을 슬금슬금 챙기는 것도 자주권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전자는 북조선이 취한 노선이고, 후자는 대한민국이 취한 노선이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판단하지 않겠다. 다만 혼돈 가운데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몸은 서구 문화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으면서 정신적으로나마 우리 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으나, 세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굴러갔다. 내가 원치 않았던 방식이었으나 결과는 비슷하게 나왔다. 결국 중요한 것은, ‘흐름’을 읽는 눈과 ‘정체성의 유지’로 좁혀진다. 우리는 일제 36년 동안 흐름도 잘 읽지 못했고, 정체성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그 결과 나라가 두 조각이 났으며 남북 양쪽에 일제의 군국주의적 파시즘이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 있다. 윤석열의 쿠데타 시도는 이를 반증한다. 군국주의 독 빼고 생명평화 문명으로 전환해야 세간에서 말하는 ‘친일파’는 군국주의에 기생하는 날파리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군국주의가 청산되면 바람처럼 사라진다. 일제가 이식한 군국주의는 남쪽에서는 ‘반공’에 기대어 유지되었고, 북쪽에서는 ‘남조선 해방’이라는 이름 아래 유지되었다. 이 군국주의 체제를 가지고 남쪽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문화강국을 만들어냈고, 북쪽은 국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강력한 군사강국을 만들었다. 둘 다 어쩜 저럴 수 있나 싶을 정도의 미친 돌연변이 국가이다. 황대권 생명평화운동가, 야생초 편지 작가 우리 민족이 진정한 홍익인간 민족으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군국주의 독을 빼고 그 자리를 생명평화의 기운으로 채워야 한다. 지금처럼 미친 듯이 소비하고 미친 듯이 생산하는 부국강병책은 문명의 멸망을 가속화할 뿐이다. 이제 우리가 확보한 글로벌한 영향력을 가지고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문명 전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만약 이 길을 가지 못하면 돌연변이 대한민국은 인류 문명을 지옥으로 이끄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황대권 문명전환 hdk@mind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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