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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민주공화국의 길을 열 시민적 인간 호모 시비쿠스

민주공화국의 길을 열 시민적 인간 호모 시비쿠스
[사람들]
이 연재는 서울의 한 야구장에서 시작했습니다. 청소년들의 입에서 스타벅스 가야지”와 탱크데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5·18민주항쟁 당시의 국가폭력을 조롱하던 온라인 언어가 놀이와 응원의 언어로 바뀌어 경기장에 등장했습니다. 그 말의 뿌리를 따라가며 저는 줄곧 하나의 질문을 붙들었습니다. 인간은 왜 자신을 받아주는 공동체를 그토록 갈망하며, 때로는 타인을 적으로 삼는 집단 안에서 위안을 얻습니까. 인간에게는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얻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과 지배의 욕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공동체에 속하고 싶어 하며, 누군가를 돌보고 힘을 모아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상반된 성향 가운데 무엇이 앞서는지는 그가 살아가는 관계와 제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의 이성도 욕망을 절제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욕망을 정당화하고 확장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 욕망이 어떤 관계와 제도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 조직되는가입니다. 욕망이 타인을 지배하는 힘이 될 것인가. 공동의 성취를 이루는 동력이 될 것인가. 민주공화국의 의미는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14세기 이탈리아 시에나의 시청사인 푸블리코궁전에 그려진 암브로조 로렌체티의 좋은 정부가 도시와 농촌에 미치는 효과입니다. 도시의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일하고 물건을 거래하며 관계를 맺습니다. 아이들은 배우고 사람들은 춤을 춥니다. 성벽 밖에서는 농민과 상인이 안전하게 오가며 공동체의 삶을 이어갑니다.이 그림에서 좋은 정부의 가치는 통치자의 덕목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시민이 안심하고 일하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자신의 능력을 공동체의 발전으로 연결할 수 있는 일상의 질서로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직업과 삶의 모습이 공존하지만 공포와 폭력이 시민의 일상을 지배하지 않습니다.칼럼 16이 제시한 호모 시비쿠스(Homo civicus), 곧 시민적 인간도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성장합니다. 누구에게도 자의적으로 지배받지 않고 자신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않으며, 타인과 함께 공동의 규칙을 만들고 지켜가는 시민입니다.극우가 불안과 고립을 적대의 공동체로 조직한다면, 민주공화국은 시민의 인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를 참여와 협력, 공동의 성취로 연결해야 합니다. 이 그림은 민주공화국이 추상적인 제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안전하게 일하고 배우며 관계를 맺는 일상 속에서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자료 : 암브로조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 좋은 정부가 도시와 농촌에 미치는 효과, 1338∼1339년, 프레스코화. 이탈리아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아홉 위원회의 방 소장.) ■ 민주공화국은 욕망을 없애는 나라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은 인간의 욕망을 없애는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에게 경쟁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능력을 발휘해 더 나은 삶과 사회적 인정을 얻으려는 욕구는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그 욕망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빼앗는 방식으로 실현될 때 생깁니다. 민주공화국은 경쟁이 지배로 변하지 않도록 제어해야 합니다. 출발선의 불평등을 줄이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이유로 생존의 기반과 인간의 존엄까지 부정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자의적인 권력 아래 놓이지 않아야 하며, 자신도 다른 사람을 자의적으로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민주공화주의가 말하는 비지배(非支配, non-domination)의 자유입니다(필립 페팃, 《공화주의―자유와 정부에 관한 이론》, 1997). 자유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상태가 아닙니다. 국가와 기업, 정당과 종교, 학교와 가족 안에서 강자의 선의와 변덕에 삶을 맡기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개인의 성취를 존중하되 세습되는 특권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고, 경쟁을 허용하되 패자를 공동체 밖으로 내몰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권력은 시민의 감시와 통제 아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향할 사회는 경쟁이 사라진 낙원이 아닙니다. 경쟁은 허용하되 지배는 허용하지 않고, 개인의 성취를 공동체의 발전과 연결하는 사회입니다. 공동체를 잃은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한국의 근현대사는 국가와 권력이 필요로 하는 인간을 길러낸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학교는 천황에게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만들었습니다. 해방 이후 국가는 반공국민을 요구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산업역군을 길러냈습니다. 군사독재는 교련과 학도호국단을 통해 침묵하는 학생을 만들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학교는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을 길러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제도로 자리 잡는 동안 시민을 형성할 공동체와 공론장은 충분히 자라지 못했습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학교는 함께 살아가는 시민보다 경쟁에서 이기는 개인을 길러내는 곳이 되었고, 대학은 시민을 형성하는 공론장에서 취업 준비기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청년에게 요구된 것은 함께 살아가는 능력보다 혼자 살아남는 능력이었습니다. 성공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설명되고 실패의 책임도 개인에게 돌아갔습니다. 부모의 재산과 지위가 교육과 취업, 주거와 결혼의 가능성을 좌우했지만, 청년은 구조적 불평등을 자신의 무능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공동체와 공론장이 약해지면서 청년이 생각을 말하고 공동의 결정에 참여할 공간도 좁아졌습니다. 정치는 선거 때마다 청년을 불렀지만, 정작 청년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경제적 이익만을 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공동체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을 원합니다. 학교와 대학, 직장과 정당, 지역사회는 그 욕구를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로 존재했지만 청년의 일자리와 주거, 불평등과 미래를 바꾸는 힘으로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습니다. 정치가 민주화되었다고 해서 청년의 삶까지 저절로 민주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빈자리로 극우가 들어왔습니다. ■ 극우는 적대의 공동체를 제공했다 공동체에서 밀려난 사람도 소속의 욕구까지 버리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받아줄 다른 공동체를 찾습니다. 극우세력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어 경쟁에서 밀려난 청년에게 실패의 원인을 설명했습니다. 다만 불평등한 경제구조와 세습되는 자산, 무너진 사회안전망 대신 공격하기 쉬운 집단을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너의 몫을 빼앗아간 적이 있다. 대한민국은 그들 때문에 위기에 빠졌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알고 있다. 우리와 함께 싸우면 너도 나라를 구하는 전사가 될 수 있다. 극우는 청년의 삶을 실제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대신 청년이 분노해야 할 대상을 정해주었습니다. 실질적인 권력을 주지 않았지만 강한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대리적 권력감을 제공했습니다. 극우가 제공한 것은 증오만이 아니었습니다. 소속감과 사명감, 확신과 보상도 주었습니다. 그 안에서 청년은 더 이상 경쟁에서 밀려난 개인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는 애국자, 남들이 모르는 진실을 아는 선택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댓글을 달고 영상을 공유하며 집회에 참여하는 일은 자신의 존재와 영향력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극우는 인간에게 없던 욕망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불안과 인정욕구, 지배욕망과 소속의 갈망을 한 방향으로 몰아갔습니다. 불안은 적대감으로, 좌절은 증오로, 소속되고 싶은 마음은 배타적 진영의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영향력을 갖고 싶은 욕구는 댓글 공격과 거리동원으로 분출되었습니다. 이 연재에서 살펴본 극우는 하나의 정당이나 단체, 몇몇 유튜버와 정치인의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인은 역사적 명분을 만들고, 일부 교육시설은 그 세계관을 청소년에게 가르쳤습니다. 일부 종교세력은 정치적 적대를 신앙과 구원의 언어로 바꾸었고, 유튜버와 플랫폼은 거짓과 혐오를 증폭했습니다. 댓글 조직은 조직된 주장을 자발적인 여론처럼 꾸몄으며, 정치인은 이를 집회와 선거의 힘으로 조직했습니다. 선동하고 조직한 사람들은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들의 말을 행동으로 옮긴 청년들만 거리와 법정에 남았습니다. 극우생태계에 들어간 청년은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혐오와 폭력에 가담하는 순간 다른 시민에게는 가해자가 됩니다. 국가폭력을 조롱하고 허위정보를 퍼뜨리며 법원에 난입하고 다른 시민의 자유와 안전을 위협한 행위에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책임이 가장 아래에 있는 청년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행동을 계획하고 선동한 사람, 청년의 분노를 돈과 표로 바꾼 사람, 국가기관과 교육기관의 권위를 빌려 극우세계관을 퍼뜨린 사람에게까지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청년만 처벌하고 생태계를 그대로 두면 또 다른 청년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 극우와 민주공화국은 같은 욕망을 다르게 조직한다 극우세력은 민주주의가 비워둔 자리를 먼저 차지했기 때문에 강해졌습니다. 민주주의는 청년에게 헌법과 선거제도를 가르쳤지만, 자신의 참여가 공동체의 결정을 바꾸는 경험은 충분히 주지 못했습니다. 국가는 민주주의를 믿으라고 했으나, 민주주의가 삶을 바꾸는 모습은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극우는 그 틈에서 즉각적인 효능감을 제공했습니다. 댓글 하나에도 거대한 정치적 싸움에 참여한다고 느끼게 했고, 집회에 나가면 역사의 주인공이 된 듯 믿게 했습니다. 집단의 숫자와 함성을 자신의 힘으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그것은 왜곡된 시민적 효능감이었지만 강력했습니다.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인간의 욕구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극우와 민주공화국은 서로 다른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 안의 같은 욕망과 가능성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조직합니다. 극우는 불안을 적대감으로, 인정욕구를 전사의 정체성으로, 소속의 갈망을 배타적 진영의식으로 바꿉니다. 민주공화국은 그것을 참여와 연대, 시민적 기여와 공동의 성취로 이어야 합니다. 청년에게 극우공동체를 떠나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곳을 떠난 뒤 돌아올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출구만 있다고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문밖에 다시 설 곳이 없다면 익숙한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상담과 교육, 일자리와 주거는 청년이 돌아오는 길을 받치는 현실의 발판입니다. 믿을 만한 정보와 새로운 관계, 자신의 참여가 공동의 결정을 바꾸는 경험은 그 길을 민주주의로 이어줍니다. 삶을 지탱하는 경제적 안전망과 말하고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안전망을 함께 세워야 합니다. 경제적 불안만 해소하면 극우화가 사라진다는 생각도, 시민교육만 강화하면 해결된다는 생각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꾸릴 물질적 조건과 시민으로 존중받고 참여할 정치적 조건이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 극우생태계를 움직이는 돈과 교육, 플랫폼과 정치동원의 고리를 추적하고 위법한 행위에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판단의 대상은 생각이 아니라 행위여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하되 허위정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고 폭력과 헌정파괴를 선동하거나 실행한 행위에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처벌과 차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짓과 혐오를 걷어낸 자리를 민주주의의 관계와 공론장으로 채워야 합니다. 청년이 적대의 공동체를 떠나 돌아올 시민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그 공동체를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호모 시비쿠스입니다. ■ 호모 시비쿠스―민주공화국의 시민적 인간 그렇다면 민주공화국은 어떤 인간을 필요로 합니까. 일제의 황국신민, 분단국가의 반공국민, 산업화 시대의 산업역군, 군사독재의 침묵하는 학생을 거쳐 외환위기 이후에는 경쟁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이 등장했습니다. 오늘의 극우생태계는 그렇게 고립된 개인의 불안과 인정욕구를 적대와 복종의 정치로 조직해 전사로 불러냅니다.   박재동 촛불시민들 (부분) 이 연재는 극우화된 청년을 비판하는 데서 끝날 수 없습니다. 복종하는 국민과 고립된 경쟁자, 적을 찾아 헤매는 정치전사를 넘어 민주공화국의 시민적 인간을 제시해야 합니다. 저는 그 인간을 ‘호모 시비쿠스(Homo civicus)’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다만 국가가 바람직한 인간상을 정해 교육으로 주조한다면 또 다른 ‘국민 만들기’가 됩니다. 민주공화국은 새로운 인간을 찍어내는 국가가 아닙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존중과 돌봄을 경험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며, 자신의 참여가 공동의 결정을 바꾸는 과정에서 시민이 스스로 성장할 조건을 마련하는 체제입니다. 이탈리아 사회학자 프랑코 카사노(Franco Cassano, 1943∼2021)는 좌파 지식인으로 출발해 시민사회운동과 현실정치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2004년 《호모 시비쿠스―공동재의 합리적 광기》에서 공동재를 지키고 공공의 문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인간형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비판한 것은 시장 자체가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시장의 논리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사유화와 파괴적 개인주의가 공동의 세계를 허무는 현실이었습니다. 물과 환경, 도시와 문화, 교육과 공론장까지 상품이 되면 시민은 공동체의 주체에서 시장의 고객으로 축소됩니다. 자본과 정보, 권력의 비대칭 속에서 공동재는 강자의 전리품이 되고, 경쟁에서 밀린 사람은 소득과 기회뿐 아니라 모두에게 속해야 할 세계에서도 배제됩니다. 카사노가 보기에 시장만능주의는 평등만이 아니라 공동의 문제를 함께 결정하고 공동재를 돌보는 시민적 능력까지 무너뜨렸습니다(프랑코 카사노, 《호모 시비쿠스―공동재의 합리적 광기》, 2004). 이 문제는 한국 청년의 극우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각자도생의 질서는 청년을 공동체의 시민보다 생존을 다투는 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시민을 고립된 경쟁자로 해체했다면, 극우생태계는 그 경쟁자를 적대하는 정치전사로 다시 조직했습니다. 카사노의 호모 시비쿠스가 이 연재의 마지막에 필요한 이유입니다. 경쟁하는 개인을 극우의 군중이 아니라 공동재를 지키는 시민으로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와 참여만으로 민주적 시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는 그 자체로 선하지 않습니다. 국가와 민족, 종교와 정당은 공동체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충성과 복종을 요구해왔습니다. 극우세력도 불안과 고립에 빠진 사람들에게 강한 소속감과 참여의 효능감을 제공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충성과 타인에 대한 적대를 요구하는 공동체는 시민공동체가 아니라 지배의 조직입니다. 저는 카사노의 문제의식 위에 민주공화주의의 비지배 원리를 더하고자 합니다. 이 글의 호모 시비쿠스는 공동재를 지키고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의적으로 지배받지 않고 자신도 타인을 지배하지 않으며, 자신이 지지하는 권력까지 감시합니다. 공동체의 규칙을 다른 시민과 함께 만들고, 사실을 확인하며,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욕망과 편견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되 갈등을 폭력과 배제가 아니라 대화와 제도로 풀어가는 민주공화국의 공동주권자입니다. ■ 사람을 한울처럼 대한다는 것 호모 시비쿠스는 서구의 시민사회론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인간형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상적 전통에도 인간의 존엄에서 출발해 공동체와 사회를 바꾸려 한 흐름이 있습니다. 동학은 그 중요한 뿌리입니다. 동학(東學)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는 시천주(侍天主)를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시천주는 인간의 존엄이 국가와 지배자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며, 신분과 재산, 학력과 능력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최제우, 《동경대전》, 1880년 초간; 《용담유사》, 1881년 초간).   1893년 11월 전봉준 등 20명이 고부농민봉기를 준비하며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사발통문(沙鉢通文)입니다. 참여자들의 이름을 사발을 엎어놓은 듯 원형으로 적어 누가 주도자인지 쉽게 알아볼 수 없게 했습니다.한 사람의 이름을 맨 앞에 세우지 않은 원형의 서명은 영웅 한 사람을 중심으로 세운 수직적 질서와 다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각자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 위에 놓이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를 서로 다른 개인들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원을 이루고, 그 결정에 함께 참여하고 책임지는 시민공동체의 상징으로 읽고자 합니다.(자료 : 고부봉기에 관한 사발통문, 1893년 11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장·사진 제공.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제233호.) 최제우의 동귀일체(同歸一體)는 존엄한 존재들이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의 생명과 세계로 이어져 있다는 연대의 원리입니다. 개인의 차이를 지우고 하나의 집단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존엄을 지키면서 서로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은 이를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로 발전시켰습니다. 사람을 한울님처럼 섬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섬김은 강자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존엄을 인정하고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실천입니다(최시형, 《해월신사법설》, 사후 문도들의 기록을 모아 편찬). 이 인간 존엄 사상은 이후 천도교에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선언으로 정식화되었습니다. 동학은 1905년 제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되었습니다. 이는 동학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을 계승하면서 친일화한 일진회 계열과 결별하고 근대적 종교교단으로 재편한 것이었습니다. 동학은 내면의 깨달음과 생활윤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지며, 마침내 낡은 지배질서와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개벽(開闢)입니다. 개벽이라는 말은 동학 이전부터 천지가 처음 열리는 일을 가리켰지만, 동학은 이를 인간과 사회를 새롭게 여는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변혁의 원리로 바꾸었습니다. 존엄한 인간이 서로를 섬기며 낡은 관계와 제도를 함께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 변화가 지향하는 공동세계를 대동세상(大同世上)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대동은 본래 《예기》 〈예운〉에서 비롯된 유교의 이상사회 개념으로, 동학이 처음 만든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학은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인간관을 통해 대동의 이상에 새로운 평등의 근거를 부여했습니다. 대동세상은 갈등과 경쟁이 사라진 낙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누구의 자의적 지배에도 예속되지 않은 채 공동의 문제를 함께 결정하고 인간적 존엄을 지키는 사회입니다. 시천주가 모든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고, 동귀일체가 그 존엄의 연대를 밝히며, 사인여천이 이를 삶의 윤리로 옮긴다면, 개벽은 인간과 관계와 제도를 바꾸는 과정이고 대동세상은 그 변화가 향하는 공동세계입니다. 적을 만들어 결속하는 극우공동체와 달리, 이 공동체는 타인의 존엄을 훼손해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호모 시비쿠스는 그 존엄을 민주공화국의 제도와 행동 속에서 실천하는 시민입니다. 민주공화주의 공동체는 참여할 자유와 함께 비판할 자유, 공동체를 떠날 자유와 잘못을 고친 뒤 돌아올 길도 보장해야 합니다. 시민은 충성하는 신민이 아니라 질문하고 결정하는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한울처럼 대한다는 것은 인간을 권위의 판단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은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판단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는 능력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판단을 기술에 맡길 가능성이 커진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중요합니다. ■ 인공지능 시대에도 판단은 시민의 몫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식과 생산능력을 빠르게 확장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생산력이 커진다고 시민의 힘까지 저절로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더 강한 개인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더 유능한 시민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판단까지 인공지능에 맡길 때 생깁니다. 의존이 반복되면 인간은 스스로 질문하고 판단하는 능력뿐 아니라 자기 판단에 대한 신뢰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판단의 의존은 사고의 의존으로 이어지고, 시민적 주체성을 약화시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지식노동자들의 자기보고식 조사에서도 인공지능을 더 신뢰할수록 비판적 사고에 들이는 인지적 노력이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판단을 신뢰할수록 인공지능의 답을 더 적극적으로 검토했습니다(하오핑 리 외, 〈생성형 인공지능이 비판적 사고에 미치는 영향―지식노동자 조사에서 나타난 인지적 노력 감소와 신뢰 효과〉, 2025).   인공지능(AI) PG. 연합뉴스 이 연구만으로 인공지능이 시민성을 직접 약화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판단하는 경험이 줄면 책임의식도 약해질 가능성은 경계해야 합니다. 시민은 주어진 답을 받아들이는 이용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를 판단하고 근거를 설명하며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묻고 토론하며 답을 찾던 일을 혼자 화면 앞에서 해결할수록 공동체가 저절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질문하고 논쟁하며 공동의 판단을 만드는 과정이 사라지면 공론장도 약해집니다. 기술이 개인의 생산성과 경쟁력만 높인다면 인간은 더 유능해지면서도 더 고립될 수 있습니다. 정보와 기술을 소유한 플랫폼 기업에 권력이 집중되면, 개인은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는 더욱 무력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공지능을 거부하는 것이 해답은 아닙니다. 반복노동을 줄여 시민의 시간과 능력을 넓히고, 전문가와 관료가 독점했던 지식에 더 많은 시민이 접근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모아 공동의 해법을 찾는 숙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판단을 대신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더 깊이 생각하고 다른 시민과 더 넓게 숙의하도록 돕는가입니다. 인공지능은 정답을 내려주는 권위가 아니라 반론을 제시하고 관점을 넓혀 공동의 문제를 더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여야 합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호모 시비쿠스는 기술을 거부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술에 판단을 넘기지 않는 인간입니다. 인공지능의 답을 검토하고 다른 시민과 토론하며, 최종 판단과 책임은 자신과 공동체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무엇을 함께 결정해야 하는지는 더 중요해집니다.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만 물어서는 부족합니다. 그 기술을 가진 인간이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지도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공지능 시대에 인문학이 담당해야 할 질문입니다. ■ 민주공화국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 연재는 청년극우화의 원인을 청년 개인에게서 찾지 않았습니다.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을 만들고 가르치고 퍼뜨린 것은 어른들의 세계였습니다. 역사관과 교육, 일부 종교세력과 학교 밖 교육시설, 댓글 조직과 플랫폼, 정치권력과 국제적 극우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었습니다. 그 구조를 밝히는 것은 청년의 책임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이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극우생태계를 해체하는 데서 그쳐서도 안 됩니다. 거짓과 혐오가 자라던 토양을 그대로 둔 채 줄기만 자르면 뿌리는 다시 돋습니다. 그 자리를 민주공화주의의 공동체와 공론장으로 채워야 합니다. 민주공화국은 헌법을 만들고 선거를 실시했다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시민이 권력을 감시하고 잘못된 제도를 고치며 공동체의 경계를 넓혀갈 때에만 살아 있는 공화국으로 남습니다. 시민이 세운 권력도 감시와 통제가 약해지면 관료주의와 기득권, 진영논리와 지도자 숭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시민권력은 무너지고, 어떤 시민권력은 견고한 민주주의로 정착합니까. 청년극우화를 따라온 이 연재는 마침내 시민이 세운 권력을 어떻게 시민 곁에 머물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닿았습니다. 어떤 제도도 시민의 참여 없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권력도 감시와 비판 없이 시민의 권력으로 남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한 세대의 승리로 다음 세대에 자동 상속되지 않습니다. 세대마다 다시 배우고 지키며 고쳐야 합니다. ■ 다시 배재고에서―아이들이 돌아올 공동체 서울의 야구장에서 튀어나온 말은 결국 광주의 묘역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배재고 학생들은 광주제일고 학생들에게 사과하고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습니다. 자신이 조롱했던 역사의 현장을 찾아 타인의 고통 앞에 서고, 잘못을 인정해 사과하는 경험은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6일 오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참배하고 있다.2026.7.6 연합뉴스 민주주의 교육은 정답을 암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남긴 상처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잘못된 판단을 고친 뒤 다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돌아오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몇 학생의 사과로 어른들의 책임까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사과하는 동안 그 언어를 만들고 퍼뜨린 어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학살의 기억을 농담으로 바꾼 사람들, 청소년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말한 사람들은 어떤 책임을 졌습니까. 아이들에게만 반성을 요구하고 어른들의 세계를 그대로 둔다면 같은 일은 되풀이됩니다. 모든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모든 어른들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의 행위에는 책임을 묻되, 그 행위를 가능하게 만든 어른들의 책임은 더 깊이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호모 시비쿠스는 자신의 자유와 함께 타인의 자유를 지키고,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으며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시민입니다. 한 사람을 한울처럼 대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을 내쫓지 않으며, 갈등을 폭력과 배제가 아니라 대화와 제도로 풀어갑니다. 그런 시민이 함께 말하고 결정할 공론장을 다시 세우는 일이 오늘의 개벽이며, 그들이 살아갈 공동체가 오늘의 대동세상입니다. 민주공화국은 한 번 세우고 끝나는 나라가 아니라, 시민이 권력을 감시하고 잘못된 제도를 고치며 다음 세대가 시민으로 성장할 자리를 넓혀가는 과정입니다. 청년이 극우의 공동체를 떠나 돌아올 자리를 만드는 일은 민주공화국을 다시 시민의 것으로 세우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사과하고 돌아올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이제 어른들의 몫입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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