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참정권 관심 끌려면 유리창 깨라, E 팽크허스트 [뉴스] 얌전한 여자는 역사책에 남지 않는다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1858~1928)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치에 열심인 사업가였고,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여성참정권 관련 모임에 드나들었다. 애초에 순탄한 인생을 살 팔자는 아니었던 셈이다. 1879년, 스물네 살 나이 차가 나는 변호사 리처드 팽크허스트(Richard Pankhurst, 1834~1898)와 결혼했다. 남편은 최초의 여성참정권 법안을 쓴 사람이었으니, 이 부부의 저녁 밥상 대화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대화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사실이었다. 19세기 말 영국여성들은 얌전히 청원서를 내고, 신문에 점잖은 투고를 하고, 의회 앞에서 조용히 손수건을 흔드는 방식으로 반 세기 가까이 참정권을 요구했다. 결과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팽크허스트는 이 조용한 저항이 사실상 벽에 대고 노래 부르는 짓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903년, 그는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 s Social and Political Union, WSPU)을 세우고 슬로건을 내걸었다. 말이 아니라 행동을. 이보다 더 무섭게 들리는 문장도 드물다.
1913년경의 팽크허스트(위키피디아)
창문을 깨야 신문 1면에 실린다
WSPU 회원들은 곧 서프러제트(suffragette) 라는 별명을 얻었다. 언론이 놀리려고 붙인 이름인데, 이들은 그 이름을 그대로 받아 자기들의 브랜드로 만들어버렸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악플을 유행어로 되치기 한 셈이다.
이들의 전술은 점점 과감해졌다. 상점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고, 골프장 잔디를 파헤쳤다. 팽크허스트의 논리는 단순했다. 평화적인 요구는 백 년 동안 무시당했으니, 이제는 재산을 깨뜨려서라도 신문 1면에 실려야 한다는 것. 큰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Christabel Pankhurst, 1880~1958)는 전략을 짰고, 작은딸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 1882~1960)는 노동계급 여성들과 함께 싸우며 어머니와 노선이 갈렸다.
에멀린과 큰딸 크리스타벨은 여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 에 집중하는 전략을 폈다. 부자든 가난하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다는 논리로 계급을 뛰어넘는 지지층을 모으려 한 것이다. 반면 작은딸 실비아는 런던 빈민가의 노동계급 여성들 속으로 들어가 참정권 투쟁을 노동운동·사회주의와 결합시켜야 한다고 봤다. 1912년 서프러제트 이스트런던연합(East London Federation of the Suffragettes)을 세워 이 노선을 밀어붙였다. 이러니 한 집안 안에서도 어디까지 과격해질 것인가 를 두고 매일 저녁 토론이 벌어졌을 게 뻔하다.
1913년에는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 1872~1913)이라는 회원이 경마장에서 국왕의 말 앞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이 실수였는지 순교하려고 뛰어든 것였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지만, 확실한 건 그의 죽음이 운동을 더 큰 화제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팽크허스트는 집을 판 후 끊임없이 여행하며 영국과 미국 전역에서 연설을 했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인 자유냐 죽음이냐(Freedom or Death) 는 1913년 미국 코네티컷에서 행해졌다(위키피디아)
감옥, 단식, 그리고 고양이와 쥐
팽크허스트 본인은 수십 차례 체포되었다. 감옥에서는 단식투쟁을 벌였고, 정부는 강제로 음식을 몸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는 꾀를 냈다. 단식하는 수감자가 몸이 약해지면 일단 풀어줬다가,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정책에 고양이와 쥐 법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정부가 활동가들을 가지고 논다는 뜻이었으니, 풍자로는 이보다 정확할 수 없다.
이렇게 몸으로 싸우던 팽크허스트가 1914년 갑자기 방향을 튼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모든 투쟁을 멈추고 전쟁 지원으로 돌아섰다. 여성들에게 공장에 나가 남자들이 떠난 자리를 채우라고 독려한 것이다. 얼핏 변절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의 한 수였다. 여성들이 군수공장과 대중교통에서 실력을 증명하자 여자는 투표할 자격이 없다 는 논리 자체가 무너져버렸다. 전쟁이 팽크허스트 대신 논쟁을 정리해준 셈이다. 1918년, 30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문이 열리긴 열렸다.
여성사회정치연합(WSPU)는 1903년 맨체스터 넬슨 스트리트 62번지에 위치한 팽크허스트의 자택에서 창립되었다. 문화재 건축물 그레이드 II 등급의 건축물인 빅토리아 빌라 는 현재 팽크허스트 센터로 쓰이고 있다.(위키피디아)
혁명가, 보수당에 입당하다
말년의 팽크허스트는 뜻밖의 행보를 보인다. 1926년 보수당에 입당하고,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것이다. 젊은 시절 노동운동, 사회주의와 함께했던 이력을 생각하면 놀라운 전환이다. 사람은 늙으면 안정을 찾는다는 흔한 이야기로 정리할 수도 있지만, 정작 본인은 별다른 해명을 남기지 않았다. 혁명가도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해두자.
1928년, 영국 의회는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조건의 투표권을 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팽크허스트는 이 법이 최종 통과되기 몇 주 전, 6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평생을 걸었던 승리를 눈으로 보지 못한 채였다.
(죄수복을 입은) 팽크허스트는 자신의 첫 수감 생활을 마치 야수로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 과 같았다고 묘사했다(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다시 읽는 팽크허스트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영국 여성이 완전한 참정권을 얻기까지는 반 세기 넘는 싸움이 필요했지만, 한국은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남녀 모두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피 흘리며 싸운 결과가 아니라 헌법제정과 함께 거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거저 주어졌다 는 사실이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 싸워서 얻은 권리는 그 무게를 알지만, 처음부터 주어진 권리는 당연하게 여겨지기 쉽다. 지금 한국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이나 사회 요직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자리를 보면, 형식적 참정권과 실질적 대표성 사이의 간극이 여전히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하나, 팽크허스트의 이야기는 질서를 깨는 저항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을 막기 위해 시민들이 국회 담장을 넘고 군용 차량을 몸으로 막아섰을 때, 그 행동은 분명 평소라면 질서 위반 이었다. 그러나 그 질서 위반이 없었다면 더 큰 불법이 완성됐을 것이다. 팽크허스트가 유리창을 깬 것도 같은 논리였다. 합법적 절차가 정의를 배신할 때, 저항은 때로 불법의 형태를 띤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백 년 전 유리창을 깨던 여자들의 이야기가 오늘 한국 국회 앞 풍경과 겹쳐 보인다면, 그건 우연이아니라 역사가 반복해서 던지는 같은 질문 때문일 것이다.
1908년 팽크허스트와 영국 여성 참정권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엘리자베스 울스텐홈-엘미과 함께 한 모습(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